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정치인, 테크노크라트.
1921년 9월 5일에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태어났다. 1929년 흥남 내호동진학원에 진학, 1935년에 졸업하여 외국으로 유학가서 상업학교에 진학했으나 1938년에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신문배달, 크레인 운전 등 막노동을 하다가 한차례 투옥된 적도 있다고 한다.
해방 이후 고등교육을 받고 건설부문 일군이 되었다. 1961년 6월, 중공업위원회 시멘트 공업건설국장을 지냈으며, 1962년 3월, 농촌건설성 건설관리국장으로 일했다. 1967년 11월, 건재공업성 부상에 임명, 1970년 9월 2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리민수의 뒤를 이어 건재공업상에 임명되었다. 정부대표단장으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건재박람회에도 다녀왔다. 70년대 한국 자료에 따르면 1971년에 해임되었다고 하는데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등 숙청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정무원 건재공업부장 자리는 1972년 12월에는 문병일이 차지하였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검사위원 및 건설건재공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던 중 1988년 4월 25일 11시 35분에 6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와 정무원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다년간 경제부문에서 사업하면서 나라의 건재공업기지를 강화하며 당의 건설정책을 관철하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쳤다. 리용순동지는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해방 이후 고등교육을 받고 건설부문 일군이 되었다. 1961년 6월, 중공업위원회 시멘트 공업건설국장을 지냈으며, 1962년 3월, 농촌건설성 건설관리국장으로 일했다. 1967년 11월, 건재공업성 부상에 임명, 1970년 9월 2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리민수의 뒤를 이어 건재공업상에 임명되었다. 정부대표단장으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건재박람회에도 다녀왔다. 70년대 한국 자료에 따르면 1971년에 해임되었다고 하는데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등 숙청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정무원 건재공업부장 자리는 1972년 12월에는 문병일이 차지하였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검사위원 및 건설건재공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던 중 1988년 4월 25일 11시 35분에 6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와 정무원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다년간 경제부문에서 사업하면서 나라의 건재공업기지를 강화하며 당의 건설정책을 관철하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쳤다. 리용순동지는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 조선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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