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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에 따르면 원래 이름은 해(海)이고 차달이라는 이름은 공을 세워 고려 태조에게서 하사받은 것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의 왕건(王建)이 남방을 정벌할 때 수레와 말을 많이 내어 군량을 원활하게 보급함으로써 그 공으로 대승(大丞)[2]에 제수되었고 아울러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호를 받았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류씨와 관련해 차씨(車氏)와 류씨는 사실 동족이라는 설이 있다. 차씨의 먼 선조가 중국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한 무일(無一)인데, 그 후손 차색(車嗇)이 신라 말에 헌덕왕의 왕위 찬탈에 반대해 헌덕왕을 죽이려다 발각되자 달아나 류씨(柳氏)로 성을 바꾸고 숨어 살았고, 그의 5세 손이 류차달로 고려 태조를 도와 공신이 된 뒤에 왕건의 허락을 얻어 류차달의 맏이인 효전(孝全)이 다시 차씨 성을 쓰기 시작하면서 연안(延安) 차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 다만 이 경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류차달에게는 아들이 효금뿐이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는 것과 상충된다. 그러나 이런 전승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 한동안 문화 류씨는 연안 차씨의 분파라는 주장(이하 류·차 문제)이 널리 퍼져 있었으나(연안 차씨 측 주장) 2008년에 문화 류씨 대동보(전체 족보)인 '문화류씨세보'가 발간되어 류씨와 차씨는 전혀 상관없음을 대내외에 천명하였다.[3] 이 문제는 3산이나 고흥 등 다른 본관의 류씨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류·차 논란 문서 참조.
류차달의 아들 효금(孝金)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날 효금이 구월산에 유람하는데 길에서 큰 범이 나타나서 그의 앞을 막으며 입을 벌리고 눈물을 흘렸다. 효금이 보니 범의 입 안에 흰 물건이 가로로 걸려 있었고, 효금이 “네가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내가 빼 주겠다.” 하자 범이 머리를 끄덕이며 허락하는 시늉을 했고, 꺼내고 보니 은비녀였다. 그날 밤에 범이 효금에게 와서 이르기를, “나는 산의 정령(精靈)이다. 어제 성당리(聖堂里)에 가서 어떤 여인을 잡아 먹다가 뭐가 목에 걸려서 매우 괴로웠는데 공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었으니, 공의 자손이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 하였다. 효금 이후 문화 류씨는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크게 번창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학봉 김성일이 경상도 지역의 선비와 백성들에게 왜적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고 조정을 도와 싸우라고 초유하는 격문을 지으면서 "부자들은 류차달처럼 곡식을 날라 군량을 대고, 용사들은 원충갑(元冲甲)[4]처럼 용기를 내어 적을 무찌르라."고 해서 류차달을 조정을 위해 군수물자를 공급한 인물의 사례로써 언급하고 있다.
공주시 계룡산의 동학사 앞의 박제상을 모신 동계사(東鷄寺)를 936년 류차달이 지었다고 한다. 1956년에 동계사를 증축하고 2년 뒤인 1960년에 류차달을 함께 사당에 제사하게 되었는데, 2005년에 박제상의 후손을 자처하는 영해 박씨 문중에서 "류차달을 동계사에 합사하게 된 것은 처음에 문화 류씨의 요청대로 한 것으로, 동계사 증축에 문화 류씨가 비용을 지원하는 대신 류차달의 위패를 류차달의 사당을 별도로 마련할 때까지의 임시적인 것이었기에 허락한 것이었다"며 문화 류씨들이 원래의 약속을 깨고 동계사에 아주 눌러앉으려고 한다고 정동채 당시 문화부장관에게 탄원까지 했고, 문화 류씨측은 1956년에 중건하기 전에는 동계사 자리에 제대로 된 건물 흔적도 없었으며, 건물을 증축하고 2년 뒤인 1960년에 동계사 사당을 관리하는 숙모회에서 먼저 문화 류씨에 요청을 해서 동계사를 증축, 관리하는데 비용을 대 주면 동계사에 류차달의 위패도 함께 합사해 주기로 했었다고 주장하며 류차달의 위패를 그대로 모시겠다고 해서 충돌이 있었다. 문화재청은 충청남도로 문제를 떠넘겨버렸고 충청남도는 양 문중에 공신의 자손이고 충신의 자손인데 서로 지혜롭게 해결하시라는 원론적인 답변밖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의 일은 불명.
류차달의 묘가 2011년 북한에서 발굴되었다.
한국에서는 류씨와 관련해 차씨(車氏)와 류씨는 사실 동족이라는 설이 있다. 차씨의 먼 선조가 중국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한 무일(無一)인데, 그 후손 차색(車嗇)이 신라 말에 헌덕왕의 왕위 찬탈에 반대해 헌덕왕을 죽이려다 발각되자 달아나 류씨(柳氏)로 성을 바꾸고 숨어 살았고, 그의 5세 손이 류차달로 고려 태조를 도와 공신이 된 뒤에 왕건의 허락을 얻어 류차달의 맏이인 효전(孝全)이 다시 차씨 성을 쓰기 시작하면서 연안(延安) 차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 다만 이 경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류차달에게는 아들이 효금뿐이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는 것과 상충된다. 그러나 이런 전승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 한동안 문화 류씨는 연안 차씨의 분파라는 주장(이하 류·차 문제)이 널리 퍼져 있었으나(연안 차씨 측 주장) 2008년에 문화 류씨 대동보(전체 족보)인 '문화류씨세보'가 발간되어 류씨와 차씨는 전혀 상관없음을 대내외에 천명하였다.[3] 이 문제는 3산이나 고흥 등 다른 본관의 류씨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류·차 논란 문서 참조.
류차달의 아들 효금(孝金)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날 효금이 구월산에 유람하는데 길에서 큰 범이 나타나서 그의 앞을 막으며 입을 벌리고 눈물을 흘렸다. 효금이 보니 범의 입 안에 흰 물건이 가로로 걸려 있었고, 효금이 “네가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내가 빼 주겠다.” 하자 범이 머리를 끄덕이며 허락하는 시늉을 했고, 꺼내고 보니 은비녀였다. 그날 밤에 범이 효금에게 와서 이르기를, “나는 산의 정령(精靈)이다. 어제 성당리(聖堂里)에 가서 어떤 여인을 잡아 먹다가 뭐가 목에 걸려서 매우 괴로웠는데 공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었으니, 공의 자손이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 하였다. 효금 이후 문화 류씨는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크게 번창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학봉 김성일이 경상도 지역의 선비와 백성들에게 왜적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고 조정을 도와 싸우라고 초유하는 격문을 지으면서 "부자들은 류차달처럼 곡식을 날라 군량을 대고, 용사들은 원충갑(元冲甲)[4]처럼 용기를 내어 적을 무찌르라."고 해서 류차달을 조정을 위해 군수물자를 공급한 인물의 사례로써 언급하고 있다.
공주시 계룡산의 동학사 앞의 박제상을 모신 동계사(東鷄寺)를 936년 류차달이 지었다고 한다. 1956년에 동계사를 증축하고 2년 뒤인 1960년에 류차달을 함께 사당에 제사하게 되었는데, 2005년에 박제상의 후손을 자처하는 영해 박씨 문중에서 "류차달을 동계사에 합사하게 된 것은 처음에 문화 류씨의 요청대로 한 것으로, 동계사 증축에 문화 류씨가 비용을 지원하는 대신 류차달의 위패를 류차달의 사당을 별도로 마련할 때까지의 임시적인 것이었기에 허락한 것이었다"며 문화 류씨들이 원래의 약속을 깨고 동계사에 아주 눌러앉으려고 한다고 정동채 당시 문화부장관에게 탄원까지 했고, 문화 류씨측은 1956년에 중건하기 전에는 동계사 자리에 제대로 된 건물 흔적도 없었으며, 건물을 증축하고 2년 뒤인 1960년에 동계사 사당을 관리하는 숙모회에서 먼저 문화 류씨에 요청을 해서 동계사를 증축, 관리하는데 비용을 대 주면 동계사에 류차달의 위패도 함께 합사해 주기로 했었다고 주장하며 류차달의 위패를 그대로 모시겠다고 해서 충돌이 있었다. 문화재청은 충청남도로 문제를 떠넘겨버렸고 충청남도는 양 문중에 공신의 자손이고 충신의 자손인데 서로 지혜롭게 해결하시라는 원론적인 답변밖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의 일은 불명.
류차달의 묘가 2011년 북한에서 발굴되었다.
[1] 문화현. 지금의 북한 황해남도 삼천군, 신천군 서부와 안악군 남부 일대에 해당한다.[2] 태봉(후고구려) - 고려 초기 관료의 16등급 가운데 5등.[3] 2008 문화류씨세보(世譜): 류씨와 차씨는 관계없음을 천명함 http://www.moonhwaryu.kr/home/menu2/sub2_6.html[4] 충렬왕(忠烈王) 때의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충렬왕 17년(1291년)에 카이단(哈丹)이 쳐들어와 원주를 공격했을 때 원주(原州) 별초(別抄) 소속이었으며, 전후로 10차례에 걸쳐서 카이단의 군세를 격파하고 성을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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