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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 - 나무위키

마누라

최근 수정 시각:
1. 아내의 다른 표현2. 옛 존칭
2.1. 유래2.2. 기록
2.2.1. 왕2.2.2. 왕비2.2.3. 대비2.2.4. 무품빈2.2.5. 동궁과 빈궁2.2.6. 사도세자
2.3. 중년이 넘은 여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
3. 경찰에서 사용하는 은어4. 축구에서의 마누라 라인

1. 아내의 다른 표현[편집]

부부 사이에서 남편아내를 허물없이 이르는 말로 쓰인다.

아내가 집안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어 남편이 눈치보고 살 때는 마눌님[1]/마나님이라 부르기도 한다(예문: 마눌님은 최강이야). 업그레이드 버전(?)으로는 마눌제(帝)가 있다

이 표현이 사용된 대표적인 관용어로는 '토끼 같은 자식들과 여우 같은 마누라'가 있다. 무한도전 무한상사 편에서 정형돈G-DRAGON을 상대로 꽁트하며 마누라를 "! 누라(누워라)!"로 재해석한 바 있다.

2. 옛 존칭[편집]

마노라() (마누라, 마노래)
"마노라 今呼抹樓下"
마노라는 오늘날 抹樓下라 부른다.

-이재난고 권21#이미지

원래 왕족의 성별을 불문하고 마마와 동급의 극존칭으로 쓰였다. 국왕에서 후궁에 이르기까지 여러 왕실 일원을 마노라, 말루하라고 칭하였으며, 성별과 무관히 쓰인 경칭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는 점차 의미의 변화가 일어나 이미 고종실록에서는 경칭이 아닌 의미로 쓰이는 등의 변화가 보이며, 현대에는 아내나 중년 여인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 되는 등 여러 차례 의미 변화를 거쳤다.

삼강행실도에는 '주인'의 의미로 등장하였으나, 1600년 계축일기에 ‘마노라’의 형태로 등장하여 종에 상대하여 상전을 의미하거나 중년 여인을 칭하는 말로서 등장하며,국립국어원 ‘모전분전말루하(毛廛粉廛抹樓下)’라 하여 여주인을 뜻하기도 했다.
以榮大夫人抹樓下(卽古所謂麻立干)
영대부인마노라께서 (즉 옛날에 이른바 마립간)

小朝召畵員卞尙璧 寫眞 訖 尙璧伏地達曰 臣曾隨鄭翬良 爲畵師裨將 在西關也 思悼麻立干[마노라 今呼抹樓下]西行至平壤 命臣寫眞 圖成 特賜許可曰 爾其歸藏于家 待余還乃納可也" 하시어...
수년 전 소조(사도세자)께서 화원 변상벽을 불러 초상을 그리라 이르자 상벽이 땅에 엎드려 아뢰었다. "신, 일찍이 정휘량을 따라 화사비장(관직명)이 되어 서관에 있을 적에 사도마립간[마노라, 말루하抹樓下라고 한다]께서 서쪽으로 행하시고 평양에 이르러 신에게 초상을 그리라 명하시어 그림을 완성했더니 특별히 허락을 내리시며 말씀하시기를 "너의 집에 숨겨두었다가 내가 돌아오거든 바치거라" 하시어...

-이재난고 권21#이미지
이재난고의 저자이자 조선 후기 학자 황윤석은 마노라를 쓴 뒤 '이는 옛말의 마립간이다'라는 주석을 덧붙이고, 사도세자를 이르면서 '사도 마립간' 이라 쓴 뒤 주석으로 마립간이 마노라를 뜻하는 표현임을 덧붙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학자 황윤석은 '마노라'를 옛말의 '마립간'과 같은 뜻으로 보았다.

마립간이 신라에서 유래된 순우리말 존칭인 마루한의 한자 음차인 것을 고려하면, 마노라 존칭은 순우리말 극존칭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마누라의 어원에 관해서는 설이 굉장히 많다. 우선 사대부들은 한국어와 합성된 한자어 표기 말루하(抹樓下)를 어원으로 보았다.[3] 조선왕조실록에도 적지만 이러한 형태로 나타나며, 한중록에도 등장한다.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경칭들은 폐하(陛下, 섬돌 폐+아래 하), 전하(殿下, 대궐 전+아래 하), 저하(邸下, 집 저+아래 하) 등 건축물 아래에서 예를 갖춘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마노라 역시 '마루 아래에서 예를 갖춘다'는 의미의 존칭이 된다. 이는 위에서 설명한 '마립간 설'과 같은 맥락으로, 마노라가 순우리말에서 비롯된 존칭임을 주장하는 설이다.

그 외에 원 간섭기 몽골에서 들어왔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대체로 폐기된 가설로 간주된다. 국립국어원의 입장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자료에서 볼 때 고유어인 것 같다고 한다.관련링크 몽골 기원설은 신빙성이 낮다고 한다. 따라서 원간섭기 몽골 유래설은 현재는 사실상 폐기된 가설이다.

극소수의 주장이지만 고구려 관직인 막리지에 지가 하로 바뀐게 기원이라는 설이 있다. 신라•가야에서 쓰이던 간지처럼 높은 관직에 쓰이는 지가 쓰였으며 마립간 유래설처럼 간이 하로 바뀐 것으로 본다. 다만 이 경우 간, 간지[4] 지, 하 등이 동의어라고 보고 하로 바꾸어 사용했다고 한다.

마누라의 옛 어형인 마노라 자체가 17세기의 기록(계축일기)에서 갑자기 나타난 후 이후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는 존칭이기 때문에, 어원과 관련된 학설이 역사학적으로나 국어학적으로나 굉장히 많을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에는 '대비 마노라', '대전 마노라'처럼 마마와 같이 쓰이던 극존칭어였다.[5] 그러나 현대에는 평범한 남편들이 아내를 부르는 표현의 하나가 되어 버렸는데, 이는 관직명칭인 영감, 양반 등이 속된 표현으로 되어버린 현상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6] 이는 지난 100년쯤 사이에 생긴 새 풍속으로 추정된다. 당상관(堂上官) 관리에게만 쓰이던 "영감"이 "마누라"의 상대어가 된 것도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고종실록의 기록에는 이전과 달리 마누라가 아내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등장한다. 실록에 ‘마누라’라고 기록된 것은 고종실록에서 2번 언급된 것뿐이다. 이전의 기록은 모두 ‘말루하’.
다음은 문헌상 왕실 경칭 '마노라(마누라, 말루하)'가 나타난 기록들이다. 마노라 경칭의 기록은 조선 중기 이후 등장한다.
보통 임금은 '상감 마노라', '대전 마노라'라고 부르며, 돌아가신 임금에 대해서는 묘호를 따와 'OO 마노라'라고 불렀다.
김씨가 말하기를, ‘듣건대 우리 말루하(抹樓下)께서 파빈(破殯) 하기 전까지 지탱할 수 있겠는가? 이는 사친(私親)인 까닭에 말미암는다.’라고 하였는데, 말루하는 곧 대전(大殿)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제가 듣고는 몹시 놀라서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경종실록 8권, 1722년 5월 20일#
현 주상(경종)을 '우리 말루하(마노라)'라고 부르고 있다.
臣曾爲光陵齋郞時, 有所謂奉先寺居僧, 言此是光陵抹樓下願堂。臣聞來極駭, 責其僧徒, 而佛法之肆行, 類多如此。
신이 일찍이 광릉 참봉(光陵參奉)으로 있을 때 봉선사(奉先寺)에 산다고 하는 이 이 절은 광릉마노라의 원당이라고 하기에, 신이 듣고 매우 놀라서 그 중을 꾸짖은 적이 있습니다. 불교가 멋대로 통행되는 것은 대부분 이런 따위들입니다.

- 승정원일기 695책 1729년 10월 3일#
광릉은 세조의 묘이다. 세조를 '광릉 마노라' 라고 부르고 있다. 돌아가신 임금 역시 마노라로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應淳曰, 民聞減膳之令, 相告以爲, 上監抹樓下水剌不御, 臣民何敢犯禁云。
윤순이 아뢰기를, 백성들이 감선(減膳)하라는 명을 듣고 서로 고하기를, "상감마노라께서 수라를 들지 못하시는데, 신민이 어찌 감히 금령을 범하겠나이까."라고 하였다.

백성들도 임금을 '상감 마노라'라고 불렀다.
중전은 보통 '중전 마노라', '중궁 마노라' 라고 불렀으며, 왕비의 성을 따와서 'O중전 마노라'라고 하기도 했다. 'O씨 마노라'라고 부른 기록도 있다.
而祈祝說話段, 蓋以前日含怨之故, 中殿抹樓下, 何日昇遐, 而何時復爲中宮乎?
기축하는 이야기로 이전에 원한을 품었으니, 중전 마노라께서 어느날 승하하시니 또 언제 중궁을 세우겠는가?

- 승정원일기 400책, 1701년 10월 1일#
숙종조 무고의 옥 당시 기록으로, 중전마노라는 1달 전 승하한 인현왕후를 이르는 말이다.
且成所願, 卽殺閔中殿是如, 祝願爲白乎旀, 在外太子房神堂段, 希載妾, 常在主張, 而上年十一月神祀時, 巫女, 着笠, 衣紅衣, 持弓矢, 起舞, 亂射四方曰, 吾當殺出閔氏抹樓下, 閔氏若死, 則豈不好哉?
또 소원은 민중전(인현왕후 민씨)을 죽이는 것으로 축원하는 바가 있어, 밖의 태자방신당에서 희재(장희빈의 오빠)의 첩이 늘 주장하였다. 지난해 11월 제사를 지낼 때 무녀갓을 쓰고 붉은 옷을 입고 활과 화살을 들고 일어나 춤을 추며 사방에 활을 난사하며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민씨 마노라를 죽일 것이다, 민씨가 죽으면 어찌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승정원일기 400책 1702년 10월 3일#
무고의 옥 당시 기록으로, 중전이었던 인현왕후 민씨를 '민중전(閔中殿)', '민씨 마노라'라고 부르고 있다.

이 외에도, 야승 신사 9월 27일 기록에는 무고의 옥 기록 중에 인현왕후를 '중궁 마노라(中宫抹樓下)'라 칭하기도 했고#, 소화귀감에서는 인현왕후를 '민중전 마노라(閔中殿抹樓下)' 로 칭했다.# 조야기문에서는 '우리 마노래', '듕귱 마노래'라는 한글 기록이 있다.
뎐 마누라
대궐(전, 殿) 마누라 앞에(전, 前))

- 1882년 흥성대원군이 명성황후에게 보낸 한글편지#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청진에 볼모로 잡혀가 유폐되었을 당시 명성황후에게 보낸 편지로, '뎐 마누라'는 중전을 뜻한다. 조선 말기에도 중전을 마노라(마누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7]
急探 尙儉曰 計非不密 奈金氏抹樓下 (卽大妃) 終無意思許肯何哉 一鏡乃去 地師旣托睡聞知 亟走尹家 因以轉報四大臣 四大臣始生意 以爲稟慈殿定策之地云

- 이재난고 권29 1779년 5월 7일#책이미지[8]
이재난고에서 상검이라는 사람이 정순왕후 김씨'김씨 마노라 (즉, 대비를 말한다)' 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9]

2.2.4. 무품빈[편집]

무품빈은 'O빈 마노라'로 불렸다.

사실 이 케이스는 특수하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정조원빈 홍씨의 무품빈 입궁을 이후로 몇몇 무품 빈들이 중전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 이들은 마노라 외에 '자가'라고 불리기도 했다.
2번째, 중전에 올랐던 장희빈이 강등당해 부대빈, 대빈궁 등으로 불릴 시기에 중전에 준하여 마노라로 불렸다.
韓尚宫張希載妾大水賜䓁同為祈祝曰殺今中殿禧嬪抹樓下復為中殿...
한상궁, 장희재의 첩이 축원하며 말하기를, 지금 중전을 죽이고 희빈 마노라께서 다시 중전이 되셔야...

- 야승 신사년 9월 27일#
장희빈을 '희빈 마노라'로 칭하고 있다.
흰 머리의 늙은 궁인이 또 장 대장의 첩과 같이 와서 무녀의 집에 앉아 무녀와 더불어 같이 축원하기를, ‘우리 말루하주(抹樓下主-우리 마노라 주인님)는 태평하시고 태평하시며, 중전(인현왕후) 말루하주는 마땅히 승하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앞에 나온 '우리 말루하주'는 장희빈을 칭하는 말이다. 빈으로 강등되었어도 이전에 중전이었기에, 정1품 빈이 '자가' 경칭을 받는 것과 달리 중전급으로 예우하여 '마누라' 호칭을 바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마누라 주인님'이 줄어든 호칭이 '마님'이다.[10]
정미년 정월 초하루 빈 마누라 의대 발기이미지
디지털장서각에 1787 정미년이라 제목이 붙어있으나, 1907년 '정미정조 영친왕의복발기'와 종이, 글씨체, 문서상태 등 모든 게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1907 정미년 문서로 추정된다. 클릭하여 비교해보자 여기서 말하는 '빈 마누라'는 그해 여름 사망한 무품빈 경빈 김씨로 추정된다.[11]

반면 무품빈을 '자가(自家)'라 부른 사례도 있다.
션왕의 션효(聖孝)를 생각하고 (가순궁)자가(自家) 졍승<셩>을 다하미니 한심(寒心)하며 감격하미 엇디 다 측냥(測量)하리오.

- 원본 한중록 제1편 읍혈록 中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서 가순궁 수빈 박씨를 자가(自家)라 부르고 있다. 수빈 박씨는 무품으로 입궁한 빈이다. 무품빈에 대한 경칭은 '자가'와 '마노라' 모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12]

2.2.5. 동궁과 빈궁[편집]

동궁은 마노라 경칭 사용시 '동궁 마노라', '세자 마노라'라고 불렸으며, 왕세제를 '세제 마노라'라고 부른 기록도 있다

빈궁 역시 '빈궁 마노라', '세자빈 마노라' 등으로 불렸다.​
予在東宮時, 素不信陳根, 且甚厭服藥, 故雖劑藥以入, 而未嘗進服, 遂爲棄置者, 多矣。李判府事, 爲提調時, 常曰, 諸醫以爲, 藥雖劑入, 世弟秣樓下, 必不進服, 實爲無用云。
내가 동궁에 있을 때에 평소 진근(陳根)을 믿지 않고 또 심하게 약을 먹기 싫어하였기 때문에, 약을 지어 들여도 든 적이 없어 결국 버린 경우가 많았다. 이판부사(李判府事)가 제조로 있을 때에 항상 말하기를, "모든 의관이 약을 지어 들이더라도 세제 마노라께서 반드시 먹지 않는다면 실로 쓸모가 없다."고 하였다.

- ​1732년 승정원일기#
영조가 자신이 왕세제이던 시절 이야기를 하는 장면으로, 왕세제를 '세제 마노라'라고 하였다.
抹樓下之言果然。而吾兒則以此不安云矣。
말루하의 말씀이 과연 옳습니다만, 우리 아이는 이 때문에 불안하다고 합니다.
抹樓下與宮官。有何怪怪說話云。此何說也。
말루하께서 궁관과 무슨 괴괴한 이야기를 하였다고 하는데, 이 무슨 말입니까?

- 존현각일기#
세손 정조를 마노라(말루하)라고 부르고 있다.
동궁마누라관례시내인상격발기#
여기서 동궁마누라는 당시 세자인 순종이다.
빈궁마누라의대발긔#
여기서 빈궁마누라는 당시 세자빈 순명효황후이다.

그 외에도 조선 말기 ~ 대한제국 초기 다양한 동궁마누라, 빈궁마누라 기록들이 있다.

2.2.6. 사도세자[편집]

이재난고에 사도세자를 다소 특이한 표기의 마노라로 부른 기록이 있다.
李生又言 數年前 小朝召畵員卞尙璧 寫眞 訖 尙璧伏地達曰 臣曾隨鄭翬良 爲畵師裨將 在西關也 思悼麻立干[마노라 今呼抹樓下]西行至平壤 命臣寫眞 圖成 特賜許可曰 爾其歸藏于家 待余還乃納可也...
이생이 다시 말하기를, 수년 전 소조(사도세자)께서 화원 변상벽을 불러 초상을 그리라 이르자 상벽이 땅에 엎드려 아뢰었다. "신, 일찍이 정휘량을 따라 화사비장(관직명)이 되어 서관에 있을 적에 사도마립간[마노라, 말루하抹樓下라고 한다]께서 서쪽으로 행하시고 평양에 이르러 신에게 초상을 그리라 명하시어 그림을 완성했더니 특별히 허락을 내리시며 말씀하시기를 "너의 집에 숨겨두었다가 내가 돌아오거든 바치거라"...

-이재난고#
사도세자를 이르면서 '사도마립간' 이라 쓴 뒤 주석으로 마노라를 뜻하는 표현임을 덧붙였다. '사도마노라/말루하' 라고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이재난고에 마노라가 마립간을 뜻하는 말이었음을 알려주는 황윤석의 주석과
榮大夫人抹樓下[卽古所謂麻立干]
영대부인 마노라[즉 옛말에 이른바 마립간]
보통 마노라가 들어갈 자리에 마립간을 쓴 기록을 보아
四月矣 注書又問曰 汝宅大夫人麻立干年歲幾何 氣力何如...
사월 주서가 다시 묻기를, '너희 집 대부인 마립간의 연세가 어찌 되시며 기력은 어떠하시냐'...
최소한 황윤석은 마립간과 마노라를 동급 표현으로 여기고 쓴 듯하다.

2.3. 중년이 넘은 여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편집]

현대엔 상대적으로 거의 쓰이지 않는 표현이다.

예문: 저 마누라가 지금 누구한테 반말을 하는 거야!
【<<마노라(上典)≪계축일기(1600?)≫】

3. 경찰에서 사용하는 은어[편집]

강력계의 형사들이 쓰는 용어로, 사수부사수의 관계를 뜻한다. 이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한국 영화 투캅스와일드카드(영화)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마누라(축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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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서의 마눌은 마누라의 준말로, 고양잇과 동물인 마눌과는 관계가 없다.[2]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지만, 중앙 아래쪽에 잘 찾아보면 보인다.[3] 말루(抹樓)는 마루를 뜻한다. 우리말을 한자로 음차한 것.[4] 이 설에서는 간과 지의 합성어로 취급하여 간과 동의어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5] 조선시대 후기에는 왕세자빈에게만 붙는 호칭으로 변하였다거나 중기 이후 "마마"보다 한 급 아래의 칭호로 쓰였다는 설도 돌아다니지만 이는 당시 김용숙 선생이 '빈궁'에 대하여 '마노라' 라는 표현을 쓴 자료 하나를 보고 내린 결론으로 현재는 많은 반박이 있다.[6] 비슷한 예시로는, 젊은 여성을 지칭하는 가시나라는 말도 사실은 속어가 아니라 엄연한 표준어다. 하지만, 가시나라는 말도 지금은 왠지 모르게 대놓고 쓰지 못하는 속어가 되어버린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7] 기존에는 흥선대원군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2년 이종덕 한국학중앙연구원 어문생활사연구소 전임연구원이 편지를 다시 해석하면서 기존의 해석을 뒤집었다. 편지의 마누라를 명성황후로 해석하면, 기존에 부인으로 간주했을 때 해석되지 않거나 문맥이 어긋나는 부분이 잘 해결된다. 윤백영 여사의 글에서도 중전을 '뎐 마누라'로 칭한 바 있다.[8] 오른쪽 페이지 중간에 하단에서 상단으로 이어지는 부분[9] 여기서 () 사이 글은 저자 황윤석이 주석을 단 것이다.[10] 마마, 마노라와 마찬가지로 민간에서 널리 쓰였다.[11] 디시털장서각엔 은근히 오탈자나 오기재된 자료명들이 많다.[12] 자가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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