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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127대 황제 마누일 2세 Μανουήλ Β | |
이름 | 마누일 팔레올로고스 Μανουήλ Παλαιολόγος |
출생 | 1350년 6월 27일 |
사망 | 1425년 7월 21일 (향년 75세)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전임자 | |
후임자 | |
부모 | |
배우자 | |
자녀 |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요안니스 8세,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 미하일 팔레올로고스, 콘스탄티노스 11세,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
종교 |
요안니스 5세의 둘째 아들로, 1373년 형인 안드로니코스 4세가 아버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듬해 후계자로 임명받았다. 그해 9월에 공동 황제가 되었고 1379년 아버지를 도와 형 안드로니코스가 1376년에 장악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제위를 다시 찾았는데 이때 오스만 베이국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오스만에 조공을 바치고 군사 원조를 해야 했다.
1390년, 안드로니코스의 아들 요안니스 7세가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왕위를 빼앗았으나 오스만 술탄국은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을 도와 왕위를 되찾게 해주었다. 그 뒤 마누일은 술탄 바예지드 1세의 신하로 그의 궁전에서 살다가 1391년 2월, 아버지 요안니스 5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탈출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제위에 올랐다.
이후 술탄 바예지드 1세는 가신인 그를 몇 차례 소환했는데 응하지 않자, 1394년부터 1402년까지 8년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포위된 지 5년째가 되는 1399년에 마누일 2세는 난국을 타개하고자, 조카 요안니스 7세에게 도시를 맡기고, 십자군의 결성과 원조를 위해 서유럽으로 떠났다. 그는 베네치아, 파리, 런던[1]을 순차적으로 방문하고 1402년에 귀환하였다. 그의 방문은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사이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데는 큰 기여를 했으나, 원래 목적이었던 군사 원조 면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만 당시 마누일 2세를 실제로 만났던 유럽 각국의 인사들은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낡고 오래된 이름뿐인 제국'으로 알고 있던 나라의 지도자가 엄청난 학식과 인품의 소유자라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1402년, 오스만 술탄국은 티무르 제국의 아미르 티무르에게 참패하여 바예지드 1세는 포로로 잡히게 되었고 1403년, 바예지드 1세의 후계자 메흐메트 1세는 마누일 2세와 평화 조약을 맺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포위를 풀고 테살로니카(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를 돌려받았으며 심지어는 트라키아 동부 지역(현 불가리아)의 해안지대를 수복하였다. 또한 비록 명목상이지만 메흐메트 1세의 상국이 되었으며 오스만에게 바치던 조공도 중단시키는 성과를 얻어낸다. 그래서 마누일 2세 치세의 후반기에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메흐메트 1세가 죽은 1421년까지 동로마와 오스만 사이에는 평화가 유지되었고, 안정을 찾은 마누일은 종교와 문학에 심취하기 위해 국사(國事)에서 손을 떼었다.
1421년, 메흐메트 1세가 죽은 뒤 무라트 2세가 즉위하자, 마누일의 아들인 공동황제 요안니스 8세는 두 나라 사이에 지속되던 미미한 유대관계를 무시하고 무라트 2세에 대항해 술탄위 요구자 무스타파를 지지했다. 무라트 2세는 무스타파가 이끄는 반란을 진압한 뒤 쳐들어와서 1422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 공격했으며 1423년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유린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당하지 않았으나 마누일과 요안니스 8세는 굴욕적인 조약에 서명해야 했으며 그 뒤 마누일은 수도원으로 물러나 1425년에 사망했다.
마누일 2세는 8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그의 뒤를 이은 요안니스 8세 황제다.[2]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마누일의 5남이다. 한편 아들들과 나이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났다. 이 사람이 1350년생인데, 장남이라는 요안니스 8세는 1392년생으로 42년, 그리고 콘스탄티노스 11세와는 55년이나 된다.
1390년, 안드로니코스의 아들 요안니스 7세가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왕위를 빼앗았으나 오스만 술탄국은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을 도와 왕위를 되찾게 해주었다. 그 뒤 마누일은 술탄 바예지드 1세의 신하로 그의 궁전에서 살다가 1391년 2월, 아버지 요안니스 5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탈출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제위에 올랐다.
이후 술탄 바예지드 1세는 가신인 그를 몇 차례 소환했는데 응하지 않자, 1394년부터 1402년까지 8년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포위된 지 5년째가 되는 1399년에 마누일 2세는 난국을 타개하고자, 조카 요안니스 7세에게 도시를 맡기고, 십자군의 결성과 원조를 위해 서유럽으로 떠났다. 그는 베네치아, 파리, 런던[1]을 순차적으로 방문하고 1402년에 귀환하였다. 그의 방문은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사이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데는 큰 기여를 했으나, 원래 목적이었던 군사 원조 면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만 당시 마누일 2세를 실제로 만났던 유럽 각국의 인사들은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낡고 오래된 이름뿐인 제국'으로 알고 있던 나라의 지도자가 엄청난 학식과 인품의 소유자라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1402년, 오스만 술탄국은 티무르 제국의 아미르 티무르에게 참패하여 바예지드 1세는 포로로 잡히게 되었고 1403년, 바예지드 1세의 후계자 메흐메트 1세는 마누일 2세와 평화 조약을 맺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포위를 풀고 테살로니카(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를 돌려받았으며 심지어는 트라키아 동부 지역(현 불가리아)의 해안지대를 수복하였다. 또한 비록 명목상이지만 메흐메트 1세의 상국이 되었으며 오스만에게 바치던 조공도 중단시키는 성과를 얻어낸다. 그래서 마누일 2세 치세의 후반기에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메흐메트 1세가 죽은 1421년까지 동로마와 오스만 사이에는 평화가 유지되었고, 안정을 찾은 마누일은 종교와 문학에 심취하기 위해 국사(國事)에서 손을 떼었다.
1421년, 메흐메트 1세가 죽은 뒤 무라트 2세가 즉위하자, 마누일의 아들인 공동황제 요안니스 8세는 두 나라 사이에 지속되던 미미한 유대관계를 무시하고 무라트 2세에 대항해 술탄위 요구자 무스타파를 지지했다. 무라트 2세는 무스타파가 이끄는 반란을 진압한 뒤 쳐들어와서 1422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 공격했으며 1423년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유린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당하지 않았으나 마누일과 요안니스 8세는 굴욕적인 조약에 서명해야 했으며 그 뒤 마누일은 수도원으로 물러나 1425년에 사망했다.
마누일 2세는 8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그의 뒤를 이은 요안니스 8세 황제다.[2]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마누일의 5남이다. 한편 아들들과 나이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났다. 이 사람이 1350년생인데, 장남이라는 요안니스 8세는 1392년생으로 42년, 그리고 콘스탄티노스 11세와는 55년이나 된다.
마누일 2세에 대한 평가는 팔레올로고스 왕조 황제들 중에서도 매우 좋은 편이다. 비록 도시국가로 전락하여 오스만 술탄국에 의해 포위된 상태에서 그가 제국의 상황을 크게 반전시킬 계기는 거의 만들 수 없었으나, 황제의 헌신적이고도 신중한 외교 정책으로 결정적인 위기들을 넘길 수 있었다.
능력치 | 특기 | 병과적성 (보병, 궁병, 기병, 수군) |
정치 57 전투 54 지모 61 | 농업, 외교, 화공 | C C C C |
- Europa Universalis III에서 확장팩 Heir to the throne부터 가장 빠른 플레이 가능 연도가 1453년에서 1399년으로 앞당겨지며 동로마로 플레이할 수 있게 됐고, 마누일 집권기로도 할 수 있다. 1404년으로 시작하면 메흐메트 1세와 왕위를 두고 다툰 쉴레이만 왕자가 테살로니키와 그 주변 지역을 동로마에게 양도했기에 땅이 조금이나마 넓어진 상태에서 시작한다.
- 워렌 트레드골드: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비잔티움 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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