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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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민주 공화국[1]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German Democratic Republic | |||
국기 (1949-1959) | 국장 (1950-1955) [2] | ||
국기 (1959-1990) | 국장 (1955-1990) | ||
상징 | |||
국가 | |||
성립 이전 | 재통일 이후 | ||
역사 | |||
지리 | |||
위치 | 중앙 유럽 | ||
면적 | 108,333km2[6] | ||
인문 환경 | |||
인구 | 1950년 18,400,000명 1990년 16,100,000명 | ||
정치 | |||
정치 체제 | |||
국가원수 | 대통령 → 국가평의회 의장 → 인민의회 의장 | ||
정부수반 | 각료평의회 의장 → 총리 | ||
주요 지도자 | |||
경제 | |||
통화 | |||
1인당 GNP | |||
외교 | |||
남북 수교 |
위치[10] |
동독(東獨)은 소련이 점령한 동부 지역 독일 영토 중 오데르-나이세 선 서부 지역에 수립된 사회주의 공화국이자 소련의 위성국으로, 정식 국명은 독일민주공화국이다. 1949년 10월 7일에 선거를 통해 공식적으로 수립되었고 1990년 10월 3일 자정을 기해 서독으로 흡수 합병될 때까지 존속했다. 수도는 동베를린이었다.
면적은 108,333km²로 남한보다 약간 넓고 북한보다는 약간 좁았다. 인구는 통일 당시인 1990년에 16,100,000명으로 서독의 인구가 63,300,000명으로 4배 정도 많았다. 북한의 인구에 비해 남한의 인구가 2배 정도인 것에 대비된다. 수립 당시인 1949년 이래 인구가 계속 줄어갔는데, 이유는 300만[11]에 달하는 인구가 서독으로 꾸준히 빠져나간 데다 출산율이 상당히 저조했기 때문이다. 동독에서의 인구조사는 4번이 있었으나, 그 중 대외로 발표된 경우는 1964년의 인구조사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추정치이다. 통일 후에는 더 심해서 동독의 출산율이 통일 전의 절반으로 떨어져서 1994년에는 합계 출산율 0.77명, 인구의 0.51% 출생이라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통일 초 혼란이 주 원인이라 사회가 안정되고 나서는 출산율이 서독보다 높아졌다.
면적은 108,333km²로 남한보다 약간 넓고 북한보다는 약간 좁았다. 인구는 통일 당시인 1990년에 16,100,000명으로 서독의 인구가 63,300,000명으로 4배 정도 많았다. 북한의 인구에 비해 남한의 인구가 2배 정도인 것에 대비된다. 수립 당시인 1949년 이래 인구가 계속 줄어갔는데, 이유는 300만[11]에 달하는 인구가 서독으로 꾸준히 빠져나간 데다 출산율이 상당히 저조했기 때문이다. 동독에서의 인구조사는 4번이 있었으나, 그 중 대외로 발표된 경우는 1964년의 인구조사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추정치이다. 통일 후에는 더 심해서 동독의 출산율이 통일 전의 절반으로 떨어져서 1994년에는 합계 출산율 0.77명, 인구의 0.51% 출생이라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통일 초 혼란이 주 원인이라 사회가 안정되고 나서는 출산율이 서독보다 높아졌다.
언어별 명칭 | ||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DDR) / Ostdeutschland | ||
Германская 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 Восто́чная Герма́ния | ||
German Democratic Republic (GDR) / East Germany | ||
República Democrática Alemana(RDA) / Alemania Oriental | ||
République démocratique allemande / Allemagne de l'Est | ||
ドイツ民主共和国 / 東ドイツ | ||
德意志民主共和國 / 民主德國 / 東德 | ||
서독(통일 이전의 독일연방공화국)에서는 동독을 중앙 독일(Mitteldeutschland)이라 불렀다. 동부 독일에 해당하는 Ostdeutschland는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폴란드 인민 공화국과 소련이 나눠 차지한 프로이센 자유주를 의미했다. 동독이 국가가 아니란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자칭 "DDR"(sogenannte "DDR")'과 '소련 점령 지역(Sowjetische Besatzungszone, SBZ)'[13] 등도 쓰였다.[14] 명목상으론 그러하였으나 실제 서독의 각종 문서에선 독일 민주 공화국(DDR)이란 말도 많이 보였다.
반면 동독인들은 자국을 일컬을 때 독일 민주 공화국(DDR)이라고 했고 그냥 독일(Deutschland)이라고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15] 정권 수립 직후에는 서독을 '미수복지구'이자 '통일해야 할 존재'로 보았으나[16], 체제 경쟁 상의 열세로 수백만 명의 자국민이 서독으로 탈주하면서 이러다가는 정권이 붕괴되리라는 위기감에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을 계기로 현상유지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고 1970년대부터는 자신들이 '자본주의 민족국가' 서독과는 별개의 '사회주의 민족국가'임을 강조하면서 정책적으로 '독일'이라는 이름을 몰아냈을 정도였다.[17] 그래서 동독이 서독을 부를 땐 그대로 독일연방공화국(BRD)으로 불렀으며, 양독 관련 업무를 서독은 대한민국의 통일부와 비슷한 '내독부(Bundesministerium für innerdeutsche Beziehungen; BMB)'라는 정부부서에서 처리한 반면 동독은 여느 외국과 다를 바 없이 외무부에서 처리했다. 그리고 자국의 수도인 동베를린은 그냥 '베를린(Berlin)'이라고 했고 서베를린은 '서베를린(Westberlin)'이라고 따로 불렀다.
동독 국장(1950년 - 1953년) | 동독 국장(1953년 - 1955년) | 동독 국장(1955년 - 1990년) |
국장은 망치, 호밀, 컴퍼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망치는 노동자를, 컴퍼스는 지식인을, 호밀 고리는 농민을 의미한다.
1950년 제정 당시에는 컴퍼스 없이 망치만 있는 단순한 형상이었으며 비공식 국장이라며 동독 정부에서 못박았다. 그럼에도 동독 외교문건이나 여권 등에 이 국장을 현시하였다.
1953년에 단순했던 국장을 구체화했다. 기존의 망치와 호밀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컴퍼스를 추가하였다.
현재까지도 알려져 있는 공식 국장은 1955년에 개정되었다. 국장 가운데를 붉은색으로 칠하고 망치 모서리를 검게 칠하였으며 컴퍼스를 좌우반전한 형태이다.
1950년 제정 당시에는 컴퍼스 없이 망치만 있는 단순한 형상이었으며 비공식 국장이라며 동독 정부에서 못박았다. 그럼에도 동독 외교문건이나 여권 등에 이 국장을 현시하였다.
1953년에 단순했던 국장을 구체화했다. 기존의 망치와 호밀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컴퍼스를 추가하였다.
현재까지도 알려져 있는 공식 국장은 1955년에 개정되었다. 국장 가운데를 붉은색으로 칠하고 망치 모서리를 검게 칠하였으며 컴퍼스를 좌우반전한 형태이다.
1949년에 제안된 동독 국장 | 1949년에 제안된 소련식 동독 국장 |
나치 독일의 패망 후 얄타 회담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처리를 의논할 때 독일 지역의 분할 점령이 합의된 게 비극의 시작이다. 이미 2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인만큼 연합국은 이번 기회에 독일을 단단히 손봐줄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독일을 지리적인 요건을 고려하여 정해진 경계선에 따라 미군, 영국군, 소련군이 3분할했는데, 이 와중에 얄타 회담에서 배제된 자유 프랑스가 자기 몫을 고집해서 미국과 영국 점령지의 일부를 떼어서 프랑스군에 넘겼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은 점령 직후부터 각자 자신들과 가까운 정치 세력을 지방행정에 투입하면서 전혀 다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은 처음부터 비나치화와 더불어 독일을 다시 서방의 일원으로 편입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에 협력하지 않던 세력을 기용해서 지방행정 실무를 맡기며 나치 물을 뺀 새로운 독일을 만들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게 전후 서독 총리로서 라인강의 기적을 이끄는 콘라드 아데나워. 대표적인 가톨릭계 보수정당인 가톨릭 중앙당의 정치인이었으나 나치 집권 이후 시골에 은거하다가 미군 점령 후 쾰른 시장으로 전격 발탁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몇몇 나치 관계자들과 독일 국방군 출신 군인들도 은근슬쩍 공직에 진출한다.[20] 소련도 처음에는 철저한 나치 청산을 외쳤으나 실제 통치를 하면서 나치나 독일 국방군 출신들 중에 그나마 쓸만하고 전쟁범죄와 무관한 사람들을 하나둘 받아들였고[21] 이외에 자신의 점령지에서 전통적 경쟁 관계이던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을 강제로 합병시켜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를 만들어서 얼굴마담으로 세우고 스탈린식 체제를 도입했다. 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이 바로 동독의 집권당이다.
그러나 이후 냉전으로 인해 이념 대립이 심해지자 과거 연합군들은 미군+영국군+프랑스군 대 소련군의 도식으로 사실상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미국은 독일 전체 총선거를 주장했지만 소련이 동독 지역을 내줄 의지가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결국 자유주의 국가라는 유대관계가 있던 3국의 점령지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했고 새로 수립된 독일 정부에 3국의 점령지의 주권을 이양했으니 이것이 서독이다. 이는 공산 국가와의 최전선에 놓인 서독의 특성상 하나로 뭉쳐놓는 게 그나마 공산국가의 영향력의 침투를 막는 방패 역할을 맡기 더 유리했기 때문. 이에 소련은 반발하여 동독의 영토 안에 남아있던 서독 측 베를린에 무력 시위를 벌이는 베를린 봉쇄를 펼치는 등 양측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베를린은 비록 지리상으로는 동독의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오랜 기간 독일의 수도였다는 상징성 때문에 얄타 회담의 협정문에 의거해 미영불 3국도 베를린에 진주했고 결국 베를린도 미영불소 4개국의 분할통치를 겪었다. 이 결과 동독 땅 한가운데에 서독의 영토인 서베를린이 생기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이러한 군사적인 대립은 그래도 양측이 2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으며 전쟁에는 학을 뗀 탓에 실제로 무력 충돌로 이어지지 않고 그럭저럭 평화롭게 잘 마무리되었으나, 같은 시기 급격한 스탈린식 체제 도입에 반발한 동독 지역 주민들이 계속 서독/서베를린으로 이주하거나 망명하면서 다른 면으로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1961년에 서기장이었던 발터 울브리히트의 지시로 동서독 국경에는 철책선 강화가, 서베를린 주위에는 베를린 장벽의 축조가 시작되었다. 국경선에는 도망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국경수비대를 증강하고 지뢰를 촘촘하게 매설했고, 장벽에도 전기 철책과 군견, 감시탑 등 온갖 보안 병력과 장비를 배치했다.
독일은 통일 국가였던 역사보다 신성 로마 제국 시기부터 수많은 작은 나라들로 쪼개져 있던 역사가 더 길었기 때문에, 동서독 분단기는 통일기보다 좋지는 않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1950년대 초반까지는 동독 지역의 산업기반 시설을 소련에 의해 빼앗기는 일이 많았고, 생산품의 수입들마저 전쟁 배상금이라는 명목으로 상당히 많이 소련의 몫으로 돌아가 경제가 악화되어 서독, 특히 서베를린으로 탈주하는 경우가 잦았다.[22]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은 점령 직후부터 각자 자신들과 가까운 정치 세력을 지방행정에 투입하면서 전혀 다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은 처음부터 비나치화와 더불어 독일을 다시 서방의 일원으로 편입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에 협력하지 않던 세력을 기용해서 지방행정 실무를 맡기며 나치 물을 뺀 새로운 독일을 만들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게 전후 서독 총리로서 라인강의 기적을 이끄는 콘라드 아데나워. 대표적인 가톨릭계 보수정당인 가톨릭 중앙당의 정치인이었으나 나치 집권 이후 시골에 은거하다가 미군 점령 후 쾰른 시장으로 전격 발탁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몇몇 나치 관계자들과 독일 국방군 출신 군인들도 은근슬쩍 공직에 진출한다.[20] 소련도 처음에는 철저한 나치 청산을 외쳤으나 실제 통치를 하면서 나치나 독일 국방군 출신들 중에 그나마 쓸만하고 전쟁범죄와 무관한 사람들을 하나둘 받아들였고[21] 이외에 자신의 점령지에서 전통적 경쟁 관계이던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을 강제로 합병시켜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를 만들어서 얼굴마담으로 세우고 스탈린식 체제를 도입했다. 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이 바로 동독의 집권당이다.
그러나 이후 냉전으로 인해 이념 대립이 심해지자 과거 연합군들은 미군+영국군+프랑스군 대 소련군의 도식으로 사실상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미국은 독일 전체 총선거를 주장했지만 소련이 동독 지역을 내줄 의지가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결국 자유주의 국가라는 유대관계가 있던 3국의 점령지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했고 새로 수립된 독일 정부에 3국의 점령지의 주권을 이양했으니 이것이 서독이다. 이는 공산 국가와의 최전선에 놓인 서독의 특성상 하나로 뭉쳐놓는 게 그나마 공산국가의 영향력의 침투를 막는 방패 역할을 맡기 더 유리했기 때문. 이에 소련은 반발하여 동독의 영토 안에 남아있던 서독 측 베를린에 무력 시위를 벌이는 베를린 봉쇄를 펼치는 등 양측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베를린은 비록 지리상으로는 동독의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오랜 기간 독일의 수도였다는 상징성 때문에 얄타 회담의 협정문에 의거해 미영불 3국도 베를린에 진주했고 결국 베를린도 미영불소 4개국의 분할통치를 겪었다. 이 결과 동독 땅 한가운데에 서독의 영토인 서베를린이 생기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이러한 군사적인 대립은 그래도 양측이 2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으며 전쟁에는 학을 뗀 탓에 실제로 무력 충돌로 이어지지 않고 그럭저럭 평화롭게 잘 마무리되었으나, 같은 시기 급격한 스탈린식 체제 도입에 반발한 동독 지역 주민들이 계속 서독/서베를린으로 이주하거나 망명하면서 다른 면으로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1961년에 서기장이었던 발터 울브리히트의 지시로 동서독 국경에는 철책선 강화가, 서베를린 주위에는 베를린 장벽의 축조가 시작되었다. 국경선에는 도망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국경수비대를 증강하고 지뢰를 촘촘하게 매설했고, 장벽에도 전기 철책과 군견, 감시탑 등 온갖 보안 병력과 장비를 배치했다.
독일은 통일 국가였던 역사보다 신성 로마 제국 시기부터 수많은 작은 나라들로 쪼개져 있던 역사가 더 길었기 때문에, 동서독 분단기는 통일기보다 좋지는 않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1950년대 초반까지는 동독 지역의 산업기반 시설을 소련에 의해 빼앗기는 일이 많았고, 생산품의 수입들마저 전쟁 배상금이라는 명목으로 상당히 많이 소련의 몫으로 돌아가 경제가 악화되어 서독, 특히 서베를린으로 탈주하는 경우가 잦았다.[22]
1989년 11월 9일, 동유럽 혁명의 여파에 따른 베를린 장벽 해체에 이어서 첫 자유선거가 1990년 3월 18일에 치러지고 여당인 민주사회당[23]은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상실하여 동독 기독교민주연합에 정권을 넘겨주었다.[24] 당해 8월 23일 동독 의회는 정권 수립 초기에 폐지했던 5개 주를 부활시키기로 결정하였고, 8월 31일 베를린에서 통일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9월 12일에는 4+2 조약을 통해 연합국 4개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통일을 승인받고 국제법상으로 연합국의 점령지였던 베를린의 주권을 반환받았다. 이에 1990년 10월 3일 자정을 기해 동독 정권은 해체되며 동독을 구성하던 5개 주가 자동적으로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통일을 하였다.[25]
구 동독 지역은 현재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브란덴부르크, 작센, 작센안할트, 튀링겐인데, 통일 3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구 서독 지역의 경제 수준을 쫒아오지 못하고 머물러 있어 큰 골치라고 한다. # 한때 독일의 국민소득이 4만 달러를 넘는 데 반해, 구 동독 지역은 3만 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물론 이 자체도 아주 낮은 건 아니지만, 서유럽에서는 그 수준이 낙후된 이탈리아 남부(북부 소득의 절반, 2만 달러 이상)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 물론 폴란드보다야 훨씬 낫지만. 현재 한국 기업들은 폴란드나 체코에 공장을 짓는 경우가 많은데, 물건 팔아먹을 서유럽과의 거리 및 인건비 메리트 때문. 만약 독일이 통일 안 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분리처럼, 즉 지금의 체코와 슬로바키아처럼 따로 노는 루트로 갔더라면 한국 기업들이 공장을 여기에 지었을 수도 있다. 위에서 말했듯 1980년대 말 경기 침체로 한국에 경제적으로 따라잡혀서 인건비 부담이 덜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최대의 경제 대국인 서독이 바로 옆에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리고 동유럽 언어에 비해 독일어는 한국에서 할 줄 아는 사람이 많다는 이점도 존재했다.
그리고 통일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구 서독과 구 동독은 지금도 임금격차가 여전히 상당하다.# 하지만 아무리 구 동독 지역이 가난하다고 까여도 어디까지나 독일 내에서나 그렇지, 구 동구권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의 옛 자본주의 진영에서도 동독보다 가난한 지역은 널려 있다.[26] #[27]
그리고 독일의 구 동독 지역은 상대적 낙후로 인해 근래에 들어 반난민주의를 앞세운 네오나치즘이 일어나 타 독일 지역 주민들의 걱정을 사고 있다. 당장 지역적으로는 구 동독지방, 정치 성향은 극우 정당과 세트로 따라다닌다는 난민 문제도 막상 제20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다른 이슈들에 비해 훨씬 뒤쳐졌다.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처음으로 연방헌법재판소에서 동독 출신의 재판관이 나왔다.#
2020년까지는 코로나19로 인한 피해에서 구 동독 지역의 피해가 적었다.# 독일도 코로나19 유행 당시 엄격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했는데 자유로웠던 서독에 비해 정부의 통제에 익숙했던 옛 동독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잘 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2021년부터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구 동독 지역은 독일 내에서도 접종 완료율 하위권을 기록하고 있고, 심지어는 백신 반대 운동의 중심지로도 부상하고 있다.
그리고 통일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구 서독과 구 동독은 지금도 임금격차가 여전히 상당하다.# 하지만 아무리 구 동독 지역이 가난하다고 까여도 어디까지나 독일 내에서나 그렇지, 구 동구권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의 옛 자본주의 진영에서도 동독보다 가난한 지역은 널려 있다.[26] #[27]
그리고 독일의 구 동독 지역은 상대적 낙후로 인해 근래에 들어 반난민주의를 앞세운 네오나치즘이 일어나 타 독일 지역 주민들의 걱정을 사고 있다. 당장 지역적으로는 구 동독지방, 정치 성향은 극우 정당과 세트로 따라다닌다는 난민 문제도 막상 제20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다른 이슈들에 비해 훨씬 뒤쳐졌다.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처음으로 연방헌법재판소에서 동독 출신의 재판관이 나왔다.#
2020년까지는 코로나19로 인한 피해에서 구 동독 지역의 피해가 적었다.# 독일도 코로나19 유행 당시 엄격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했는데 자유로웠던 서독에 비해 정부의 통제에 익숙했던 옛 동독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잘 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2021년부터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구 동독 지역은 독일 내에서도 접종 완료율 하위권을 기록하고 있고, 심지어는 백신 반대 운동의 중심지로도 부상하고 있다.
"6월 8일 우리의 투표를 위해" 1986년 동독 총선 포스터 |
독일민주공화국 헌법 참조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이 유일 집권당이었고, 그 위성정당으로 동독 기독교민주연합, 동독 자유민주당, 독일 민족민주당[28], 독일 민주농민당이 있었다. 통일 이후에 동독 기독교민주연합과 민주농민당은 서독의 기독교민주연합에, 자유민주당과 민족민주당은 서독의 자유민주당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이들 5개 정당 외에 자유독일청년단, 자유독일노동조합연맹[29], 독일민주여성동맹, 동독문화협회 등의 어용 외곽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동독 인민의회에서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 127석
- 자유독일노동조합연맹(FDGB) 68석
-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 52석
- 독일 자유민주당(LDPD) 52석
- 독일 민주농민당(DBD) 52석
- 독일 민족민주당(NDPD) 52석
- 자유독일청년단(FDJ) 50석
- 독일민주여성동맹(DFD) 35석
- 동독문화협회(KB) 22석
이후 공산주의 체제가 사실상 와해된 1990년 3월이 되어서야 동독에서 분단 45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유 선거가 치러질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앙겔라 메르켈은 정계에 입문하여 동독 기독교민주연합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악명이 높아서, 흔히 미국 경찰, 한국 경찰, 중국 공안 하면서 셋 중 가장 무식하게 때려잡는 중국 공안(...) 유머의 원형이 바로 CIA, KGB, 슈타지 셋을 비교한 유머다. 해당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겠지만, 동독 전체가 대단히 치밀한 감시체제 하에 있었다.
다만 북한이나 중국과 비교하면 언론의 자유는 어느정도 높은 수준이었다.[30] 1970년대 들어서부터는 집에 안테나 달고 서독 방송을 시청하는 것도 사실상 묵인받았다. 사실 아예 국토 한가운데인 서베를린에서 전파를 쏘는데다가 컬러 TV 송출 방식이 서독은 PAL, 동독은 SECAM으로 다르긴 했어도 어쨌든 남한의 NTSC, 북한의 PAL처럼 아예 호환이 되지 않는 건 아니라서 흑백으로 볼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방해전파를 쏘려고 해도 채널번호가 같아서 방해전파 쏘기가 힘들었고, 또한 서독 TV 프로그램이 동독 TV 프로그램보다 훨씬 신뢰성이 높아서 고위 관료들이나 상당수 당원 조차도 서독 TV를 보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런 판이니 기껏 안테나 단속을 해봐야 허튼 일에 불과했다. 결국 1970년대 들어 서독 TV 시청을 방해하는 행위를 중단했고, 1980년대부터는 아예 합법화해 버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메클렌주르크포어포메른주 동부[31], 작센주 동부 지역 같이 서독에서 쏘는 전파가 닿지 않아 서독 TV를 못 보는 지역도 있긴 했다. 동독 사람들이나 서독 사람들이나 이 지역을 가리켜 무지의 골짜기(Tal der Ahnungslosen)라고 불렀다.[32] 이 무지의 골짜기의 부정적 영향은 현대 독일에서도 남아있는데, 독일 극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AfD의 주요 지지기반이 이 무지의 골짜기에 해당하는 작센 지역이기 때문이다.
▲ 동독 국영방송 DFF의 국내정치 및 레포르타주 프로그램 Prisma 방송분. 동독 각지 철도역 내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국영 체인인 Mitropa[33]의 접객 및 위생 상태를 점검하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여느 공산국가들이 그렇듯, 당이나 체제 자체가 아닌 비정치적 요소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었고, 한편으로는 장려되었다.[34] 비정치적 문제에 대해 당에 민원성 항의를 제기하는 것 정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화 굿바이 레닌을 보면 평소부터 열성당원으로 활동하던 사람이 배급티켓으로 받아온 옷의 사이즈가 엉터리라면서 만약 우리의 체격이 당의 충직한 일꾼으로써 부적절한 것이라면, 시정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비아냥거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거 실화 맞다. 사실 웬만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이랬고 심지어 가장 막장이라는 북한조차도 어느 정도는 문제 제기를 허용해줬다.
과거 나치 독일에 대해서는 동독도 만행을 인정하고 전범들을 처벌했으나, 사죄와 배상에 대해서는 "우리 세대가 한 게 아니다"라면서 모르쇠 배째라는 식의 입장을 보였다. 정확히는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나치 투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이것을 사회주의통일당의 정당성으로 연결하는 식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책임 의식이 단절되는 양상을 보였다.[36] 동독은 서독처럼 "바이마르 공화국 → 나치 독일 → 군정기 → 분단"이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 → 공산주의자들의 반나치 투쟁기 → 군정기 → 분단" 이렇게 가르쳤다. 이는 건국 직후부터 나치의 만행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를 스스로의 역사로 여겨 사죄와 배상에도 나름대로 적극적이었던 서독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대신 스탈린주의 국가답게 나치 관련자 처벌에는 힘썼다고도 한다.
한편 동독 정부의 중앙관청들은 최소한 8개의 거점에 흩어져 있었다.
동베를린 시내의 공화국 궁전은 정부종합청사가 아니라 인민의회의사당 겸 컨벤션센터 겸 국민문화회관이었다. 이 건물은 본래 베를린 성이 있던 자리에 지은 것이다. 베를린 성은 옛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의 궁궐이었는데 베를린 폭격과 베를린 전투를 연속으로 맞이하여 파괴되었다. 1949년에 이르러 독일민주공화국을 건국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높으신 분들은 폐허로 변한 건물을 철거했으며 1976년 공화국 궁전을 완공해서 인민의회의사당을 겸한 컨벤션센터로 활용했다. 독일 재통일 이후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2006년부터 2년 동안 철거 작업에 들어가서 사라졌으며 베를린 성을 복원했다.
사진 | 이름 | 원어명 | 정당 | 임기 |
대통령 (Präsident) | ||||
Wilhelm Pieck | ||||
국가평의회 의장 (Vorsitzender des Staatsrates) | ||||
Walter Ulbricht | ||||
Willi Stoph | ||||
Erich Honecker | ||||
Egon Krenz | ||||
Manfred Gerlach | ||||
인민의회 의장 (Präsidentin der Volkskammer)[37] | ||||
Sabine Bergmann-Pohl |
사진 | 이름 | 원어명 | 정당 | 임기 |
각료평의회 의장 (Vorsitzender des Ministerrats) | ||||
오토 그로테볼 | Otto Grotewohl | |||
빌리 슈토프 | Willi Stoph | |||
호르스트 진더만 | Horst Sindermann | |||
빌리 슈토프 | Willi Stoph | |||
한스 모드로 | Hans Modrow | |||
로타어 데메지에르 | Lothar de Maizière |
공산주의 정권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민주집중제로 운영해서, 선거는 임기가 끝난 의원들의 임기를 다음 선거 때까지 늘리는 의미 밖에 없었다. 선거 때마다 모든 정당들은 사회주의통일당이 주도하는 선거연대에 가입해서 하나의 후보 명부를 만들었고, 선거는 이에 대한 찬반 투표로 이뤄졌다. 하지만 적어도 북한처럼 100% 투표에 100% 찬성은 나오지 않았다.
선거 | 날짜 | 정원 | 투표율 | 유효투표율 | 찬성 | 선거연대 |
1대 총선 | 1950년 10월 19일 | 466명[41] | 98.5% | 99.58% | 100% | 민주독일국민전선 |
2대 총선 | 1954년 10월 17일 | 98.4% | 99.46% | 100% | ||
3대 총선 | 1958년 11월 16일 | 99.25% | 99.9% | 100% | ||
4대 총선 | 1963년 10월 20일 | 434명[42] | 99.25% | 99.96% | 99.95% | |
5대 총선 | 1967년 7월 2일 | 434명 | 98.82% | 99.98% | 99.93% | |
6대 총선 | 1971년 11월 14일 | 98.48% | 99.97% | 99.85% | ||
7대 총선 | 1976년 10월 17일 | 98.58% | 99.98% | 99.86% | ||
8대 총선 | 1981년 6월 14일 | 500명 | 99.21% | 99.98% | 99.86% | |
9대 총선 | 1986년 6월 8일 | 99.74% | 99.98% | 99.94% |
동독의 마지막 총선이자 동독 역사상 단 한번 치러진 자유선거. 이전까지는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위성정당으로 존속하며 민주독일국민전선에 소속되었던 정당들이 일당제 폐지와 민주화 이후 하나 하나 40년 전 본래의 성향으로 회귀하며 독립적으로 선거에 참여했고, 민주화 이후 신설된 정당도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서독의 정당들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정당들도 여럿 나왔으나 아직은 통일 이전이었기 때문에 서독의 정당들이 동독에 지부를 창설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 헬무트 콜과 같이 서독의 정치인들이 선거 유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완전 비례대표제[43]로 치렀으며 봉쇄조항 없이 모든 정당이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당받았다.[44]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민주사회당으로 개편하고 선거에 임했다. 선거 결과 동독 기독교민주연합이 1당이 되고, 민주사회당은 66석의 결과로 참패하여 동독 사회민주당에 이어 원내3당을 차지한다.
완전 비례대표제[43]로 치렀으며 봉쇄조항 없이 모든 정당이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당받았다.[44]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민주사회당으로 개편하고 선거에 임했다. 선거 결과 동독 기독교민주연합이 1당이 되고, 민주사회당은 66석의 결과로 참패하여 동독 사회민주당에 이어 원내3당을 차지한다.
1990년 5월 6일 총원: 400석, 과반의석: 201석 | |||||||
동독 SPD[사민] | 기타 | ||||||
48.0% 40.8%+0.9%+6.3% | 21.9% | 16.4% | 5.7% 5.3%+0.4% | 8.0% | |||
192석 163석+4석+25석 | 88석 | 66석 | 23석 21석+2석 | 31석 |
선거하고 몇 달도 안 되어 독일민주공화국이 망했지만, 이 선거가 독일 정치에 남긴 것이 있으니 바로 동맹 90[51]의 존재이다. 동독 자유 총선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 한 구 동독 녹색당이 1990년 12월에 치러진 통일 독일 총선에서 성향이 비슷한 동맹 90과 선거연대를 꾸린 것. 이 선거에서 구 서독 녹색당은 봉쇄조항을 넘지 못 했지만, 동맹 90과 연대한 (동독)녹색당만은 동독 지역에서 봉쇄조항을 넘었고 독일 의회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맹 90은 정식으로 녹색당과 합당하여 동맹 90/녹색당이 되었고, 지금까지 이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나치 독일 멸망 후 독일 분할 지도. 미국·영국·프랑스 관할 지역을 합쳐 서독이 되었다. 서베를린은 본래 소련 점령 지역의 일부였으나 수도라는 상징성 때문에 미·영·불 3개국 군대가 진주해 분할한 결과 월경지가 되었다. 지도에서 프랑스가 점령한 파란색 땅 서쪽으로 옅은 노란색(거의 흰색으로 보임)으로 칠해진 땅이 있는데 이곳은 오늘날의 자를란트 주이다. 프랑스의 요구에 따라 1947년 독일에서 분리돼 프랑스의 보호를 받는 자르 보호령이 되었다가 1956년 서독으로 겨우 복귀해 자를란트 주가 되었다. 동독보다 더 동쪽에 있던 지역들은 각각 폴란드와 소련 러시아 공화국의 영토로 합병됐다. 이 중 소련에 합병된 지역은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북부 동프로이센으로, 합병 이후 칼리닌그라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소련이 해체된 오늘날에도 같은 이름으로 러시아에 속해 있다.
1949년 당시 동독(빨간색)·서독(파란색·연두색)과 자르 보호령(보라색). 연두색으로 칠해진 지역은 서베를린이다. 이 지도에서는 동서독 양국을 구성하는 주(Land, 복수형: Länder; 영어: state)의 경계선을 그어 놓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새로 그은 것이라 그 이전과 차이가 있다. 당대의 동독은 5개의 주정부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1952년 이후 예전의 주(Land)가 새로운 관구(Bezirk)로 개편되어 폐지된다. 동독의 베를린(동베를린)은 주(州)가 아니라 특수 지역으로 간주됐다. 베를린은 명목상 동독 중앙정부와 서독 연방정부가 권한을 행사할 수가 없는 연합군 4개국의 관할지역이었기 때문이다.
-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Land Mecklenburg-Vorpommern) - 북부의 주
- 브란덴부르크주(Land Brandenburg) - 베를린을 끼고 있는 주
- 작센안할트주(Land Sachsen-Anhalt) - 브란덴부르크 주의 서쪽
- 튀링겐주(Land Thüringen) - 가장 서부의 주
- 작센주(Land Sachsen) - 남부의 주
자를란트주의 서독 복귀 이후 동독(빨간색)과 서독(파란색·연두색)의 영역. 동독은 땅이 크지도 않은 데다 중앙집권형 국가가 되어서 주정부들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었다. 그래서 이 지도에서는 동독의 주들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지 않다. 그 대신 동독은 예전의 주보다 크기가 더 작은 관구(管區)들을 사실상의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두었다. 동독의 주정부들은 통일 직전에 부활했고 주정부의 기능은 통일 이후에 회복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어졌던 5개의 주들이 그대로 부활했으나 동독의 주들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변동이 있다. 별도의 특수 지역이었던 베를린(동베를린)은 통일 후 서독의 베를린(통일 전 통칭 서베를린)에 합쳐졌다.
동독이 주정부들의 기능을 정지한 시기의 최상위 행정구역인 관구(Bezirk, 복수형: Bezirke)의 경계선.
- 관구(Bezirk) - 14개
- 로스토크 관구(Bezirk Rostock)
- 노이브란덴부르크 관구(Bezirk Neubrandenburg)
- 슈베린 관구(Bezirk Schwerin)
- 포츠담 관구(Bezirk Potsdam)
- 프랑크푸르트 관구(Bezirk Frankfurt)
- 마그데부르크 관구(Bezirk Magdeburg)
- 코트부스 관구(Bezirk Cottbus)
- 할레 관구(Bezirk Halle)
- 라이프치히 관구(Bezirk Leipzig)
- 에어푸르트 관구(Bezirk Erfurt)
- 드레스덴 관구(Bezirk Dresden)
- 카를마르크스슈타트 관구(Bezirk Karl-Marx-Stadt)
- 게라 관구(Bezirk Gera)
- 줄 관구(Bezirk Suhl)
- 군(Kreise)
- 시(Stadtkreis)
동베를린은 명목상 소련군이 관할하며 동독 중앙정부가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특수한 행정구역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관구(管區)를 설치하지 않았지만 동독의 건국 직후부터 동독 중앙정부가 통치권을 행사하며 수도로서 기능했다. 이 시기 동독 인민의회에서 동베를린 지역구 의원은 총선거 때 함께 선출하지 않고 서베를린과 마찬가지로 동베를린 시의회에서 선출해서 보냈다.[53] 베를린 장벽을 세운 1961년 5월 31일부터는 공식적으로 '독일민주공화국의 수도 베를린(Berlin, Hauptstadt der DDR) 및 베를린 관구(Bezirk Berlin)라고 호칭하면서 인민의회 의원들을 직선으로 선출하는 총선거를 실행할 때에도 동독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인민의회 의원들을 직선으로 선출하기 시작했다. 동독 정권은 동베를린을 베를린이라고 부르고 서베를린은 서베를린이라고 따로 불렀지만 이때도 동베를린만의 특수 지위를 보유한 상태였으나 1968년에 헌법을 고치면서 삭제했다고 한다.
명목상 소련'군'의 관할을 어느 정도는 인정했기 때문에 군사조직의 본부는 창설 극초기를 제외하면 동베를린 외부에 있었다. 동독 국방부와 국가인민군의 본부는 슈트라우스베르크에 있었고, 육군, 공군, 국경부대 모두 본부는 베를린의 교외 지역에 있다. 해군은 항구도시가 아닌 베를린의 특성상 동베를린의 외항 기능을 했던 로스토크에 해군본부를 뒀다.[54] 그러나 본부만 없었을 뿐이지 동독의 (준)군사조직 자체는 동베를린에서도 활동했으며, 서방 연합군은 독일의 분단기에 이에 대해 항의하기도 했다.
명목상 소련'군'의 관할을 어느 정도는 인정했기 때문에 군사조직의 본부는 창설 극초기를 제외하면 동베를린 외부에 있었다. 동독 국방부와 국가인민군의 본부는 슈트라우스베르크에 있었고, 육군, 공군, 국경부대 모두 본부는 베를린의 교외 지역에 있다. 해군은 항구도시가 아닌 베를린의 특성상 동베를린의 외항 기능을 했던 로스토크에 해군본부를 뒀다.[54] 그러나 본부만 없었을 뿐이지 동독의 (준)군사조직 자체는 동베를린에서도 활동했으며, 서방 연합군은 독일의 분단기에 이에 대해 항의하기도 했다.
동베를린 중심가의 1977년의 모습.[55]
동독은 당대 전세계 공산주의 국가들을 통틀어서 제일 잘 사는 나라였다.
소련을 포함한 공산권 국가들은 대체로 산업화 후발주자였으나, 동독은 특이하게도 선발주자 국가가 공산화된 얼마 안 된 케이스였다.
공산권의 전성기였던 1968년 즈음에는 1인당 GNP가 1,801달러였으며[56] 이는 서독의 2,206달러보다는 적지만 세계적인 기준으로는 엄연한 선진국이었다. 통일 직전인 1989년에도 명목 GDP 기준 세계 18위 경제 대국[57]이자 1인당 국민소득은 9,679달러로[58], 서독의 15,300달러와는 제법 차이를 보였으나 여전히 잘 살았다. #
일단 명목상 1인당 국민소득 격차는 겨우 실질 기준으로 1.5배뿐이었기에 서독 국민들이 '동독? 거기도 좀 사는 나라네. 통일해도 먹고 사는데 별 차이 없겠군'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당시 동독의 환율은 공식 환율과 비공식 환율이 따로 있었는데, 동독 정부에서 동독 상품의 낮은 경쟁력과 서독이나 프랑스 등 서방 제품의 높은 경쟁력으로 인해서 공식 환율대로 환전했을 경우에 외화 유출이 대대적으로 벌어질 것을 우려한 까닭이다.
그러다 보니 공식 환율은 정부나 기업에서 생필품, 연료, 자재나 설비를 수입할 때 같은 상황에서나 적용을 받게 되었고, 일반인들 대상으로는(사치품 수입을 했을 때나 일반인이 서방으로 여행을 간다든가 했을 때) 사실상 비공식 환율만 사용했다. 그래서 동독은 서방에서 수입해온 상품들의 가격이 최소 3배 이상씩은 높아지는 효과를 낳았다. 그래도 커피같이 준필수품으로 여겨졌던 것들은 공식환율대로 수입[59]했으며 바나나 등 수입 과일의 경우도 일부는 공산권에 우호적인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비교적 저렴하게 수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격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어쨌든 불법 암시장 환율도 따로 있었고 이 때문에 명목상 수치와 실질 구매력 수치간 격차가 상당했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월급이 낮았기는 했지만 기초생필품 값과 공공요금은 그 이상으로 매우 쌌기 때문에 구매력 자체로만 한정한다면 공식환율 그대로라고 봐도 큰 문제는 없었고, 서독에서는 부동산 임대료가 상당히 비쌌던지라 구매력 자체로만 본다면 1.5 배이기는 했는데, 문제는 서독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업력을 갖췄지만 동독은 공업력이 떨어졌기에 동독 제품의 품질이 떨어졌고, 또한 무역역조 현상을 막기 위해 수입품을 구매하는데 제한이 따랐기에 동독인들이 구매력에 비해 실질 소비 수준이 그리 높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하다.
암시장 환율은 비공식 환율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암달러상들이 수수료를 많이 떼 가서(동독 주민 입장에서) 환율이 좀 더 높게 책정되었고, 운 나쁘게 단속이 벌어졌을 때 벌금을 거하게 물거나 감옥에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따랐다는 차이점은 있었다. 그래도 비공식 환율대로 환전한다 해도 환전 규제가 적용되는 것이 보통인지라 서독을 갈 일이 생기거나 사치품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들 애용하기는 했다. 특히 동독 마르크-서독 마르크 간의 '공식적' 교환비가 1:1이었지만 실제 암시장에서는 공식 환율의 1/3 이하 비율로 통용되었다. 이는 미국 달러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러다보니 동독 마르크의 경우 서유럽 어느 은행에서도 환전이 불가능했다.
즉, 실제 동독과 서독 간의 생활수준 경제적 격차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높았다. '도이치 현대사'에 따르면 세계은행에서 1970년대 말에 한시적으로 영국병에 걸린 영국을 국민소득에서 추월했다고 나와있는데 이것 또한 고정환율로 계산한 결과였다. 이러한 실제 가치를 토대로 80년대 후반 통일 당시 동독의 1인당 국민소득을 계산할 경우 잘 쳐봐야 4,500달러 정도밖에 안 되었고[60], 거기에다가 동독은 1980년대에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에 불어닥친 심각한 경제 불황까지 겹쳤다.
공산주의 국가가 대부분 경공업보다 중공업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계획경제 때문에 생필품 부족현상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치약이나 비누, 의류, 가공식품 같은 경공업 제품의 경우 종류가 한정되고 질도 낮은 편이었다. 또한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제법 자주 발생해 돈은 있는데 가게에 물건이 없어서 못 산다거나,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는 웃지 못할 일[61][62]이 자주 벌어졌다.
즉 국산 밀이나 아프리카산 바나나[63]는 그리 비싸지 않았지만, 미국산 청바지나 일본산 가전제품은 구하기 어려운 나라였고, 모두가 의식주에 지장이 없음에도 국산품의 낮은 질[64]과 선택지 부족으로 종종 불편한 경우는 있지만 살지 못할 지경은 아닌 정도의 생활 수준이었다[그래서].
외국 사치품의 경우에는 인터숍(Intershop)이라는 외화상점에서 취급했는데, 사실 처음에는 동독인들이 외화를 소지할 수 없었기 대문에 고위간부나 외국인 관광객 전유물이었고, 이후 1975년부터 외화소지가 합법화되면서 동독인들도 서구의 사치재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역시 서독 마르크나, 프랑스 프랑, 미국 달러같은 외화를 지녀야 물건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서독에 친척이 있거나 외국에 나가서 일을 했다던가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직업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접근이 쉬운 것은 아니었고, 이 때문에 서방 관광객을 대상으로 밀거래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통일 이후에는 '가게에 물건은 많은데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경우가 생겼고 이것이 구 동독 주민의 통일 이후 불만점 중 하나였다.
또한 공산당 일당독재 때문에 부패가 심각했다. 통일 직전에 동독 체제가 와해되면서 공산당의 부패가 드러났는데, 결국 동독 주민들의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폭락하고 통일에 대거 찬성하면서, 개혁된 공산주의 국가로서 동독을 유지하려는 일부 원탁회의에 참여한 동독 지식인들의 구상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경제의 상당부분을 서독에 의존했다. 정치범을 석방시키거나, 언론을 조금 풀어주거나, 아니면 국경에 설치된 미사일을 제거하는 등 전향적인 태도를 동독이 보여줄 때마다 서독은 지원금을 보냈다. 이는 70년대 이후로 침체되어가던 동독 경제에 활기가 도는 것으로 위장시켜 주었고, 적어도 외채위기는 겪지 않았으니까 폴란드나 루마니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같은 나라들에 비하면 침체의 정도가 덜한 건 사실이었다.
# 이 때문에 서독은 소련에 이어 동독의 두번째 교역 상대국이었다. 서독을 통해 당시 유럽공동체(EC) 회원국들에 관세 장벽 없이 상품을 수출할 수 있었다. 일부 EC 회원국들이 이를 지적했으나 서독의 묵인 속에서 별 탈 없이 이뤄졌다. 이 때문에 1980년대에는 동독의 교역에서 서방 국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30% 정도에 달했다.
그래도 서독의 라인강의 기적에는 미국의 마셜 플랜의 원조가 큰 역할을 했던 데 비해 동독은 소련에 280억 달러 상당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과거부터 내려오던 많은 산업기반들(본사, 생산 시설, 인적 자원)이 서독으로 대거 유출됐던 열악한 조건 속에서 달성했다는 점에서 고평가받을 수 있었다. 다만 소련도 바보는 아니라 이 배상금을 동독이 망하건 말건 뜯어낸 건 아니고 몰로토프 플랜으로 지원한 후 경제가 숨을 돌린 뒤 분할 상환의 형태로 받아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서방이나 소련이나 2차대전 패전국 독일을 그야말로 알거지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냉전이 본격화하면서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국민들 전반이 풍요롭게는 살지 못해도 그런 이유로 제법 넉넉하게는 살 수 있었다. 당시 소련은 석유, 가스 등 에너지 자원을 공산주의 형제국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였는데, 통일 후 전기와 가스, 수도 요금이 개편되어 가격이 급상승하자 동독 주민들이 물을 아끼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고, 덧붙여서 통일 이전을 그리워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이 때문에 서독은 소련에 이어 동독의 두번째 교역 상대국이었다. 서독을 통해 당시 유럽공동체(EC) 회원국들에 관세 장벽 없이 상품을 수출할 수 있었다. 일부 EC 회원국들이 이를 지적했으나 서독의 묵인 속에서 별 탈 없이 이뤄졌다. 이 때문에 1980년대에는 동독의 교역에서 서방 국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30% 정도에 달했다.
그래도 서독의 라인강의 기적에는 미국의 마셜 플랜의 원조가 큰 역할을 했던 데 비해 동독은 소련에 280억 달러 상당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과거부터 내려오던 많은 산업기반들(본사, 생산 시설, 인적 자원)이 서독으로 대거 유출됐던 열악한 조건 속에서 달성했다는 점에서 고평가받을 수 있었다. 다만 소련도 바보는 아니라 이 배상금을 동독이 망하건 말건 뜯어낸 건 아니고 몰로토프 플랜으로 지원한 후 경제가 숨을 돌린 뒤 분할 상환의 형태로 받아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서방이나 소련이나 2차대전 패전국 독일을 그야말로 알거지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냉전이 본격화하면서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국민들 전반이 풍요롭게는 살지 못해도 그런 이유로 제법 넉넉하게는 살 수 있었다. 당시 소련은 석유, 가스 등 에너지 자원을 공산주의 형제국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였는데, 통일 후 전기와 가스, 수도 요금이 개편되어 가격이 급상승하자 동독 주민들이 물을 아끼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고, 덧붙여서 통일 이전을 그리워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공산주의 국가이면서도 특이하게 외국인 노동자 문제가 심각했다. 당시 동독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대규모 인구 손실에 전후에도 계속된 저출산 기조, 서독으로의 지속적인 인구 유출로 인해 노동력 부족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66] 이웃인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는 물론, 심지어는 베트남, 모잠비크에서까지 노동자를 유치해서 3D 업종으로 보냈다. 물론 서독이나 다른 서방 국가에 비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제2세계 국가 기준으로는 그랬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독일 재통일 이후 유럽 전체적으로 '오시'(Ossi)들이 차별을 받기도 했다.[67]
사회주의-반제국주의 연대를 표방한 동독이었지만, 정작 그 연대의 일환으로 동독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인종차별을 포함한 각종 차별에 시달렸다. 이들은 계약 노동자(Vertragsarbeiter) 또는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체류했는데, 동독 사회에 귀화하거나 장기 거주할 기회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노동력을 상실하는 경우 계약 위반을 사유로 추방되었다. 여성 외국인 노동자가 동독에서 국적 불문의 남자를 통해 아이를 가지게 되면 낙태와 추방 중에서 선택해야 했고, 남성 외국인 노동자는 바로 추방되었다. # 또한 서독에 온 외국인 노동자가 고시원 같은 쪽방에서 휴식을 취할 때 동독에 온 외국인 노동자는 군대에서 볼 법한 침상형 생활관같은 숙소에서 살았다. 계약 종료 후 본국 귀환 시 임금 상당부분을 지급받기로 되어 있던 모잠비크계 노동자들은 동독 정부가 이들이 받아야 할 임금을 모잠비크의 국가 채무 탕감에 쓰는 바람에 지금도 약속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고, 1987 - 1989 사이에 대거 들어온 베트남계 노동자들은 독일 통일 이후 제대로 체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 채 거주하며[68] 통일 후 동독 네오나치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은 체코 등 인접 공산국가에서 체류하던 베트남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현재 베를린의 베트남계 공동체의 기원이 되었다.
사회주의-반제국주의 연대를 표방한 동독이었지만, 정작 그 연대의 일환으로 동독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인종차별을 포함한 각종 차별에 시달렸다. 이들은 계약 노동자(Vertragsarbeiter) 또는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체류했는데, 동독 사회에 귀화하거나 장기 거주할 기회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노동력을 상실하는 경우 계약 위반을 사유로 추방되었다. 여성 외국인 노동자가 동독에서 국적 불문의 남자를 통해 아이를 가지게 되면 낙태와 추방 중에서 선택해야 했고, 남성 외국인 노동자는 바로 추방되었다. # 또한 서독에 온 외국인 노동자가 고시원 같은 쪽방에서 휴식을 취할 때 동독에 온 외국인 노동자는 군대에서 볼 법한 침상형 생활관같은 숙소에서 살았다. 계약 종료 후 본국 귀환 시 임금 상당부분을 지급받기로 되어 있던 모잠비크계 노동자들은 동독 정부가 이들이 받아야 할 임금을 모잠비크의 국가 채무 탕감에 쓰는 바람에 지금도 약속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고, 1987 - 1989 사이에 대거 들어온 베트남계 노동자들은 독일 통일 이후 제대로 체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 채 거주하며[68] 통일 후 동독 네오나치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은 체코 등 인접 공산국가에서 체류하던 베트남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현재 베를린의 베트남계 공동체의 기원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국가인민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1988년 건국 39주년 기념 국가인민군의 열병식. |
1989년 건국 40주년 기념 국가인민군의 열병식. |
육해공군 및 슈타지 정복이 나치 독일 시절의 군복과 많이 닮은 편이며 실제로 동독군 정복을 나치 독일군 군복으로 개조하기도 한다. 바가지머리처럼 생긴 철모도 나치 독일군의 슈탈헬름과 얼핏 보기에는 달라 보이지, 실제로 이 철모는 나치 독일군이 도입하려다가 망하는 바람에 도입하지 못한 신형 철모를 개량한 것이었다. 원래는 동독군도 나치 독일군이 사용했던 슈탈헬름을 도입하려고 했으나 소련측이 용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는 정복까지만 그렇고, 전투복 쪽은 완전히 냉전 당시 소련군의 스타일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래도 전투복의 위장무늬나 철모만큼은 소련군의 것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동독 고유의 독자적인 것을 대신 사용했으며 특히 철모는 나치 독일 시절의 슈탈헬름을 개량한 것이었다. 그래서 동독군의 군복은 소련식과 독일식이라는 두 가지 양식이 하나로 혼합된 독특한 인상을 주는 복장이 되었다. 무장 면에서도 소련제 AK-47, AK-74 등을 자체적으로 생산하였다.
한편 이러한 것은 인적자원 측면에서도 비슷하였는데 동독군이나 서독군 모두 전직 나치 독일군 장교들이 상당수 영입되었기 때문이었다. 각각 소련군식-미군식의 조직을 따랐지만 1950년대 창군 당시 양국의 영관급 이상 장교들의 거의 대부분은 모두 나치 독일 시절의 독일 국방군 출신이었다.[69]
동독군은 붉은 프로이센군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튜브에서 동독군의 퍼레이드 영상을 보면 프로이센 왕국군 시절의 행진곡에 맞추어 행진하는 영상도 볼 수 있다. 서독군은 나치 독일의 독일 국방군과 그 이전의 독일 제국군과도 완전히 단절을 선언했지만 동독 정부는 프로이센을 그렇게 혐오했으면서도 동독군은 근대적 군대의 모델이 되는 프로이센 총참모부를 만든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를 기려 샤른호르스트 훈장까지 만들었을 정도로 프로이센군의 전통을 이으려고 노력했다.
동독군은 통일 시기였던 1989~1990년 간의 행동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동독은 인민의 혁명을 우려하고 동독군을 동원한 진압을 고려했으나 이미 이 시점에는 군 내부에서도 체제에 대한 회의론이 상당히 퍼진데다가 인민군인 우리가 인민을 상대로 총부리를 돌릴 순 없다는 반응까지 팽배하는 꼴을 보고 포기했다.[70] 심지어 일부는 동독군은 1990년 초까지 국가인민군은 인민의 군대로서 인민을 위해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이 통일되어 동독군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해체 전날(!)까지 평시대로 근무했다. 이후 독일연방군이 재교육을 실시할 때도 연방군 이념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등 통일 기간 동안의 동독군은 여러모로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 다만 동독군을 서독군에 흡수하면서 계급 조정차 불가피하게 몇 계급을 강등했는데 이 부분만큼은 불만이 컸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러한 것은 인적자원 측면에서도 비슷하였는데 동독군이나 서독군 모두 전직 나치 독일군 장교들이 상당수 영입되었기 때문이었다. 각각 소련군식-미군식의 조직을 따랐지만 1950년대 창군 당시 양국의 영관급 이상 장교들의 거의 대부분은 모두 나치 독일 시절의 독일 국방군 출신이었다.[69]
동독군은 붉은 프로이센군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튜브에서 동독군의 퍼레이드 영상을 보면 프로이센 왕국군 시절의 행진곡에 맞추어 행진하는 영상도 볼 수 있다. 서독군은 나치 독일의 독일 국방군과 그 이전의 독일 제국군과도 완전히 단절을 선언했지만 동독 정부는 프로이센을 그렇게 혐오했으면서도 동독군은 근대적 군대의 모델이 되는 프로이센 총참모부를 만든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를 기려 샤른호르스트 훈장까지 만들었을 정도로 프로이센군의 전통을 이으려고 노력했다.
동독군은 통일 시기였던 1989~1990년 간의 행동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동독은 인민의 혁명을 우려하고 동독군을 동원한 진압을 고려했으나 이미 이 시점에는 군 내부에서도 체제에 대한 회의론이 상당히 퍼진데다가 인민군인 우리가 인민을 상대로 총부리를 돌릴 순 없다는 반응까지 팽배하는 꼴을 보고 포기했다.[70] 심지어 일부는 동독군은 1990년 초까지 국가인민군은 인민의 군대로서 인민을 위해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이 통일되어 동독군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해체 전날(!)까지 평시대로 근무했다. 이후 독일연방군이 재교육을 실시할 때도 연방군 이념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등 통일 기간 동안의 동독군은 여러모로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 다만 동독군을 서독군에 흡수하면서 계급 조정차 불가피하게 몇 계급을 강등했는데 이 부분만큼은 불만이 컸다고 전해진다.
공산주의 국가이기는 하지만 북한 같은 막장 국가는 아니었고, 언론의 자유도 약간은 인정되었고 개개인의 자유에는 국가가 관대하게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물론 종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한하는 등 일부 억압은 당연히 있었다.
동독뿐만 아니라 동구권 공산국가는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반체제적이더라도 그것이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지 않는다면 봐주는 경향이 강했다. 개개인의 사적인 부분은 규제하지 않았고 서방의 인스타일, 부르다, 보그에 대응하는 지빌레, 프라모 같은 패션잡지가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 패션잡지들은 편집장부터 직원들이 당과 슈타지의 요원이거나 정보원들이었으며 체제에 협조하는 대가로 발행하긴 했지만... 어쨌든 정치에 대들지만 않으면 전체적으로 내버려 두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 정도의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대신 슈타지에 의한 감시 체계는 철저했다. 1961년 전까지는 반체제인사들을 물리적으로 고문하였으나 이후 지상감옥으로 옮기면서는 정신적으로 고문하였다.
동독뿐만 아니라 동구권 공산국가는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반체제적이더라도 그것이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지 않는다면 봐주는 경향이 강했다. 개개인의 사적인 부분은 규제하지 않았고 서방의 인스타일, 부르다, 보그에 대응하는 지빌레, 프라모 같은 패션잡지가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 패션잡지들은 편집장부터 직원들이 당과 슈타지의 요원이거나 정보원들이었으며 체제에 협조하는 대가로 발행하긴 했지만... 어쨌든 정치에 대들지만 않으면 전체적으로 내버려 두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 정도의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대신 슈타지에 의한 감시 체계는 철저했다. 1961년 전까지는 반체제인사들을 물리적으로 고문하였으나 이후 지상감옥으로 옮기면서는 정신적으로 고문하였다.
공산주의 국가인 동독에서 예술은 어디까지나 인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인민대중을 위한 위로의 매개로서 예술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연은 입장료가 없었다. 대부분의 예술가는 국가에 소속되어 월급을 받으며 대중을 위해 창작하고 공연한다.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공연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오페라나 관현악 공연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장점이라고 한다. 게다가 공산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상당히 잘 사는 축에 속한 동독이었기에, 지역마다 도서관이나 미술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출판사에도 보조금을 주었기때문에 책값도 쌌다.
그래서 서독인들이 값싸게 문화생활을 즐기기위해 종종 동독에 방문하기도 했다. 비록 검열이 있었다지만 책값과 오페라, 클래식 음악 관람료는 동독이 훨씬 쌌기 때문으로 이 때문에 괴테 소설이나 그림동화를 비롯한 검열에서 제외된 고전 서적을 왕창 사기도 했다.
통일 이후에는 입장료가 비싸져서 동독 시절에는 거의 공짜로 매주 1~2번은 관람하던 음악회나 공연 등을 보기 힘들어졌다고 하고 각 동네에 한 곳 정도는 있던 도서관과 문화회관 역시 폐관하는 경우도 잦아졌기에 도서관에서 책을 보려면 멀리 걸어다녀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통일 이후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로 예산업무가 넘어갔는데 서독 정부에서 예산을 많이 줄 처지가 아니고 동독의 지방정부도 인구유출이나 실업난 등의 문제로 재정상황이 영 좋지 않았던지라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예산을 확 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회관이나 도서관을 폐관한다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동독 지역에서도 영화가 성행했는데 특히 아이들을 위한 영화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고 영화관에서 자국의 영화 말고도 주로 동구권의 영화들이 상영되었지만 가끔씩 서구권의 영화들도 상영되었다.
동독 출신의 사람들이 통일 이후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먹고 사는 건 지금이 더 나은데, 문화적으로는 그 때가 오히려 더 풍요로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독인들이 값싸게 문화생활을 즐기기위해 종종 동독에 방문하기도 했다. 비록 검열이 있었다지만 책값과 오페라, 클래식 음악 관람료는 동독이 훨씬 쌌기 때문으로 이 때문에 괴테 소설이나 그림동화를 비롯한 검열에서 제외된 고전 서적을 왕창 사기도 했다.
통일 이후에는 입장료가 비싸져서 동독 시절에는 거의 공짜로 매주 1~2번은 관람하던 음악회나 공연 등을 보기 힘들어졌다고 하고 각 동네에 한 곳 정도는 있던 도서관과 문화회관 역시 폐관하는 경우도 잦아졌기에 도서관에서 책을 보려면 멀리 걸어다녀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통일 이후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로 예산업무가 넘어갔는데 서독 정부에서 예산을 많이 줄 처지가 아니고 동독의 지방정부도 인구유출이나 실업난 등의 문제로 재정상황이 영 좋지 않았던지라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예산을 확 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회관이나 도서관을 폐관한다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동독 지역에서도 영화가 성행했는데 특히 아이들을 위한 영화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고 영화관에서 자국의 영화 말고도 주로 동구권의 영화들이 상영되었지만 가끔씩 서구권의 영화들도 상영되었다.
동독 출신의 사람들이 통일 이후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먹고 사는 건 지금이 더 나은데, 문화적으로는 그 때가 오히려 더 풍요로웠다"는 것이다.
1950년대에는 로큰롤 밴드를 조직하였다는 이유로 수감되는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암시장에서 몰래 서구의 음반을 구할 수 있었고 외국 물건도 알게 모르게 다 들어왔다고 한다.[71] 당시 동독은 어쨌든 서구와 맞닿아 있는 첨병 역할을 했고, 남한과 북한이 완전히 막혀있는 것과 달리 민간부분의 교류나 교역은 꾸준히 이뤄졌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서구의 음반이 상당히 많이 들어왔고, 해적판도 더러 제작되어 유통되었으며, 80년대에는 비디오테이프도 복사본으로 많이 돌았다고 한다.
서구의 팝 음반들은 주로 불가리아나 부다페스트를 통해 들어왔는데, 불가리아에서는 서구권 음반들을 라이센스로 발매했고, 부다페스트에서는 아예 원판을 직접 수입해서(!) 판매했다고 한다. 다만 가격은 험악했는데 LP 1장에 대략 250 동독 마르크로 평균 한달 월급의 절반 가까이였다. 다른 방법으로는 서독 여행이 자유로웠던 연금수령자 친척에게 부탁해서[72][73]들여오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예 "LP계"를 조직해 대여료를 받고 서독에서 들여온 음반을 카세트에 녹음하게 한 다음 그 LP를 판매해 다음 LP를 살 돈을 마련하는 천재적인 수완을 발휘했다고 한다.#
다만 국영 레이블이었던 "아미가"를 통해 서구권의 팝 앨범들이 라이센스되어 상당히 많이 발매되었는데 퀸,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 아바 등을 비롯해서 피터 가브리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서구권 팝 아티스트들의 앨범이 시중에 풀렸다. 대부분 한정된 예산의 문제로 각 앨범을 발매하기 보다는 히트곡들을 추려서 묶은 컴필레이션의 형태로 많이 발매되었는데, 어지간하면 히트곡들은 검열하지 않고 실어서 역설적이게도 당시 대한민국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된 곡[74]들마저 버젓이 발매되었다(...) 당시 소련도 이 정도로 자유롭지는 못했다. 물론 정부의 정책상 꽤 적은 수만을 찍어서 음반가게에 연줄이 있지 않은 이상 입수하기 힘들었다고.
동독 록밴드 카라트(karat)의 1982년 곡 푸른 행성(Der Blaue Planet).
로큰롤 초기에는 동독 정부가 나서서 규제했지만 이후 록 음악이 전 세계 대중음악계에 대 성공을 거두면서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 1960년대에는 싸이키델릭 록 밴드도 생겨나고 70년대에는 펑크 록 밴드들까지 생겨난다. 아니, 생겨나기만 한 수준이 아니라 푸디스(Puhdys)나 카라트(Karat)와 같은 록밴드는 서독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동독의 락을 가리키는 오스토록(Ostrock)이란 단어까지 생겨났다. 카라트의 1982년 앨범 푸른 행성(Der Blaue Planet)은 동서독에서 동시에 한 해에 가장 많이 판매된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서독 출생(동독 성장)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카라트의 팬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서양 아티스트들의 음반이 라이센스 발매되기 시작하면서 동독에서도 양질의 팝 음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음악의 자유에 있어서는 북한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동시대의 대한민국보다 자유로웠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놓고 체제에 반하는 노래를 만든다면 잡혀갔겠지만, 그건 동시대의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으니...
서구의 팝 음반들은 주로 불가리아나 부다페스트를 통해 들어왔는데, 불가리아에서는 서구권 음반들을 라이센스로 발매했고, 부다페스트에서는 아예 원판을 직접 수입해서(!) 판매했다고 한다. 다만 가격은 험악했는데 LP 1장에 대략 250 동독 마르크로 평균 한달 월급의 절반 가까이였다. 다른 방법으로는 서독 여행이 자유로웠던 연금수령자 친척에게 부탁해서[72][73]들여오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예 "LP계"를 조직해 대여료를 받고 서독에서 들여온 음반을 카세트에 녹음하게 한 다음 그 LP를 판매해 다음 LP를 살 돈을 마련하는 천재적인 수완을 발휘했다고 한다.#
다만 국영 레이블이었던 "아미가"를 통해 서구권의 팝 앨범들이 라이센스되어 상당히 많이 발매되었는데 퀸,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 아바 등을 비롯해서 피터 가브리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서구권 팝 아티스트들의 앨범이 시중에 풀렸다. 대부분 한정된 예산의 문제로 각 앨범을 발매하기 보다는 히트곡들을 추려서 묶은 컴필레이션의 형태로 많이 발매되었는데, 어지간하면 히트곡들은 검열하지 않고 실어서 역설적이게도 당시 대한민국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된 곡[74]들마저 버젓이 발매되었다(...) 당시 소련도 이 정도로 자유롭지는 못했다. 물론 정부의 정책상 꽤 적은 수만을 찍어서 음반가게에 연줄이 있지 않은 이상 입수하기 힘들었다고.
동독 록밴드 카라트(karat)의 1982년 곡 푸른 행성(Der Blaue Planet).
로큰롤 초기에는 동독 정부가 나서서 규제했지만 이후 록 음악이 전 세계 대중음악계에 대 성공을 거두면서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 1960년대에는 싸이키델릭 록 밴드도 생겨나고 70년대에는 펑크 록 밴드들까지 생겨난다. 아니, 생겨나기만 한 수준이 아니라 푸디스(Puhdys)나 카라트(Karat)와 같은 록밴드는 서독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동독의 락을 가리키는 오스토록(Ostrock)이란 단어까지 생겨났다. 카라트의 1982년 앨범 푸른 행성(Der Blaue Planet)은 동서독에서 동시에 한 해에 가장 많이 판매된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서독 출생(동독 성장)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카라트의 팬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서양 아티스트들의 음반이 라이센스 발매되기 시작하면서 동독에서도 양질의 팝 음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음악의 자유에 있어서는 북한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동시대의 대한민국보다 자유로웠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놓고 체제에 반하는 노래를 만든다면 잡혀갔겠지만, 그건 동시대의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으니...
Pop Projekt - Feel Like Dancing (1985) | Arnulf Wenning - Lady Cool[75] (1987) |
서구권 음악의 영향을 잘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로, 1980년대 동독에서 유행하던 디스코 장르의 히트곡들에서는 (엉터리) 영어로 된 가사가 아주 널리 사용되었다. 대놓고 펫 샵 보이즈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SPEED 같은 그룹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진한 화장과 특유의 머리를 하고 다니던 고스족이나 펑크족들은 반체제적이라고 간주해 매우 엄격하게 단속했는데, 그래서 대놓고 펑크 스타일로 다니는 사람은 십중팔구 슈타지의 프락치였다고 한다. 실제로 이렇게 펑크 락 밴드의 멤버를 매수해 다른 멤버들의 행실을 보고하게 시키거나 아예 요원을 위장시켜서 잠입시키는 등 굉장히 은밀하고 철저하게 단속했다고.
동독에서는 남녀의 성기를 모자이크 없이 드러내놓고 있으며 심지어 해수욕장,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이 남녀노소 다 벗고 있는 경우도 있다. 서유럽은 제한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매춘이 창궐하고 성산업이 늘어난 반면 동독에서는 1960년대 당시 한 여자가 3~4명의 파트너를 가지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한다. 심지어 누드비치도 성업 중이었고 위 영상을 보면 46분경에 나체주의자들이 행진하는데 에리히 호네커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장면도 볼 수 있었으며 심지어 이 행사는 1987년 베를린 성립 750주년 퍼레이드 행사였다.[76]
그와 별개로 포르노물이나 성인잡지 같은 게 창간되는 일은 없었으며 서구의 성인잡지나 포로노물의 수입도 공식적으로는 금지였다. 다만 슈타지에서 포르노 비디오를 불법적으로 만들어서 뿌리기도 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포르노 영상물을 만드는 건 불법이었기 때문에 용돈벌이용으로 만든 수준이기는 했지만. 반입했을 때는 압수하였으며 섹스용품 가게의 개업도 허가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원복 교수의 해외토픽 만화 <현대문명진단> '인류의 영원한 테마, 영원한 돈벌이 SEX' 편에서 "독일 통일 당시 동독에 먼저 도착한 것은 포르노"라고 평했다.[77]
동독 여성들의 경제활동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사회주의 국가라는 특성상 대부분의 기업체가 공기업인 데다가 동독 정부에서 노동력 유출을 메꾸기 위해 여성의 사회활동을 적극 장려하고 이를 위해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졌기 때문에 때문에 여성들이 고위직에 오르는 비율이 상당히 높았고 보육시설도 잘 마련되어 있다.
성소수자 인권면에서도 서독보다 잘 보장된 편이었으며 운동의 형성 시기도 더 빨랐다. 건국 초기부터 활동한 동성애 운동가이자 심리학자인 루돌프 클리머가 대표적으로, 그의 노력이 받아들여져 소도미법인 175조를 1968년에 폐지하여 서독보다 일찍 동성애를 비범죄화하였다.[78] 1970년대부터는 다양한 퀴어 단체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지만 동독 지도자들이 성소수자를 인정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슈타지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가 1985년 사회주의통일당 당대회에서 정책이 뒤집히며, 동성애자들을 사회로 통합시킬 필요성이 인정됨과 동시에 1988년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들과 협력하여 국영 방송사에서 제작한 동성애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거나 1989년 동독에서 개봉한 영화 커밍아웃에 대해 문화부 장관이 동성애자들은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파시스트에 맞서 싸웠던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였다고 논평하는 등 어느 정도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동독은 공산주의 국가로서 무상 의료를 시행했기 때문에 트랜스젠더들은 성전환 수술도 무료로 받을 수 있었으나 성별 정정은 불가능하였다.
이렇듯 동독에선 비록 통일 직전까지 성소수자들에게 공식적인 법적 권리가 부여되진 않았지만, 민간, 정부를 막론하고 권위주의 국가답지 않게[79]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서독 정계와는 달리 공산주의 국가인 동독은 그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웠던 것도 영향을 끼쳤다.
그와 별개로 포르노물이나 성인잡지 같은 게 창간되는 일은 없었으며 서구의 성인잡지나 포로노물의 수입도 공식적으로는 금지였다. 다만 슈타지에서 포르노 비디오를 불법적으로 만들어서 뿌리기도 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포르노 영상물을 만드는 건 불법이었기 때문에 용돈벌이용으로 만든 수준이기는 했지만. 반입했을 때는 압수하였으며 섹스용품 가게의 개업도 허가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원복 교수의 해외토픽 만화 <현대문명진단> '인류의 영원한 테마, 영원한 돈벌이 SEX' 편에서 "독일 통일 당시 동독에 먼저 도착한 것은 포르노"라고 평했다.[77]
동독 여성들의 경제활동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사회주의 국가라는 특성상 대부분의 기업체가 공기업인 데다가 동독 정부에서 노동력 유출을 메꾸기 위해 여성의 사회활동을 적극 장려하고 이를 위해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졌기 때문에 때문에 여성들이 고위직에 오르는 비율이 상당히 높았고 보육시설도 잘 마련되어 있다.
성소수자 인권면에서도 서독보다 잘 보장된 편이었으며 운동의 형성 시기도 더 빨랐다. 건국 초기부터 활동한 동성애 운동가이자 심리학자인 루돌프 클리머가 대표적으로, 그의 노력이 받아들여져 소도미법인 175조를 1968년에 폐지하여 서독보다 일찍 동성애를 비범죄화하였다.[78] 1970년대부터는 다양한 퀴어 단체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지만 동독 지도자들이 성소수자를 인정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슈타지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가 1985년 사회주의통일당 당대회에서 정책이 뒤집히며, 동성애자들을 사회로 통합시킬 필요성이 인정됨과 동시에 1988년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들과 협력하여 국영 방송사에서 제작한 동성애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거나 1989년 동독에서 개봉한 영화 커밍아웃에 대해 문화부 장관이 동성애자들은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파시스트에 맞서 싸웠던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였다고 논평하는 등 어느 정도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동독은 공산주의 국가로서 무상 의료를 시행했기 때문에 트랜스젠더들은 성전환 수술도 무료로 받을 수 있었으나 성별 정정은 불가능하였다.
이렇듯 동독에선 비록 통일 직전까지 성소수자들에게 공식적인 법적 권리가 부여되진 않았지만, 민간, 정부를 막론하고 권위주의 국가답지 않게[79]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서독 정계와는 달리 공산주의 국가인 동독은 그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웠던 것도 영향을 끼쳤다.
국토는 지금의 남한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인구는 지금의 루마니아보다 적었지만 70~80년대에 소련과 함께 세계를 주름잡는 스포츠 강국이었다. 하계 올림픽에서는 종합 2위를 1976 몬트리올 올림픽, 1980 모스크바 올림픽, 1988 서울 올림픽에서 3차례나 기록했고, 종합 3위도 1972 뮌헨 올림픽에서 한 차례 기록했다. 첫 분리 출전이었던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종합 5위. 동계올림픽 역시 첫 출전했던 1968 그르노블 동계올림픽에서 10위를 기록한 것을 빼면 계속 소련에 이어 종합 순위 2위를 유지했다. 심지어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에서는 아예 소련까지 제치고 종합 우승까지 차지했다. 서독과 분리해서 출전한 이후로 단 한번도 종합순위 10위 밖으로 밀린 적이 없는 무시무시한 기록의 소유국. 그나마도 70~80년대에는 아예 종합 순위 2~3위에서 계속 내려오지 않았다.
1988 서울 올림픽은 동독이 체밀레를 시전하여 미국도, 서독도 아닌 동독이 2위였다.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도 동독이 소련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 만년 우승후보 미국을 3위로 밀어내며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동독 스포츠가 발군이었던 이유의 하나는, 코치들이 이 학교 저 학교 돌아다니며 재능있는 아이들을 마구 찾아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80] 공산주의 국가라는 특성상 체육계도 중앙정부가 꽉 쥐고 있어 체육인 육성 산업에 중앙정부가 지원을 할 수 있어서 가능했던 현상. 학생들에게도 스포츠 선수는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외국을 마음대로 돌아다닐수 있으며 우수한 성적이 나오면 국가 입장에서는 선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기에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고 한다. 이는 비단 동독뿐만 아니라 소련이나 대부분 공산권 국가에 해당하는 얘기다. 육상 여자 400m의 마리타 코흐가 1985년 기록한 47초 60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우수한 선수들을 선발한 것까지는 좋은데 국가적 차원에서 이 선수들에게 스테로이드 등의 약물을 대량 투여했다는 것이다. 선수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먹여댔기 때문에 여성 선수가 자신의 목소리가 쉬고 어깨가 넓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비로소 트레이너가 자기에게 스테로이드를 먹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서독으로 망명한 적도 있으며 안드레아스 크리거(Andreas Krieger)라는 투포환 선수도 여자였는데 이로 인해 나중에 성전환 수술을 받고 남성으로 살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81] 여성이었을 때의 이름은 하이디 크리거(Heidi Krieger)였다.
그럼에도 동독이 서독보다 못한 몇 안 되는 종목이 있었는데, 테니스, 승마,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축구였다. 그러니 동독 축구가 지금의 산마리노나 지브롤터 같은 약체국들처럼 그렇게 못한 것은 아니었는데, 분단되고 출전한 첫 월드컵에서도 8강까지 진출을 그것도 서쪽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이뤘었다. 게다가 조별리그에서 서독과 한 조였기 때문에 서독과 경기를 치러 그것도 1-0으로 이기는 파장까지 보여줬다.[82] 심지어 올림픽에서도 금메달 하나를 따는 데 성공하며 결국 이 때 딴 금메달이 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유일한 올림픽 금메달이 되었다. 그럼에도 동시대 서쪽의 동포들이 이룬 성과를 생각해보면[83] 거의 망했기는 한데, 올림픽 축구의 경우에는 동독이 서독보다 실적이 앞선다는 것이 위안거리이다.
축구 리그는 DDR 오버리가가 있어서 지역 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소속 팀들 중엔 FC 칼 자이스 예나, 디나모 드레스덴, 1.FC 프라이부르크 등처럼 유럽 무대에서 큰소리치던 팀이 있는가 하면 디나모 베를린은 슈타지의 후원 하에 1978-79시즌부터 1987-88시즌까지 리그 우승을 독차지했다. 통일 후에는 FC 한자 로스토크와 디나모 드레스덴 등 일부를 빼고 하부 리그로 전락했지만, 마티아스 잠머와 안드레아스 톰, 울프 키르스텐 등 일부는 국대급 활약을 보이거나 분데스리가에서 쏠쏠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 K리그 최초의 외국인 감독 프랑크 엥겔(전 대우 로얄즈 감독)도 동독에서 활약한 축구인이었다.
1988 서울 올림픽은 동독이 체밀레를 시전하여 미국도, 서독도 아닌 동독이 2위였다.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도 동독이 소련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 만년 우승후보 미국을 3위로 밀어내며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동독 스포츠가 발군이었던 이유의 하나는, 코치들이 이 학교 저 학교 돌아다니며 재능있는 아이들을 마구 찾아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80] 공산주의 국가라는 특성상 체육계도 중앙정부가 꽉 쥐고 있어 체육인 육성 산업에 중앙정부가 지원을 할 수 있어서 가능했던 현상. 학생들에게도 스포츠 선수는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외국을 마음대로 돌아다닐수 있으며 우수한 성적이 나오면 국가 입장에서는 선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기에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고 한다. 이는 비단 동독뿐만 아니라 소련이나 대부분 공산권 국가에 해당하는 얘기다. 육상 여자 400m의 마리타 코흐가 1985년 기록한 47초 60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우수한 선수들을 선발한 것까지는 좋은데 국가적 차원에서 이 선수들에게 스테로이드 등의 약물을 대량 투여했다는 것이다. 선수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먹여댔기 때문에 여성 선수가 자신의 목소리가 쉬고 어깨가 넓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비로소 트레이너가 자기에게 스테로이드를 먹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서독으로 망명한 적도 있으며 안드레아스 크리거(Andreas Krieger)라는 투포환 선수도 여자였는데 이로 인해 나중에 성전환 수술을 받고 남성으로 살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81] 여성이었을 때의 이름은 하이디 크리거(Heidi Krieger)였다.
그럼에도 동독이 서독보다 못한 몇 안 되는 종목이 있었는데, 테니스, 승마,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축구였다. 그러니 동독 축구가 지금의 산마리노나 지브롤터 같은 약체국들처럼 그렇게 못한 것은 아니었는데, 분단되고 출전한 첫 월드컵에서도 8강까지 진출을 그것도 서쪽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이뤘었다. 게다가 조별리그에서 서독과 한 조였기 때문에 서독과 경기를 치러 그것도 1-0으로 이기는 파장까지 보여줬다.[82] 심지어 올림픽에서도 금메달 하나를 따는 데 성공하며 결국 이 때 딴 금메달이 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유일한 올림픽 금메달이 되었다. 그럼에도 동시대 서쪽의 동포들이 이룬 성과를 생각해보면[83] 거의 망했기는 한데, 올림픽 축구의 경우에는 동독이 서독보다 실적이 앞선다는 것이 위안거리이다.
축구 리그는 DDR 오버리가가 있어서 지역 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소속 팀들 중엔 FC 칼 자이스 예나, 디나모 드레스덴, 1.FC 프라이부르크 등처럼 유럽 무대에서 큰소리치던 팀이 있는가 하면 디나모 베를린은 슈타지의 후원 하에 1978-79시즌부터 1987-88시즌까지 리그 우승을 독차지했다. 통일 후에는 FC 한자 로스토크와 디나모 드레스덴 등 일부를 빼고 하부 리그로 전락했지만, 마티아스 잠머와 안드레아스 톰, 울프 키르스텐 등 일부는 국대급 활약을 보이거나 분데스리가에서 쏠쏠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 K리그 최초의 외국인 감독 프랑크 엥겔(전 대우 로얄즈 감독)도 동독에서 활약한 축구인이었다.
독일민주공화국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영구적이고 불가역적인 동맹이다. 이 가깝고 형제적인 동맹은 독일민주공화국 인민에게 사회주의와 평화를 향한 더 나은 진행을 보장한다. (후략)1974년 동독 헌법 제6조 2항
자세한 내용은 서독-동독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
동독은 서독을 공식적으로 국가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서독처럼 통일을 적극적으로 지향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서독은 동독과의 관계를 외무부가 아닌 'Bundesministerium für innerdeutsche Beziehungen(직역하면 독일 내 관계부, 보통은 '독일 간 교류부', '내독부'라 번역)'라는 부처에서 처리한 반면, 통일을 지향하지 않았던 동독에서는 외교부에서 서독 관련 업무를 처리했다.
서독과의 대립 관계는 1980년대까지도 계속되었지만, 국제연합의 공동 가입이나 국제 스포츠 경기의 단일팀 구성, 문화 예술 분야의 교류는 제한적이나마 지속되어 평화 공존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TV 매체도 통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84] 서독 쪽 경계선이 문제가 아니라 영토 한가운데인 서베를린 시내에서 ARD, ZDF(80년대 중반 들어서부터는 RTL, SAT1 등 민영 방송도 포함)가 전파를 쏘는지라 어찌 할 방도도 없었고, 결국 동독은 서독 TV 시청을 아예 허가해 버렸다.
하지만 동-서독간 대립이 극에 달했다던 냉전 시기에도 남북한관계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일례로 서독 시민이 직접 차를 몰거나 기차를 타고 동독을 가로질러 서베를린까지 가는 것도 가능했고 절차도 간편했다. 그 대신 고속도로에서 조금이라도 과속하거나 도중에 차를 세우거나 하면 이유가 어찌되었든 바로 벌금 딱지를 받았다.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에 따르면 이것도 동독 정부의 큰 수입원 중 하나였다고 한다. 또한 비행기편은 서베를린으로 가려면 서독 국내선이 아닌 서독의 주둔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국적기를 써야 했다. 애당초 서독 국적기로 서베를린으로 가는 게 동독 영공 침범으로 간주되어 피격당할 수 있기에 불가피한 것이다.
물론 이는 바로 서베를린으로 갔을 때 얘기고 동독을 직접 방문했을 경우 까다로운 절차를 감수하는 건 기본이고, 국경 검문소에서 하루 25마르크 정도의 강제 환전을 해야 했다. 서독 마르크를 내면 비자 수수료를 떼고 동독 마르크를 주었다. 고급호텔에 묵을 경우에는 이 규정에서 면제지만 이 경우에는 하루 숙박비가 25마르크를 훨씬 초과했기에 별 의미가 없었다. 서독과 경제적 격차가 점점 불어난 동독의 외화 조달법이었다고 한다. 동독 국민에게도 같은 권리가 있었지만 1달치 급여에 해당되는 돈만 가지고 갈 수 있는 식이라서 물가가 싼 공산권이라면 모를까 물가 비싼 서독이나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등지로 나가려면 야영 아니고서는 답이 없었기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서독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모른 체한 건 아니라서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여행올 경우 일정 수준의 여행 경비를 지불했다. 그리고 간간히 동독에서 서독으로 수학여행 가는 경우도 있긴 했다. 에리히 호네커(자를란트 주 노인키르헨)나 카를 마르크스(라인란트팔츠 주 트리어), 프리드리히 엥겔스(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부퍼탈)의 고향 같은 곳을 주로 다녔다. 다만 노인들은 서독에 가는 게 쉽게 허용되는 편이었다. 노인들은 노동 인구도 아니며 서독에 가 있는 동안에는 연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서쪽으로 보내는 게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독 시민들이 휴가 삼아 물가가 저렴한 헝가리나 소련 등 동구권 국가를 여행하는 일도 꽤 잦았다고 한다. 반면 북한 주민들은 휴가도 못 받고, 바로 이웃인 중국 여행은커녕 자기 나라 동네를 건너는데도 려행증을 요구하고 옴싹달싹 못하게 하니 구 동독과 많이 다르다.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연합국에 의해서 동서 분단이 되자 동독은 1949년 북한과 단독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1955년 남한이 서독과 단독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면서 동서독과 남북한 두 분단 국가간의 정치적 이념과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래서인지 1969년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세계 시계탑이 처음 완성되었을 때는 UTC+9 지역에 야쿠츠크, 평양, 도쿄 밖에 없었다가 독일 통일 이후인 1997년에 보수 공사를 하면서 서울이 추가되었다. # 그러나 1988년 대한민국에서 열렸던 1988 서울 올림픽 때는 서독과 함께 한 자리에 참가하여 무려 2위를 차지했는데,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85년 3월에 동유럽 공산국가중에서 가장 먼저 서울 올림픽 참가를 선언했었다.[85]
또한 북방정책에서 동독 역시 예외는 아니었는지라, 1990년 3월부터 루마니아와 함께 본격적인 수교 협상이 시작되어 1990년 5월 워싱턴 주재 양국 대사관 간의 비공식 접촉을 통해 수교 합의가 이뤄졌다. 당시 기준으로는 독일이 통일되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걸린다는 판단이 지배적이었던 터라 일단 주한 서독 대사관에 동독 외교관을 상주시키고, 서독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동독 업무를 겸하면서 한시적으로나마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던 것.
그러나 생각보다 빠르게 그 해 10월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며 한국 - 동독 수교는 이뤄지지 못했으며, 동독과만 수교한 북한은 1990년 10월 통일이 되면서 관계가 한때 단절되었다가 2001년 통일 독일 정부와 외교관계를 복원하게 되었다. 그 동안의 공백기에는 중국과 소련-러시아를 매개로 한 간접적인 외교 관계만 유지했다.
또한 북방정책에서 동독 역시 예외는 아니었는지라, 1990년 3월부터 루마니아와 함께 본격적인 수교 협상이 시작되어 1990년 5월 워싱턴 주재 양국 대사관 간의 비공식 접촉을 통해 수교 합의가 이뤄졌다. 당시 기준으로는 독일이 통일되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걸린다는 판단이 지배적이었던 터라 일단 주한 서독 대사관에 동독 외교관을 상주시키고, 서독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동독 업무를 겸하면서 한시적으로나마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던 것.
그러나 생각보다 빠르게 그 해 10월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며 한국 - 동독 수교는 이뤄지지 못했으며, 동독과만 수교한 북한은 1990년 10월 통일이 되면서 관계가 한때 단절되었다가 2001년 통일 독일 정부와 외교관계를 복원하게 되었다. 그 동안의 공백기에는 중국과 소련-러시아를 매개로 한 간접적인 외교 관계만 유지했다.
1972년 에리히 호네커가 쿠바를 방문했을 때, 피델 카스트로는 동독에 대한 우호의 뜻으로 자국의 무인도 'Cayo Blanco del Sur' 섬을 'Cayo Ernesto Thaelmann' 섬으로 개칭했다.# 또한 그는 해당 섬을 동독에 할양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통일 이후 독일 외무부 및 주독일 쿠바 대사관에서는 영토 할양은 없었고 상징적인 의미밖에 없다는 것이 공식적인 입장이며, 실제로 동독이나 통일 이후 독일에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쿠바에서는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서독과의 통일조약에서 이 섬이 언급되지 않아서 동독이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떡밥이 제기되기도 한다. 마이크로네이션인 몰로시아 공화국은 아직도 동독과 전쟁 중임을 자칭하는데, 없어진 지 30년이 되어가는 동독과의 전쟁 상태를 이 섬의 존재를 이유로 이어가고 있다. 물론 독일이나 쿠바 둘 다 무시로 일관하는 중. 쿠바 입장에서도 자국의 군사보호구역에서 다른 나라가 전쟁 중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
서독과의 통일조약에서 이 섬이 언급되지 않아서 동독이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떡밥이 제기되기도 한다. 마이크로네이션인 몰로시아 공화국은 아직도 동독과 전쟁 중임을 자칭하는데, 없어진 지 30년이 되어가는 동독과의 전쟁 상태를 이 섬의 존재를 이유로 이어가고 있다. 물론 독일이나 쿠바 둘 다 무시로 일관하는 중. 쿠바 입장에서도 자국의 군사보호구역에서 다른 나라가 전쟁 중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
과거 분단국가였던 베트남이나 예멘과는 달리 독일에서 분리하여 과거 동독의 체제로 복귀하려는 분리주의 운동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일부 동독인들 사이에 Ostalgie(오스탈기)라는, 독일 통일과 그로 인한 급격한 변화로 인해 과거 동독 시절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은 존재한다. 이러한 그리움은 문화 면에서 특히 자주 등장하며 예시들로는 구 동독 경차인 트라반트, 구 동독의 보행자 신호등 캐릭터가 있으며 이러한 심금을 자극한 영화로 2003년작 굿바이 레닌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동독에 대한 그리움이 단순히 문화나 감정을 넘어서 극우화 또는 극좌화로 이어지는 경향을 많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튀링겐 주 정부다. 2014년에는 처음으로 좌파당 주 총리인 보도 라멜로#를 배출한 데 이어 2019년과 2020년 지방선거 및 주의회 선거에 비롯된 정치 위기까지 벌어졌다 있다. 2019-20년 정치위기의 시작은 2019년의 주의회 선거에서 좌파당과 대안당이 각각 29석과 22석으로 제1당과 제2당의 위치를 선점한 것이었다. 통일 이후 처음으로 극좌파 정당이 주 의회에서 원내1당을 점한 것도 충격인데 이어진 2020년 2월의 주 총리 선거에서는 기민련 지지 자민당 주 총리 후보가 투표 3라운드에서 극우 대안당의 지지를 받고 당선되는 일까지 벌어졌다![86] 이 사건의 파장으로 자민당 주 총리 후보는 사퇴하여 그해 3월 선거에서 극좌파 좌파당 총리 라멜로가 연임했다.
좌파당과 대안당의 주 지지지역이 둘 다 구 동독 지역[87]인 것을 볼 때 동독에 대한 향수의 정치적 표면화는 분명 우려할 만한 것이다.
2010년대부터 독일 재통일 뒤에 태어난 1990~2000년대생들이 사회의 중진이 되면서 동독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들도 동서독 지역의 경제적 격차나 문화적 차이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위와 같이 투표성향 등에서 여전히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다만 이들 세대는 동독을 기억하지 못하는 만큼 동독의 문화에 대한 향수는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동독에 대한 그리움이 단순히 문화나 감정을 넘어서 극우화 또는 극좌화로 이어지는 경향을 많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튀링겐 주 정부다. 2014년에는 처음으로 좌파당 주 총리인 보도 라멜로#를 배출한 데 이어 2019년과 2020년 지방선거 및 주의회 선거에 비롯된 정치 위기까지 벌어졌다 있다. 2019-20년 정치위기의 시작은 2019년의 주의회 선거에서 좌파당과 대안당이 각각 29석과 22석으로 제1당과 제2당의 위치를 선점한 것이었다. 통일 이후 처음으로 극좌파 정당이 주 의회에서 원내1당을 점한 것도 충격인데 이어진 2020년 2월의 주 총리 선거에서는 기민련 지지 자민당 주 총리 후보가 투표 3라운드에서 극우 대안당의 지지를 받고 당선되는 일까지 벌어졌다![86] 이 사건의 파장으로 자민당 주 총리 후보는 사퇴하여 그해 3월 선거에서 극좌파 좌파당 총리 라멜로가 연임했다.
좌파당과 대안당의 주 지지지역이 둘 다 구 동독 지역[87]인 것을 볼 때 동독에 대한 향수의 정치적 표면화는 분명 우려할 만한 것이다.
2010년대부터 독일 재통일 뒤에 태어난 1990~2000년대생들이 사회의 중진이 되면서 동독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들도 동서독 지역의 경제적 격차나 문화적 차이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위와 같이 투표성향 등에서 여전히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다만 이들 세대는 동독을 기억하지 못하는 만큼 동독의 문화에 대한 향수는 사라지고 있다.
영상매체
-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장편 영화들: 감독 본인은 서독인이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성장했지만, 작품 성향 상 감독의 모든 독일어 장편 영화는 전체주의 국가로서 동독을 소재로 삼는다.
- 1984년작 ZAZ사단의 특급비밀!(Top Secret!)에서 비록 코미디 영화이지만 동독군에 대한 고증이 그럭저럭 된 편이다.
- 맥가이버 시즌 2의 한 에피소드에서 맥가이버가 동독으로 잠입하는 작전이 있는데, 국경지대에서 동독군 경비대를 맞닥뜨리자 맥이 어설픈 독일어로 헛소리를 늘어놓아 경비대의 얼을 빼놓은 후 쏜살같이 제압한다. 근데 그럴만한 게 그 떠드는 내용이 "나는 미국인인데 동독에서 탈출한 내 남자와 함께 있고 사실 그는 내 아내다(mein frau)"라고 하는 식이라 동독군 장교와 병사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저놈 지금 뭐라는 거임?'이라며 벙찌게 만들었던 것.
서적
- 이원복 교수의 교양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에선 서독인 캐릭터 '한스'의 입을 빌려 동독의 사정을 설명한다. 이 작품이 소년한국일보에 연재될 당시 규정상 대한민국 국적자가 외무부장관의 특별허가 없이 공산권 국가로 여행하는 게 금지된 터라 그런 묘사를 한 것이다.
게임
- 게임 Workers & Resources: Soviet Republic에선 공산권 차량들 중 우수한 성능의 차량을 구매할 수 있다. 다만 서독에 비해선 확실히 밀리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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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어: 독일민주주의공화국 → 도이췰란드민주주의공화국[2] 상단:1950-1953
하단:1953-1955[3] 동독의 주들이 독일 연방 공화국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서독에 흡수통일.[4] 정식 명칭은 '독일 통일 문제 해결을 위한 최종 조약'이다.[5] 동독 정권은 그냥 베를린이라고 불렀다. '사실상'이라고 붙은 이유는 명목상 베를린은 동·서독 정부가 아닌 미/영/불/소의 연합국 4개국이 관할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질적으론 동·서독 정부가 관할했다. 정권 수립 직후부터 동독 정권은 동베를린이 동독의 수도임을 선언하였고 소련을 위시한 공산당 정권들은 곧바로 이를 인정했다. 즉 애초에 당사자인 동베를린의 점령국인 소련이 동독더러 '동베를린은 너희 것 아니라 우리 것이니 넘보지 말라.'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반면 서방국가들은 이것을 동독 정권의 월권 행위로 보고 1990년 동독이 소멸할 때까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대사관을 동베를린에 두는 등 사실상 현실을 인정했으며 서방권과 연합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는 서베를린에 대해 '우리가 점령한 땅'이란 인식이 어느 정도 있었다.[6] 남한의 면적에 충청북도 하나가 더 있는 것과 비슷했다.[7] 북한이나 알바니아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동독 역시 교회를 폭파하고 그 자리에 대학을 세우는 등 공공연하게 종교를 탄압했다. 그 결과 분단 이전까지 개신교의 발상지로서 개신교 다수 지역이던 동독 지역은 무종교 다수 지역이 되었다. 다만 동독에서도 크리스마스는 공휴일이긴 했다.[8] 1990년 개헌으로 다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회복되었다.[9] 본래 수교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러운 통일로 인해 무산되었다.[10] 중앙에 뻥 뚫린 구멍이 바로 서베를린이다.[11] 사실 이보다 더 많은 인구가 1945년 이후부터 1949년까지 서독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1949년 동독 정권 수립 이전에는 그나마 서독으로 이주하는게 쉬웠기 때문.[12] 참고로 여기에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일어 약자 KDVR는 동독식 표현이다. 서독에서는 DVRK를 사용하였다.[13] 이는 연합군 점령하 독일의 소련군 점령지를 의미하는 용어였으나 동독이 수립되고도 소련의 통치를 받는 괴뢰국이라고 하여 이 명칭을 계속 사용했다. 북괴랑 그 쓰임이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14] 이 때문에 서독에서는 자국의 약칭을 BRD라고 부르는걸 매우 싫어했다. 자국을 정통국가로 인식하던 서독 입장에서 'BRD'는 자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호칭으로 들렸기 때문이다.BRD(영어) 대한민국에서 자국을 '남조선'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15] 다만 동독 내의 단체명에 그냥 '독일'을 사용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동독 핸드볼 협회는 Deutscher Handball-Verband(DHV)라고 했다. 반면 서독 핸드볼 협회는 Deutscher Handballbund(DHB)라 했다. 1990년 독일 통일 직후에 열렸던 세계 여자 핸드볼 선수권 대회에서는 통일 후였음에도 동독과 서독이 따로 참가했는데 공식 영어 호칭은 이미 없어진 GDR과 둘 다 해당하는 FRG/Germany가 아닌 Germany(DHV), Germany(DHB)였다.[16] 1968년 독일민주공화국 헌법 제8조 2항을 보면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독일이 분단되었고 이를 극복하고 통일하기 위해 양독간 관계를 더 가깝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17] 다만 적화통일까지 반대한건 아니라서 1981년 에리히 호네커는 서독이 사회주의화된다면 통일에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는 속내를 보이기도 했다.#[18] 동독의 청년단체인 자유독일청년단(Freie Deutsche Jugend, FDJ)의 집회를 다룬 1950년 기록영화 '항상 준비'를 보면 단순 삼색기를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4분 40초).[19] 동독의 콤소몰과 피오네르격이다. 북한에 비유하자면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과 그 산하기관인 조선소년단이다.[20] 이렇게 한 것은 나치가 워낙 독일 전체에 미친 영향이 커서 그들을 아예 무시하고 독일을 통치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나 받아준 건 아니고 주로 정치권에서 내린 지시를 집행하는 입장이고 전쟁범죄와 무관한 일반 관료와 일선에서 활동하던 군인들 한정이었다.[21] 심지어 이 중에는 슈츠슈타펠 출신들도 있었는데 핵심 전범들은 처형하거나 숙청했지만 말단 실무자들은 받아줬기 때문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슈타지 등 체제 수호 조직에 들어갔다.[22] 당시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이전이라 어느정도 지유롭게 넘어갈 수 있었다.[23]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이자 현 독일 좌파당의 전신.[24] 이때를 기점으로 공산주의 체제가 사실상 와해되었다.[25] 그래서 공식적으로 독일의 재통일은 서독의 일방적인 흡수통일이 아니다. 동독 정권이 공중분해되어 사라지고 구 동독 5개 주가 서독 정부에 자동적으로 가입하면서 독일연방공화국이 동쪽으로 확장되는 형식이었다.[26] 동독은 공산권에서 가장 잘 사는 국가 중 하나였지만 서독은 유럽 1위, 세계 3위였다. 서독이 경제규모 상 6배 가까이 동독을 능가했던 만큼 동독과의 격차는 당연히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다.[27] 좀 더 자세한 통계는 유로스타트 지역별 GDP 페이지를 보면 된다. 첫번째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28] 동독으로 전향한 나치 잔당을 포섭하기 위한 정당이었다.[29] 사회주의통일당과 연계된 동독의 사실상 유일한 노동조합연맹이었다.[30] 하지만 같은 동유럽 공산권 중에서는 동독이 억압이 심한 편이었다. 국민공산주의 하에서 막나가던 루마니아를 제외하고는 동독은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프리덤하우스 자유 지수에서 7등급으로 최악의 등급을 받았다. 폴란드, 헝가리, 심지어 소련조차도 6등급을 받았다. 실제로도 소련과 폴란드에서는 당내 과두정이 잘 돌아갔지만,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는 실질적으로 전제정이나 다름없었다.[31] 그나마 여기는 평지였기에 날씨에 따라서 전파 산란 효과가 발생할 때에는 시청할 수도 있었다. 반면 작센주 동부는 산지였기에 전파가 닿기가 더 어려웠다.[32] 이 무지의 골짜기 지역에 대해 동독에서는 'ARD는 드레스덴 일대 빼고(Außer Raum Dresden) 또는 뤼겐과 드레스덴 빼고(Außer Rügen und Dresden)의 줄임말'이라는 지역드립성 농담이 있었다.[33] 이 회사는 DR의 침대차와 식당차 운영도 담당했다.[34] 공산권에서는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이윤을 목표로 한 혁신 노력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개선을 요구해야만 기술적 및 사회적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기에 사회 구성원들의 비정치적이고 건설적인 비판을 매우 장려했다. 당장 탈북민들이 남한에서 겪는 소통 문제 중 하나가 이 부분이다. 이들은 북한의 교육과정과 생활총화 등을 통해 일단 매사에 무엇이든 개선하라고 지적하는 식의 발화가 몸에 배어 있었는데, 남한에서는 이러한 식의 발화가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 무례한 사람으로 비춰지기 딱 좋은 행동이기 때문. 예를 들어 (객관적으로 별로인) 새 옷이 어떻냐는 말에 의례적으로 예쁘다고 말하는 대신 옷깃의 모양이 좋지 않다, 옷감이 거칠다 같은 지적을 하거나 이런 말을 덧붙이는 식의 발화가 해당한다.독일인 스테레오타입[35] 공산권 국가들이 민주화 된 이후 주민들이 큰 혼란을 겪었던 것 중 하나가, 그전까지는 당국가 체제에서 지역 당조직에 직소하면 민원이 바로바로 해결이 되었는데 이제는 당이 여럿이니 어디에 민원을 넣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유럽 공산권 국가는 정치적이거나 외부에서 볼 때 국가(=당)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의제는 절대로 건드릴 수 없지만 비정치적 요소에 대한 민원 정도의 항의는 매우 활발히 이루어지고 어떤 면에서는 한국보다도 더 잘 처리된다. 오늘날 싱가포르의 시민 및 언론 자유 양태와 비슷하다.[36] 통일 이후 구 동독 지역에서 네오나치 활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한 것도 이런 책임 의식의 단절이 작용한다는 해석이 있다. 물론 여기엔 아직까지도 개선되지 않는 구 동독과 서독의 경제적 격차 문제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바이에른이 나치가 처음 생겨나고 성장한 곳이기는 하나 대공황 이후부터는 동독이 자리잡은 구 프로이센 지역이 나치의 총본산이 되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기 직전 치른 총선에서 나치의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곳이 바로 동프로이센, 포메른, 슐레지엔, 노이마르크 일대를 위시로 한 구 프로이센 지역이다.[37] 1990년 4월 5일 발표된 독일민주공화국 헌법 초안의 제75조에 의하면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 그리고 선거에 대한 법률이 의결될 때까지 인민의회 의장단이 국가평의회를, 인민의회 의장이 국가평의회 의장을 대신한다." 원래 Präsident라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국가원수로서 이 직책을 지낸 사람은 여성 한 사람 뿐이므로 여성형 명사인 Präsidentin이라고 쓴다.[38] 1989년 12월 16일에 민주사회당으로 재창당했다.[39] 민주동맹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40] 위키백과에는 이 부분의 설명이 부실하다. 영어, 중국어 문서는 제헌의회 의원 1,525명을 정당별로 분류하였으나, 이들이 입법부 의원 320명을 선출했다는 내용이 없다.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문서는 제헌의회에 대한 설명 없이 입법부 의원 320명을 정당별로 분류하여서 마치 제헌의회 선거에서 320명을 선출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프랑스어 문서는 제헌의회 선거를 통해 뽑힌 의원들이 입법부 의원 320명을 선출했다는 내용과 함께 입법부 의원 320명을 정당별로 분류했으나 제헌의회에 대해선 의원이 몇 명인지조차 나와있지 않다. 한국어 문서는 반(反)파시스트 민주정당연맹의 의원명부에 대해 찬반투표를 했다는 내용만 있다. 아랍어 문서는 제헌의회 의원을 1,400명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문서의 내용이 틀린 게 아니라면 동독의 제헌의회 의원을 (동)베를린에서 125명, 나머지 지역에서 1,400명 선출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독일어 문서는 없다. 위키백과의 독일어 문서는 동독의 선거를 소개할 때 1949년의 제헌의원 선거를 생략하고 바로 1950년 총선부터 설명한다.[41] (동)베를린 지역구에서 66명, 나머지 지역구에서 400명을 선출했고, (동)베를린 지역구 의원은 (동)베를린 의회에서 따로 선출했다. [42] (동)베를린에서도 직접 선출하기 시작했다. [43] 동독 지역에서 이전에 치러진 자유선거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완전 비례대표제 선거 뿐이었다.[44] 400명을 완전 비례대표제로 선출하므로 산술적으로 0.25%만 득표해도 의원 1명을 당선시킬 수 있다. 실제로는 0.18%를 득표한 정당에게까지 의석이 배분되었다.[기민] Allianz für Deutschland. 통일 직전 서독 기독교민주연합에 흡수[46] Demokratischen Aufbruch[47] Deutsche Soziale Union. 독일 재통일 이후 바이에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이 이 당을 통해 옛 동독 지역으로 진출하려 했지만 CSU는 바이에른에서만 활동한다는 CDU/CSU의 불문율을 건드리는 행위였기 때문에 무산되었고, DSU는 원외 군소정당이 되어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사민] 통일 직전 서독 사회민주당에 흡수.[자민] 통일 직전 서독 자유민주당에 흡수[50] 선거는 독자적으로 치렀지만 선거 이후 얼마 뒤 자유민주연대에 합류하였다.[51] 동독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의 연합[52] 이 헌법 개정으로 (동)베를린의 특별한 지위에 관한 규정을 삭제하였다.[53] 당시 동독 인민의회는 직접 선거로 선출한 의원 400명과 동베를린 시의회에서 선출한 의원 66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서독 연방의회가 정원 494명+a(초과의석)에 서베를린 시의회에서 선출한 22명으로 구성된 걸 생각하면 동베를린이 동독 정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다. [54] 같은 이유로 통일 독일 해군본부는 서독 해군본부가 있던 빌헬름스하펜을 떠나 로스토크의 동독 해군본부 청사로 이전했다. 다만 거의 모든 해상 전력을 지휘하는 1, 2전단은 여전히 구 서독 영역인 킬과 빌헬름스하펜에 있다.[55] 당시 동독이 1969년 세웠던 베를린 TV타워가 보인다.[56] 동년의 일본은 1,451달러였다. 공산 국가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선진국인 일본보다 명목상이나마 더 잘 산 셈이다.[57] 제2세계에서는 소련(2위), 중국(9위), 폴란드(17위) 다음인데, 폴란드 인구는 동독의 2배 이상이었다는 데 주목. 당시 남한은 15위였는데 마찬가지로 동독보다 인구가 2배나 되었다.[58] 2019년의 환율로 대충 약 20,000달러 정도 된다.[59] 그렇지만 커피는 대부분 수입해왔기 때문에, 1977년 브라질 커피농사가 흉작이었을 때는 커피값 폭등으로 수입량이 크게 줄어들어서 한국의 "콩피" 비슷하게 대용품으로 때워야 하기도 했다. 할 수 없이 베트남과 따로 수입계약을 맺어 커피를 안정적으로 대량 수입하게 될 것을 기대했으나, 정작 첫 열매를 수확하기 시작하게 될 시점에서 동독은 스스로 무너졌고, 결국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었다.[60] 참고로 동시기 한국의 GNI는 약 6,300달러였다. 이미 당시 한국의 GNI가 동구권 위성국 중 가장 잘살던 나라 중 하나였던 동독을 훨씬 앞섰던 것이다. 물론 이것이 동독이 못 살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80년대 후반의 한국은 이미 경제적으로 중진국에 진입한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실제로 한국의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넘긴 것도 1987년이며, 80년대 중반에는 이미 2020년대의 중국과 비슷한 포지션이었다) 소련, 동독, 체코, 헝가리 등 냉전 당시 동구권의 부유한 국가들은 국민소득 면에서 세계 기준으로 개발도상국(중진국도 개발도상국의 일종이다)의 상위권과 선진국 문턱 사이의 국민소득을 갖추었다고 평가되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15,000~20,000불 정도다.[61] 이원복의《먼나라 이웃나라》독일 편에서 따르면 서독 주민들이 동독 입국시 짐 검사를 받을때 치약, 비누 등 생필품을 압수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62] 80년대 중반에 이르면 공산품 부족 현상이 매우 심화되었는데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일화로 지방의 한 고등학생이 학교에 결석 사유로 ”바지 구매를 위한 베를린 방문“을 제출했는데 이게 승인되었다(…)는 실화가 있다. 바지를 사러 베를린까지 가야했을 만큼 지방 도시의 상품 부족이 심해졌었다는 것이다.[63] 열대 수입 과일은 아프리카에도 공산주의권에 우호적인 정권이 여럿 있어서 그런 나라들로부터 비교적 값싸게 수입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이런 국가들은 앙골라, 모잠비크, 에티오피아 등이 있었다.[64] 물론 서방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나 낮은 수준이지 제3세계 저개발 국가의 생산품에 비하면 꽤 괜찮은 수준이었다. 탈북민들의 수기를 읽다 보면 당시 북한에 들어온 상품들 가운데서 (일본제 정도를 제외하면) 동독제가 가장 품질이 좋은 축이었다그리고 소련제는 그보다 훨씬 구리더라라고 회고하는 구절이 종종 나온다.[그래서] 당시 동구권 주민들의 저축률이 높았다. 그런데 모든 것이 국가 소유였으므로 은행의 저축금을 필요로 할 사유 기업은 없었고, 이렇게 저축한 돈은 국영 산업 육성과 군대에 투자되었다.[66] 물론 3D업종 한정이다. 정작 동독 국내인들이 차지하는 일자리에서는 (실업이 없는 공산권 특성상) 노동력 과포화 상태가 벌어지고 있었다.[67] 오시(오씨)는 원래 단순히 "동쪽 사람"이라는 의미였지만 동독인, 특히 "못 사는 주제에 게으르다"라는 부정적 의미가 담긴 지역 비하 용어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독일 현지에서도 사용되는 단어이며, 이에 반대되는 단어로는 "거만하고 역겨운 서독 놈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시(베씨, Wessi)가 있다.[68] 당시 독일 정부는 이들에게 사실상 돈 줄 테니 꺼지라는 태도로 일관했다.[69] 나머지는 독소전쟁 이전 혹은 직후에 탈영해 소련군에서 근무한 정통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전간기 독일 공산당의 세력이 작지 않았던 만큼 소련군에 몸담은 독일인 공산주의자는 적지 않았으나, 그들 대부분은 관료가 되어 정치가 테크를 탔고 군인으로 살아가겠다며 동독군에 들어간 사람은 몇 안 됐다. 이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카를 하인츠 호프만과 하인츠 케슬러가 대장을 달고 국방장관을 역임했다.[70] 다만 군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은 당시 동독 지도부가 에리히 호네커를 비롯한 강경파와 호네커에게 반대하는 온건파의 대립이 극심해서 강경파가 군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것도 있으며 설령 동독군이 지시를 거부하더라도 과거의 1956년 헝가리 혁명이나 프라하의 봄처럼 동독에 주둔하던 소련군이 출동해 진압한다는 2차 옵션이 있었다. 당시 독일 주둔 소련군집단 사령관이던 보리스 스트네코프는 매파였고,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여 내정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긴 했지만 동독 정부가 먼저 요청할 시에는 소련군의 출동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국 당 안팎에서 끓어오르는 비판 여론에 밀려 호네커가 실각하고 온건파인 에곤 크렌츠가 집권하면서 소련군의 출동은 무산되었다.[71] 실제로 1998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일본 애니 비디오를 구하려면 용산이나 세운상가 등 전자상가 내 점포를 수소문하거나 암시장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72] 고령자일수록 서독 여행 허가가 더 쉽게 나는 편이었다. 이유인즉슨 연금만 축내고 있지 말라고. 실제로 동독 정부는 출국한 연급지급자들에게 해외에 체류했던 일수만큼의 연금을 제하고 지급했다. 동독 입장에서는 노동력 손실도 없으면서 지출은 지출대로 줄어서 전혀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반대로 당장 써먹을 수 있는 훌륭한 노동력인 젊은층과 장년층은 여행 허가가 잘 나지 않는 편이었다.[73] 다만 서독발 입국자들은 상당히 철저하게 검사해서 서방 음악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등은 전부 압수한 후 내용물을 지워 슈타지의 도청 내용을 녹음하는 공테이프로 사용했다. 라이프치히의 독일 현대사 박물관에 실제로 재활용된 테이프가 전시되어 있다.[74] 대표적으로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아바의 "When I Kissed the Teacher" 등...[75] 영상의 음악방송인 Bong은 80년대 동독 청년층 문화의 상징같은 방송이었다. 한국의 뮤직뱅크같은 개념으로 자체적인 팝 차트도 있었다. 가끔씩 MDR에서 당시 방송분을 지금도 종종 재방송해주기 때문에 지금도 운이 좋다면 볼 수 있다.[76] 분단기 동독에서 활동했던 앙겔라 메르켈은 젊은 시절 다 벗은 채로 해변에서 찍은 누드 사진(…)이 유출되는 일도 있었는데 본인도 딱히 부정하지 않았고 그렇게 문제시되지도 않아서 그냥저냥 넘어갔다.[77] 조선일보사판 단행본 1권 수록. 사실 현대문명진단 자체가 FAZ에 올라오는 토픽의 요약본에 가깝다(...)[78] 법안 자체는 1957년에 사문화되었기 때문에 이 점을 고려하면 더욱 빠르다.[79] 소련을 제외한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이 스탈린주의적 통치시기를 제외하고 동성애에 대해 꽤나 관대한 모습을 보인 건 드문 현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7-80년대까지는 자본주의권 유럽도 북유럽(핀란드 제외), 베네룩스 정도를 제외하면 성소수자에 대한 권리나 수용도가 동구권과 비슷한 수준이었다.[80] 출처 :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 교과서 - 동북아역사재단[81] 이전부터 성정체성은 남성이었다. 약 때문에 성정체성이 바뀐건 아니다.[82] 이 경기가 성인 대표팀에서 동서독 대표팀이 서로 맞붙은 처음이자 마지막 경기로 바꿔 말하면 양팀간의 친선 경기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전적 또한 동독이 서독보다 앞섰었다.[83] 우승 3회, 준우승 3회, 4강 2회, 8강 2회. 그리고 유로 대회의 경우, 동독은 자국이 존속할 당시에 열렸던 대회의 본선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 한 반면에 서독은 초대 대회와 두 번째 대회 불참 및 1968년 이탈리아 대회에서 예선 탈락한 것을 제외하면 우승 2번, 준우승 1번, 4위 1번을 거두었다. 1984년 프랑스 대회에서 딱 한 번 조별리그 탈락(5위)을 한 적이 있었다.[84]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 참조.[85] 다만 이는 직전 대회인 1984 LA 올림픽을 공산권이 죄다 보이콧했던 것에 대해 동독 내부적으로 매우 큰 논쟁이 있었던 것을 무마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올림픽이라는게 선수들은 물론이고 체육계 관계자들 입장에서 자유롭게 해외에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만큼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보이콧을 해버렸으니 당연히 실망감이 컸던지라 소련과의 협의도 없이 독자적인 결단을 내린 것. 결과적으로는 1988년 1월에 소련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북한 및 쿠바 등의 일부 친북 성향 국가를 제외한 공산권 전체가 서울에 모였다.[86]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가 하면 독일 정치에서 기성정당과 극우정당이 마지막으로 협력한 사례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현역이던 시절이다! 경우에 따라 극우정당으로 분류되는 독일당을 감안한다고 쳐도 1960년대 이후에는 극우정당과의 협력 사례가 없다! 현대 독일의 주류사회는 나치와 관련된 것이라고 하면 경기를 떨기에 수년간 대안당과 같은 극우정당들은 협력을 하지도, 받지도 않는 비토 상태에 있었는데 처음으로 이러한 합의가 의도치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깨진 것이었다.[87] 좌파당은 동베를린을 비롯한 도시 지역, 대안당은 작센 주와 그 주변 튀링겐과 안할트 일부[88] 동독 국영TV의 메인 뉴스 프로그램이었다.[89] 영화의 시간대는 90년대 중반으로 동독이 소멸한 이후다.[90] 전원 동독군 출신이라고 한다. 구 공산권 소속 군인들이 냉전 종식 이후 범죄자로 전향하는 경우가 잦았다는 걸 생각하면 나름 고증에 맞는 부분.[91] 분단으로 노선이 쪼개져, 동독 지역의 몇몇 역은 전철이 정차하지 않는 버려진 구간이 되었다.
하단:1953-1955[3] 동독의 주들이 독일 연방 공화국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서독에 흡수통일.[4] 정식 명칭은 '독일 통일 문제 해결을 위한 최종 조약'이다.[5] 동독 정권은 그냥 베를린이라고 불렀다. '사실상'이라고 붙은 이유는 명목상 베를린은 동·서독 정부가 아닌 미/영/불/소의 연합국 4개국이 관할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질적으론 동·서독 정부가 관할했다. 정권 수립 직후부터 동독 정권은 동베를린이 동독의 수도임을 선언하였고 소련을 위시한 공산당 정권들은 곧바로 이를 인정했다. 즉 애초에 당사자인 동베를린의 점령국인 소련이 동독더러 '동베를린은 너희 것 아니라 우리 것이니 넘보지 말라.'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반면 서방국가들은 이것을 동독 정권의 월권 행위로 보고 1990년 동독이 소멸할 때까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대사관을 동베를린에 두는 등 사실상 현실을 인정했으며 서방권과 연합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는 서베를린에 대해 '우리가 점령한 땅'이란 인식이 어느 정도 있었다.[6] 남한의 면적에 충청북도 하나가 더 있는 것과 비슷했다.[7] 북한이나 알바니아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동독 역시 교회를 폭파하고 그 자리에 대학을 세우는 등 공공연하게 종교를 탄압했다. 그 결과 분단 이전까지 개신교의 발상지로서 개신교 다수 지역이던 동독 지역은 무종교 다수 지역이 되었다. 다만 동독에서도 크리스마스는 공휴일이긴 했다.[8] 1990년 개헌으로 다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회복되었다.[9] 본래 수교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러운 통일로 인해 무산되었다.[10] 중앙에 뻥 뚫린 구멍이 바로 서베를린이다.[11] 사실 이보다 더 많은 인구가 1945년 이후부터 1949년까지 서독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1949년 동독 정권 수립 이전에는 그나마 서독으로 이주하는게 쉬웠기 때문.[12] 참고로 여기에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일어 약자 KDVR는 동독식 표현이다. 서독에서는 DVRK를 사용하였다.[13] 이는 연합군 점령하 독일의 소련군 점령지를 의미하는 용어였으나 동독이 수립되고도 소련의 통치를 받는 괴뢰국이라고 하여 이 명칭을 계속 사용했다. 북괴랑 그 쓰임이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14] 이 때문에 서독에서는 자국의 약칭을 BRD라고 부르는걸 매우 싫어했다. 자국을 정통국가로 인식하던 서독 입장에서 'BRD'는 자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호칭으로 들렸기 때문이다.BRD(영어) 대한민국에서 자국을 '남조선'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15] 다만 동독 내의 단체명에 그냥 '독일'을 사용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동독 핸드볼 협회는 Deutscher Handball-Verband(DHV)라고 했다. 반면 서독 핸드볼 협회는 Deutscher Handballbund(DHB)라 했다. 1990년 독일 통일 직후에 열렸던 세계 여자 핸드볼 선수권 대회에서는 통일 후였음에도 동독과 서독이 따로 참가했는데 공식 영어 호칭은 이미 없어진 GDR과 둘 다 해당하는 FRG/Germany가 아닌 Germany(DHV), Germany(DHB)였다.[16] 1968년 독일민주공화국 헌법 제8조 2항을 보면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독일이 분단되었고 이를 극복하고 통일하기 위해 양독간 관계를 더 가깝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17] 다만 적화통일까지 반대한건 아니라서 1981년 에리히 호네커는 서독이 사회주의화된다면 통일에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는 속내를 보이기도 했다.#[18] 동독의 청년단체인 자유독일청년단(Freie Deutsche Jugend, FDJ)의 집회를 다룬 1950년 기록영화 '항상 준비'를 보면 단순 삼색기를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4분 40초).[19] 동독의 콤소몰과 피오네르격이다. 북한에 비유하자면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과 그 산하기관인 조선소년단이다.[20] 이렇게 한 것은 나치가 워낙 독일 전체에 미친 영향이 커서 그들을 아예 무시하고 독일을 통치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나 받아준 건 아니고 주로 정치권에서 내린 지시를 집행하는 입장이고 전쟁범죄와 무관한 일반 관료와 일선에서 활동하던 군인들 한정이었다.[21] 심지어 이 중에는 슈츠슈타펠 출신들도 있었는데 핵심 전범들은 처형하거나 숙청했지만 말단 실무자들은 받아줬기 때문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슈타지 등 체제 수호 조직에 들어갔다.[22] 당시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이전이라 어느정도 지유롭게 넘어갈 수 있었다.[23]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이자 현 독일 좌파당의 전신.[24] 이때를 기점으로 공산주의 체제가 사실상 와해되었다.[25] 그래서 공식적으로 독일의 재통일은 서독의 일방적인 흡수통일이 아니다. 동독 정권이 공중분해되어 사라지고 구 동독 5개 주가 서독 정부에 자동적으로 가입하면서 독일연방공화국이 동쪽으로 확장되는 형식이었다.[26] 동독은 공산권에서 가장 잘 사는 국가 중 하나였지만 서독은 유럽 1위, 세계 3위였다. 서독이 경제규모 상 6배 가까이 동독을 능가했던 만큼 동독과의 격차는 당연히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다.[27] 좀 더 자세한 통계는 유로스타트 지역별 GDP 페이지를 보면 된다. 첫번째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28] 동독으로 전향한 나치 잔당을 포섭하기 위한 정당이었다.[29] 사회주의통일당과 연계된 동독의 사실상 유일한 노동조합연맹이었다.[30] 하지만 같은 동유럽 공산권 중에서는 동독이 억압이 심한 편이었다. 국민공산주의 하에서 막나가던 루마니아를 제외하고는 동독은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프리덤하우스 자유 지수에서 7등급으로 최악의 등급을 받았다. 폴란드, 헝가리, 심지어 소련조차도 6등급을 받았다. 실제로도 소련과 폴란드에서는 당내 과두정이 잘 돌아갔지만,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는 실질적으로 전제정이나 다름없었다.[31] 그나마 여기는 평지였기에 날씨에 따라서 전파 산란 효과가 발생할 때에는 시청할 수도 있었다. 반면 작센주 동부는 산지였기에 전파가 닿기가 더 어려웠다.[32] 이 무지의 골짜기 지역에 대해 동독에서는 'ARD는 드레스덴 일대 빼고(Außer Raum Dresden) 또는 뤼겐과 드레스덴 빼고(Außer Rügen und Dresden)의 줄임말'이라는 지역드립성 농담이 있었다.[33] 이 회사는 DR의 침대차와 식당차 운영도 담당했다.[34] 공산권에서는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이윤을 목표로 한 혁신 노력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개선을 요구해야만 기술적 및 사회적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기에 사회 구성원들의 비정치적이고 건설적인 비판을 매우 장려했다. 당장 탈북민들이 남한에서 겪는 소통 문제 중 하나가 이 부분이다. 이들은 북한의 교육과정과 생활총화 등을 통해 일단 매사에 무엇이든 개선하라고 지적하는 식의 발화가 몸에 배어 있었는데, 남한에서는 이러한 식의 발화가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 무례한 사람으로 비춰지기 딱 좋은 행동이기 때문. 예를 들어 (객관적으로 별로인) 새 옷이 어떻냐는 말에 의례적으로 예쁘다고 말하는 대신 옷깃의 모양이 좋지 않다, 옷감이 거칠다 같은 지적을 하거나 이런 말을 덧붙이는 식의 발화가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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