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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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콘 Nikon | |||||||||||||||||
기업명 | 정식: 株式会社ニコン | ||||||||||||||||
영어: Nikon Corporation | |||||||||||||||||
한글: 주식회사 니콘 | |||||||||||||||||
국가 | |||||||||||||||||
업종명 | 광학기기 제조 및 판매업 | ||||||||||||||||
설립일 | |||||||||||||||||
설립자 | 이와사키 고야타 | ||||||||||||||||
대표자 | 우시다 카즈오 (대표이사 회장) | ||||||||||||||||
직원 수 | 연결 : 20,917명 단독 : 4,465명 (2019년 3월 기준) | ||||||||||||||||
본사 | |||||||||||||||||
링크 | 일본 | ||||||||||||||||
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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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유래는 전신이던 '일본 광학(日本光学, 닛폰 코오가쿠 )'을 줄여서 따왔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 독일의 광학 회사인 자이스 이콘(Zeiss ikon)이라는 브랜드 이름 자체를 벤치마킹해서 니콘(Nikon)으로 이름을 붙였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애초에 일본 광학 독음 중에 마지막 'n'을 설명할 부분도 없으며, [2] 1940년대 니콘의 로고와 자이스 이콘의 로고가 어느정도 유사성이 있음이 지적되기도 한다. 가끔 외국에선 '나이콘'이라 부른다고 '반드시' 나이콘'이라 불러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그냥 'NIKON'이라는 영문 표기를 미국 영어식[3]으로 발음해서 그런 것일 뿐, 니콘이라는 낱말의 어원이 일본어이며 본사가 일본에 있으므로, 일본식으로 니콘(ニコン)으로 발음해야 옳다. 또한, 니콘의 한국 법인인 '니콘이미징코리아'가 한국어 표기를 '니콘'으로 하고 있다.
일본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독일 제국의 사례를 보고 강한 군사력을 위해서는 뛰어난 광학 기술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일본 해군은 이를 위해 당시 거대 군수 기업인 미쓰비시에 '광학 기술 관련 기업'을 만들 것을 요청하였고, 1917년에 미쓰비시에서 설립한 '일본광학공업주식회사'가 니콘의 시초가 된다. 군부의 요청으로 생긴 회사라 초기에는 카메라는 만들지 않고, 망원경, 라이플의 스코프, 잠망경 등 군사 목적 광학 기기만 생산했다.(현재도 쌍안경, 라이플 스코프 등은 생산 중) 그 야마토급 전함에도 주포인 18.1인치 3연장 포의 사격통제장치로 일본 광학의 15m 측거의가 장착되었다. 이런 광학 기기는 잘 훈련된 견시들의 손에 쥐어져서, 태평양 전쟁 초기 야간전에서 일본 구축함들의 악명을 떨치게 하기도 했다.
일본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독일 제국의 사례를 보고 강한 군사력을 위해서는 뛰어난 광학 기술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일본 해군은 이를 위해 당시 거대 군수 기업인 미쓰비시에 '광학 기술 관련 기업'을 만들 것을 요청하였고, 1917년에 미쓰비시에서 설립한 '일본광학공업주식회사'가 니콘의 시초가 된다. 군부의 요청으로 생긴 회사라 초기에는 카메라는 만들지 않고, 망원경, 라이플의 스코프, 잠망경 등 군사 목적 광학 기기만 생산했다.(현재도 쌍안경, 라이플 스코프 등은 생산 중) 그 야마토급 전함에도 주포인 18.1인치 3연장 포의 사격통제장치로 일본 광학의 15m 측거의가 장착되었다. 이런 광학 기기는 잘 훈련된 견시들의 손에 쥐어져서, 태평양 전쟁 초기 야간전에서 일본 구축함들의 악명을 떨치게 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고, 군수기업이던 일본 광학은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되었다. 결국 1945년 19,000명의 종업원[5]을 거느린 회사가 1,700명 남짓한 규모로 축소되었다. 생존을 위해 일본 광학은 민간 시장 진출을 결심했고, 1946년 회사의 이름을 '니콘'으로 바꿨다. 1948년 니콘 최초 카메라인 35mm 필름 대응 레인지파인더식 카메라(RF카메라) 'NIKON I'[6][7]이 발매되었다. 하지만 평단의 반응은 좋지 않았고, 이에 니콘은 카메라 개량에 착수했다. 그러다 한국 전쟁을 계기로 라이카용 호환 렌즈들이 호평을 받게 된다. 미국의 사진작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이 한국전쟁을 취재하면서 자신의 라이카 카메라에 니콘 렌즈를 장착해 썼는데, 이 일로 세계적인 사진작가의 반열에 오른 던컨이 니콘 렌즈의 뛰어난 성능을 극찬하면서 인지도가 확 올라간 것. 1950년 12월 10일자 뉴욕 타임즈에도 니콘 카메라에 대한 호평이 실려 있다.[8] 허나 당시 카메라는 RF카메라, 특히 라이카가 꽉 잡고 있던 시절이었다. 목측식은 말할 것도 없고, 미러만을 사용한 TLR도 성능으로는 RF 카메라에 비견할 수 없어서 펜타프리즘을 장착한 완성형 SLR이 나오기 전까지 다른 메이커는 전부 죽을 쑤고 있었다. 니콘도 SP, S3 같은 RF 카메라를 만들었지만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이때 만든 S3은 2000년에 실버 크롬 버전이 8,000대, 2002년에 블랙 페인트 버전이 2,000대 한정판으로 복각되었으며 SP도 뒤이어 2005년에 2,500대 한정 발매되었다.
1953년 카메라계에는 RF의 걸작 'Leica M3'가 등장한다. 포토키나에서 M3를 손에 쥔 니콘의 기술진은 충격과 공포를 느끼고 극심한 좌절감에 빠지는데, 그동안 니콘이 해결할 수 없었던 RF의 7대 난제가 모두 해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돌아간 이들은 RF에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겠다는 보고를 하였다. 이에 니콘은 "RF를 중지하고 SLR에 사활을 걸겠다"는, 카메라 역사의 중요한 분기가 되는 결정을 내린다.
1959년 니콘은 자사 최초의 SLR 카메라 'NIKON F'를 발매한다. 이것이 바로 니콘 F 마운트의 시작이다. 비록 세계 최초의 SLR은 아니었으나[9] 그동안 SLR의 문제점이라고 하는 부분들을 상당수 해결하여, 실용적으로 쓸 수 있는 최초의 카메라로서 기자들의 많은 환영을 받았다. SLR은 찍힐 사진의 프레임을 미리 볼 수 있다는 점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점점 RF를 시장에서 몰아내게 된다.
플래그십 모델인 니콘 F 시리즈와 그 아래 등급의 FM, FE 시리즈 등을 통해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다. 특히, 1980년에 발매된 니콘의 세 번째 플래그십 모델 'F3'로 니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카메라 시장에서의 니콘의 우세는 200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카메라의 대명사로 이름을 굳혔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문사 기자들의 십중팔구는 F3를 애용하였으며, 이는 1987년 대통령 선거 유세 사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후보자들 주위에 있는 신문기자들 모두가 F3로 촬영하고 있다[10]) 또한 각종 매체에도 자주 쓰이는 소품이 된다. 유명 애니메이션인 에어리어88 OVA에서 NP통신의 종군기자로 나오는 무츠기 고(일명 록키)라는 인물이 사용하는 카메라로 모터드라이브가 장착 된 F3가 등장한다. 록키가 격추당하고 결국 탈출하지 못한 채 사막에 떨어지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사막 위에 덩그라니 놓여진 F3가 홀로 찰칵찰칵 소리를 내는 장면이 클로즈업 될 때 니콘매니아들은 말 못할 감동을 느낀다고카더라. 유승준의 히트곡인 열정에 나오는 카메라 셔터 소리도 F3에 모터드라이브 MD-4를 장착한 것의 사운드를 샘플링한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음악이나 영화, 드라마 등 각종 미디어에서 접하는 카메라 셔터 사운드는 F3에 모터드라이브 MD-4를 장착된 것의 사운드를 샘플링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참고로 부산의 지역 언론매체인 국제신문 사옥 1층 로비에 F3가 유리관에 보관, 전시되어있기도 하다.
1980년대부터 새롭게 떠오른 화두인 자동초점(Auto Focus, AF)에 대응하기 위하여 카메라 회사들은 두 가지 중 하나의 선택을 하는데, 즉 AF에 최적화된 새로운 마운트로 바꾸거나 또는 AF를 기존 마운트에 맞춰 개발하는 것이다. 캐논을 비롯한 대부분의 회사들이 전자의 방식을 선택했다. 반면, 니콘은 후자의 방식을 선택했는데, 이는 단순히 마운트 결합이 맞는 것 뿐만 아니라, 렌즈-바디 작동의 상하위 대응성을 갖는 AF마운트를 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니콘의 엔지니어들은 그야말로 애로 사항이 꽃피는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이것은 그대로 개발 지연으로 이어져, 세계 최초의 실용화된 AF시스템 출시의 영예는 미놀타에게 돌아갔다.[11] 사실 최초의 AF SLR 카메라 발매의 족보가 좀 꼬이는 게 세계 최초로 시판된 AF SLR카메라는 1981년 발매된 펜탁스 ME F였다. 그러나 이 카메라는 전용의 SMC AF 35-70 f/2.8렌즈[12]가 없으면 AF가 동작하지 않는 반 쪽짜리 AF SLR 카메라였다. 다만 다른 K마운트 렌즈를 장착하면 초점이 맞았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초점 인디케이터의 지원은 얻을 수 있었다. 니콘 엔지니어의 회고에 따르면 "그런 식이라면 더 빨리 내놓을 수 있었지만, 우리로서는 도저히 그런 물건을 시장에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13] 니콘은 1983년 F3AF를 발매하는데, 결국 원통형의 렌즈 안에 모터를 집어넣는데 성공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유에서인지 니콘은 이 방식을 버리고[14] 바디에 모터를 넣는 방식으로 선회하여 F-501을 발표하였다. 참고로, 이 당시 일본 정부는 일본 카메라 회사들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강제로 기업들 간의 기술을 공유시키고, 해외 기업체가 일본 카메라 업체로부터 해당 라이선스를 사는 것을 막았다. 당시 '대한광학'이라는 국내 카메라 업체도 미놀타와 AF 기술 제휴를 하려다, 이에 가로 막혀서 목측식 카메라라는 시대에 수십 년은 뒤떨어진 제품을 내놓았어야 했다.[15][16]
AF 기술은 플래그십에도 적용되어 1988년 F4가 발매되는데, 보도=니콘이라는 공식을 성립시키며 프레스 시장을 석권했다. 당시 캐논은 AF 시스템에 대응하기 위해 1987년 기존의 FD 마운트를 버리고 새로운 EF 마운트로 전환하면서 큰 원성을 사고 있던 차였다. 이에 반해 니콘은 기존의 MF렌즈군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특히 보도 카메라 시장에서 점유율을 그대로 유지 및 확장할 수 있었고, 1996년에 발매된 'F5'까지 이어졌다.
1959년 니콘은 자사 최초의 SLR 카메라 'NIKON F'를 발매한다. 이것이 바로 니콘 F 마운트의 시작이다. 비록 세계 최초의 SLR은 아니었으나[9] 그동안 SLR의 문제점이라고 하는 부분들을 상당수 해결하여, 실용적으로 쓸 수 있는 최초의 카메라로서 기자들의 많은 환영을 받았다. SLR은 찍힐 사진의 프레임을 미리 볼 수 있다는 점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점점 RF를 시장에서 몰아내게 된다.
플래그십 모델인 니콘 F 시리즈와 그 아래 등급의 FM, FE 시리즈 등을 통해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다. 특히, 1980년에 발매된 니콘의 세 번째 플래그십 모델 'F3'로 니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카메라 시장에서의 니콘의 우세는 200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카메라의 대명사로 이름을 굳혔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문사 기자들의 십중팔구는 F3를 애용하였으며, 이는 1987년 대통령 선거 유세 사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후보자들 주위에 있는 신문기자들 모두가 F3로 촬영하고 있다[10]) 또한 각종 매체에도 자주 쓰이는 소품이 된다. 유명 애니메이션인 에어리어88 OVA에서 NP통신의 종군기자로 나오는 무츠기 고(일명 록키)라는 인물이 사용하는 카메라로 모터드라이브가 장착 된 F3가 등장한다. 록키가 격추당하고 결국 탈출하지 못한 채 사막에 떨어지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사막 위에 덩그라니 놓여진 F3가 홀로 찰칵찰칵 소리를 내는 장면이 클로즈업 될 때 니콘매니아들은 말 못할 감동을 느낀다고카더라. 유승준의 히트곡인 열정에 나오는 카메라 셔터 소리도 F3에 모터드라이브 MD-4를 장착한 것의 사운드를 샘플링한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음악이나 영화, 드라마 등 각종 미디어에서 접하는 카메라 셔터 사운드는 F3에 모터드라이브 MD-4를 장착된 것의 사운드를 샘플링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참고로 부산의 지역 언론매체인 국제신문 사옥 1층 로비에 F3가 유리관에 보관, 전시되어있기도 하다.
1980년대부터 새롭게 떠오른 화두인 자동초점(Auto Focus, AF)에 대응하기 위하여 카메라 회사들은 두 가지 중 하나의 선택을 하는데, 즉 AF에 최적화된 새로운 마운트로 바꾸거나 또는 AF를 기존 마운트에 맞춰 개발하는 것이다. 캐논을 비롯한 대부분의 회사들이 전자의 방식을 선택했다. 반면, 니콘은 후자의 방식을 선택했는데, 이는 단순히 마운트 결합이 맞는 것 뿐만 아니라, 렌즈-바디 작동의 상하위 대응성을 갖는 AF마운트를 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니콘의 엔지니어들은 그야말로 애로 사항이 꽃피는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이것은 그대로 개발 지연으로 이어져, 세계 최초의 실용화된 AF시스템 출시의 영예는 미놀타에게 돌아갔다.[11] 사실 최초의 AF SLR 카메라 발매의 족보가 좀 꼬이는 게 세계 최초로 시판된 AF SLR카메라는 1981년 발매된 펜탁스 ME F였다. 그러나 이 카메라는 전용의 SMC AF 35-70 f/2.8렌즈[12]가 없으면 AF가 동작하지 않는 반 쪽짜리 AF SLR 카메라였다. 다만 다른 K마운트 렌즈를 장착하면 초점이 맞았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초점 인디케이터의 지원은 얻을 수 있었다. 니콘 엔지니어의 회고에 따르면 "그런 식이라면 더 빨리 내놓을 수 있었지만, 우리로서는 도저히 그런 물건을 시장에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13] 니콘은 1983년 F3AF를 발매하는데, 결국 원통형의 렌즈 안에 모터를 집어넣는데 성공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유에서인지 니콘은 이 방식을 버리고[14] 바디에 모터를 넣는 방식으로 선회하여 F-501을 발표하였다. 참고로, 이 당시 일본 정부는 일본 카메라 회사들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강제로 기업들 간의 기술을 공유시키고, 해외 기업체가 일본 카메라 업체로부터 해당 라이선스를 사는 것을 막았다. 당시 '대한광학'이라는 국내 카메라 업체도 미놀타와 AF 기술 제휴를 하려다, 이에 가로 막혀서 목측식 카메라라는 시대에 수십 년은 뒤떨어진 제품을 내놓았어야 했다.[15][16]
AF 기술은 플래그십에도 적용되어 1988년 F4가 발매되는데, 보도=니콘이라는 공식을 성립시키며 프레스 시장을 석권했다. 당시 캐논은 AF 시스템에 대응하기 위해 1987년 기존의 FD 마운트를 버리고 새로운 EF 마운트로 전환하면서 큰 원성을 사고 있던 차였다. 이에 반해 니콘은 기존의 MF렌즈군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특히 보도 카메라 시장에서 점유율을 그대로 유지 및 확장할 수 있었고, 1996년에 발매된 'F5'까지 이어졌다.
1999년에는 최초의 실용적 디지털 SLR인 'D1'을 내놓으며 보도사진계에서 인기의 정점을 찍었다. D1은 니콘 DX 포맷을 비롯 오늘날 DSLR의 여러 기술적 측면을 정한 기념비적인 모델이다. 물론 디지털에서의 최초는 아니었고[17]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여러 불편 사항들이 있지만[18] 충분히 실사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한 최초의 실용적인 DSLR이었던 것이다. 필름을 본사로 보내 현상 후 쓸 수 있는 쪽과 디지털로 바로 송고하는 쪽은 보도 속도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사진 기자들의 어깨띠는 그야말로 니콘의 물결을 이루게 되었다.
이렇듯 디지털에의 대응도 빨랐던 니콘이었으나, 그 다음 플래그십 모델을 실기하면서 그 위상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게 된다. 니콘 D1의 성공 이후 캐논이 야심차게 내놓은 '1D'는 D1을 크게 상회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렌즈와 주변장비를 구입한 언론사들로서는 다시 비용지출을 감수하며 캐논으로 넘어가기보다 니콘의 후속기를 보고 결정하겠다는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수 년 후에 발매된 D2h는 캐논1D에도 성능이 크게 미달하는 망작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캐논이 언론사의 니콘 장비를 되사주는 마케팅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결정타였다.[19] 그 결과 거의 모든 언론사가 캐논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렇게 한번 바뀐 마운트는 비슷비슷한 성능인 채로는 바뀌지 않으므로 니콘은 'D3'가 나올 때까지 10년 가까이 길고 어두운 터널을 걷게 된다.
플래그십에서 밀려버리자 중급기와 보급기에서의 싸움도 쉽지 않았다. D100에 이어 보급기 D70, D50이 성공하고, D200과 D80 역시 인기를 얻는 등 개별 모델은 분전을 펼쳤지만, 캐논에 비해 발표 간격이 긴 것이 약점이었다.[20] 마치 티거 전차를 비롯한 독일군 무기의 성격과 비슷했다. 더구나 2000년대 캐논은 또다른 이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EF마운트로 전환한 후 고급 렌즈를 먼저 현대적인 컴퓨터 설계로 리뉴얼하였기 때문에 같은 시기 리뉴얼되지 않은 구형의 니콘 고급 렌즈보다 화질이 좋았던 것이다. 가령 화질에 민감한 웨딩포토업계는 90년대부터 이미 부케가 예쁘게 나오는 캐논으로 넘어가 있었다.
반격의 시기는 2007년에 돌아왔다. D2h에서 자체 개발 센서 LBCAST로 쓴 맛을 보았던 니콘이지만, 자체 개발의 의욕을 버리지 않고 또 다른 센서팀을 가동하고 있었다.[21] 이들은 굉장히 절묘한 밸런스의 센서를 만들게 되는데, 35mm 풀사이즈이면서도 비교적 낮은 화소수로 안정적인 저노이즈를 달성한 것이다. 당시까지 디지털은 높은 화소수에 따른 처리속도가 병목이었기 때문에, 플래그십은 화소수가 낮지만 연사 속도가 빠른 보도용 카메라와 연사는 느리지만 화소수가 높은 스튜디오용 카메라로 이분되고 있었다.[22] 이 이분법을 받아들인 캐논은 1.3x 크롭사이즈와 중간 화소수의 고속연사 1D 모델과 35mm 풀사이즈 및 높은 화소수의 고화질 1Ds 모델을 내놓고 있었다. 즉 센서를 35mm 풀사이즈로 하는 한 화소가 많아져 보도사진에 쓸 만큼 고속연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D3'의 센서는 그 허를 찔러 35mm 풀사이즈이면서도 화소수를 확 낮춰버려 고속연사와 저노이즈 고화질을 달성, 보도사진에 있어서는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밸런스를 달성한 것이다.
D3에 비하면 1D는 크롭화각과 화질에서 떨어지고, 1Ds는 연사속도에서 떨어졌다. 캐논 입장에서는 대응 제품이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23] 일선 기자들 사이에서 호평이 나오면서 다시 니콘으로 넘어가는 언론사들이 나왔고, 니콘은 점유율을 상당 부분 탈환할 수 있게 되었다. 국내의 경우 스포츠 사진기자들은 거의 전부 니콘으로 넘어갔고 일반 사진기자들도 반 가까이 니콘으로 넘어갔다. 뿐만 아니라 웨딩 사진에 있어서도 최고급 스튜디오들은 니콘으로 넘어갔다. 물론 동네사진관들이나 결혼식장 사진관들은 여전히 캐논을 쓰고 있다. 디지털이 어느 정도 일반화되기 시작한 시기에 DSLR을 구입한 곳들이고 기변의 필요성이 적기 때문. 다만 최고급 웨딩사진에서 선호도는 한일 차이도 조금 있는데, 일본은 우치다 사진관 등이 여전히 캐논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급기 시장에서도 'D300'은 플래그십에 맞먹는 고성능을 집어넣어 히트를 쳤다. 캐논의 두 자릿수 바디는 가격을 좀 더 낮추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D300이 더 우위를 가져갔다.
또한 이 시기에 즈음해서 과거의 렌즈들을 현대 컴퓨터 설계로 리뉴얼하고 있었다. 새로 나온 14-24는 터무니없이 압도적인 성능으로 큰 화제가 되었는데, 발표 당시의 "해당 화각의 어떠한 단 렌즈보다 우수하다"라는 발언이 사실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캐논의 24mm 단초점 L렌즈보다 훨씬 선명한 사진을 보여주어 충격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리고 렌즈의 리뉴얼에 따라 Nikkor 브랜드를 NIKKOR 브랜드로 변경했다(…).
2008년 전 세계 DSLR 시장의 35~40%를 꾸준히 차지하고 있으며, 전체 카메라 시장의 점유율은 6~8%.
DSLR이 아닌 소위 똑딱이 디카의 여명기(2000년대 초반)에는 '쿨픽스 시리즈'로 시장을 선도하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쿨픽스 900'에서 시작하여, 950, 990, 995 등으로 진화했던 렌즈부와 본체가 수납 시에는 일체형이었다가 촬영 시 90도 회전하는 형태의 900 시리즈들은 당시 우수한 화질로 호평을 받았다.
유사한 컨셉이지만, 소형 경량으로 휴대성을 중시한 쿨픽스 2500의 경우, 셀프 사진을 중시하던 당시 취향에 잘 부합하여 한때 국민 디카로 사랑받았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 후에는 DSLR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쪽에는 투자할 여력이 없었는지, 현재의 쿨픽스 시리즈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듣보잡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하위 기종들은 OEM 생산품이라는 의혹이 매우 짙다.
하지만 파나소닉의 하이엔드 광각줌렌즈의 'LX-3'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다시 똑딱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미러리스 카메라가 시장에 폭풍을 일으키자, 니콘도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P7100' 같은 하이엔드 똑딱이를 내놓더니 결국 2011년 9월 미러리스 카메라 마운트를 정식 발표했다. 자세한 내용은 Nikon 1 참조. 다만 이것 자체는 실패한 접근법이 되어, 2018년 Nikon 1 을 완전히 포기하고 Nikon Z로 넘어갔다.
2012년 출시한 D600이 품질 문제를 일으켰다. 전부 D610으로 교체하고 마무리 지은 상태.
2017년 기준 니콘이 최대 위기를 맞은 상황이다. 부도 위기인데, 일단 연초에 희망 퇴직으로 무려 1,000명을 퇴직시켰고[24], 변화하는 시장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많은 유저들이 이탈해 버리는 등 심각하다. 가장 큰 원인은 캐시카우였던 DSLR의 시장이 쇠락 중인데 이를 대체할 제품군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소니나 올림푸스처럼 기존 렌즈 라인업을 버리고 새로운 시스템으로 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렇다고 시그마나 캐논처럼 기존 렌즈 라인업을 활용한 미러리스를 만들기에 F 마운트는 너무 낡았고, 기술적 난이도도 캐논과 시그마의 전자식 접점에 비해 상당히 높다. 여러 군데 팔렸던 펜탁스도 DSLR만 만들며 명맥을 이어가는 듯 하지만, 현 모기업 RICOH는 규모가 큰 데다가 나름 흑자를 기록 중이라, 니콘의 상황과는 조금 다르다. 마운트를 미러리스로 전환한다 쳐도, 라이브 뷰나 동영상 기술이 타사 제품들보다 몇 년 씩이나 뒤지는 지라 향후 라인업에 상당히 먹구름이 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CP+'에서 다른 회사들이 여러 신제품들을 공개할 때 니콘은 단순히 100주년 기념 바디 및 렌즈만 공개할 정도.[25] 더군다나 자이스와의 특허 전쟁 때문에 미국에서 카메라를 못팔 수도 있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특허 전쟁에 진다면 막대한 적자는 물론 ,자칫하면 사업을 접어야 할 수 있다. 아예 후지필름이 니콘 지분을 구입해서 니콘을 살리려고 한다는 기사가 나온 상황이니 얼마나 상황이 힘들어졌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렇듯 디지털에의 대응도 빨랐던 니콘이었으나, 그 다음 플래그십 모델을 실기하면서 그 위상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게 된다. 니콘 D1의 성공 이후 캐논이 야심차게 내놓은 '1D'는 D1을 크게 상회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렌즈와 주변장비를 구입한 언론사들로서는 다시 비용지출을 감수하며 캐논으로 넘어가기보다 니콘의 후속기를 보고 결정하겠다는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수 년 후에 발매된 D2h는 캐논1D에도 성능이 크게 미달하는 망작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캐논이 언론사의 니콘 장비를 되사주는 마케팅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결정타였다.[19] 그 결과 거의 모든 언론사가 캐논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렇게 한번 바뀐 마운트는 비슷비슷한 성능인 채로는 바뀌지 않으므로 니콘은 'D3'가 나올 때까지 10년 가까이 길고 어두운 터널을 걷게 된다.
플래그십에서 밀려버리자 중급기와 보급기에서의 싸움도 쉽지 않았다. D100에 이어 보급기 D70, D50이 성공하고, D200과 D80 역시 인기를 얻는 등 개별 모델은 분전을 펼쳤지만, 캐논에 비해 발표 간격이 긴 것이 약점이었다.[20] 마치 티거 전차를 비롯한 독일군 무기의 성격과 비슷했다. 더구나 2000년대 캐논은 또다른 이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EF마운트로 전환한 후 고급 렌즈를 먼저 현대적인 컴퓨터 설계로 리뉴얼하였기 때문에 같은 시기 리뉴얼되지 않은 구형의 니콘 고급 렌즈보다 화질이 좋았던 것이다. 가령 화질에 민감한 웨딩포토업계는 90년대부터 이미 부케가 예쁘게 나오는 캐논으로 넘어가 있었다.
반격의 시기는 2007년에 돌아왔다. D2h에서 자체 개발 센서 LBCAST로 쓴 맛을 보았던 니콘이지만, 자체 개발의 의욕을 버리지 않고 또 다른 센서팀을 가동하고 있었다.[21] 이들은 굉장히 절묘한 밸런스의 센서를 만들게 되는데, 35mm 풀사이즈이면서도 비교적 낮은 화소수로 안정적인 저노이즈를 달성한 것이다. 당시까지 디지털은 높은 화소수에 따른 처리속도가 병목이었기 때문에, 플래그십은 화소수가 낮지만 연사 속도가 빠른 보도용 카메라와 연사는 느리지만 화소수가 높은 스튜디오용 카메라로 이분되고 있었다.[22] 이 이분법을 받아들인 캐논은 1.3x 크롭사이즈와 중간 화소수의 고속연사 1D 모델과 35mm 풀사이즈 및 높은 화소수의 고화질 1Ds 모델을 내놓고 있었다. 즉 센서를 35mm 풀사이즈로 하는 한 화소가 많아져 보도사진에 쓸 만큼 고속연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D3'의 센서는 그 허를 찔러 35mm 풀사이즈이면서도 화소수를 확 낮춰버려 고속연사와 저노이즈 고화질을 달성, 보도사진에 있어서는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밸런스를 달성한 것이다.
D3에 비하면 1D는 크롭화각과 화질에서 떨어지고, 1Ds는 연사속도에서 떨어졌다. 캐논 입장에서는 대응 제품이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23] 일선 기자들 사이에서 호평이 나오면서 다시 니콘으로 넘어가는 언론사들이 나왔고, 니콘은 점유율을 상당 부분 탈환할 수 있게 되었다. 국내의 경우 스포츠 사진기자들은 거의 전부 니콘으로 넘어갔고 일반 사진기자들도 반 가까이 니콘으로 넘어갔다. 뿐만 아니라 웨딩 사진에 있어서도 최고급 스튜디오들은 니콘으로 넘어갔다. 물론 동네사진관들이나 결혼식장 사진관들은 여전히 캐논을 쓰고 있다. 디지털이 어느 정도 일반화되기 시작한 시기에 DSLR을 구입한 곳들이고 기변의 필요성이 적기 때문. 다만 최고급 웨딩사진에서 선호도는 한일 차이도 조금 있는데, 일본은 우치다 사진관 등이 여전히 캐논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급기 시장에서도 'D300'은 플래그십에 맞먹는 고성능을 집어넣어 히트를 쳤다. 캐논의 두 자릿수 바디는 가격을 좀 더 낮추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D300이 더 우위를 가져갔다.
또한 이 시기에 즈음해서 과거의 렌즈들을 현대 컴퓨터 설계로 리뉴얼하고 있었다. 새로 나온 14-24는 터무니없이 압도적인 성능으로 큰 화제가 되었는데, 발표 당시의 "해당 화각의 어떠한 단 렌즈보다 우수하다"라는 발언이 사실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캐논의 24mm 단초점 L렌즈보다 훨씬 선명한 사진을 보여주어 충격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리고 렌즈의 리뉴얼에 따라 Nikkor 브랜드를 NIKKOR 브랜드로 변경했다(…).
2008년 전 세계 DSLR 시장의 35~40%를 꾸준히 차지하고 있으며, 전체 카메라 시장의 점유율은 6~8%.
DSLR이 아닌 소위 똑딱이 디카의 여명기(2000년대 초반)에는 '쿨픽스 시리즈'로 시장을 선도하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쿨픽스 900'에서 시작하여, 950, 990, 995 등으로 진화했던 렌즈부와 본체가 수납 시에는 일체형이었다가 촬영 시 90도 회전하는 형태의 900 시리즈들은 당시 우수한 화질로 호평을 받았다.
유사한 컨셉이지만, 소형 경량으로 휴대성을 중시한 쿨픽스 2500의 경우, 셀프 사진을 중시하던 당시 취향에 잘 부합하여 한때 국민 디카로 사랑받았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 후에는 DSLR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쪽에는 투자할 여력이 없었는지, 현재의 쿨픽스 시리즈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듣보잡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하위 기종들은 OEM 생산품이라는 의혹이 매우 짙다.
하지만 파나소닉의 하이엔드 광각줌렌즈의 'LX-3'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다시 똑딱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미러리스 카메라가 시장에 폭풍을 일으키자, 니콘도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P7100' 같은 하이엔드 똑딱이를 내놓더니 결국 2011년 9월 미러리스 카메라 마운트를 정식 발표했다. 자세한 내용은 Nikon 1 참조. 다만 이것 자체는 실패한 접근법이 되어, 2018년 Nikon 1 을 완전히 포기하고 Nikon Z로 넘어갔다.
2012년 출시한 D600이 품질 문제를 일으켰다. 전부 D610으로 교체하고 마무리 지은 상태.
2017년 기준 니콘이 최대 위기를 맞은 상황이다. 부도 위기인데, 일단 연초에 희망 퇴직으로 무려 1,000명을 퇴직시켰고[24], 변화하는 시장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많은 유저들이 이탈해 버리는 등 심각하다. 가장 큰 원인은 캐시카우였던 DSLR의 시장이 쇠락 중인데 이를 대체할 제품군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소니나 올림푸스처럼 기존 렌즈 라인업을 버리고 새로운 시스템으로 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렇다고 시그마나 캐논처럼 기존 렌즈 라인업을 활용한 미러리스를 만들기에 F 마운트는 너무 낡았고, 기술적 난이도도 캐논과 시그마의 전자식 접점에 비해 상당히 높다. 여러 군데 팔렸던 펜탁스도 DSLR만 만들며 명맥을 이어가는 듯 하지만, 현 모기업 RICOH는 규모가 큰 데다가 나름 흑자를 기록 중이라, 니콘의 상황과는 조금 다르다. 마운트를 미러리스로 전환한다 쳐도, 라이브 뷰나 동영상 기술이 타사 제품들보다 몇 년 씩이나 뒤지는 지라 향후 라인업에 상당히 먹구름이 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CP+'에서 다른 회사들이 여러 신제품들을 공개할 때 니콘은 단순히 100주년 기념 바디 및 렌즈만 공개할 정도.[25] 더군다나 자이스와의 특허 전쟁 때문에 미국에서 카메라를 못팔 수도 있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특허 전쟁에 진다면 막대한 적자는 물론 ,자칫하면 사업을 접어야 할 수 있다. 아예 후지필름이 니콘 지분을 구입해서 니콘을 살리려고 한다는 기사가 나온 상황이니 얼마나 상황이 힘들어졌는지 잘 알 수 있다.#
2017년 8월에 D850이라는 유래없는 괴물 스펙의 DSLR을 만들어내서 어느정도 버티고 있다. 그리고 2018년 8월 Z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미러리스 시장에 제대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다만, 미러리스 1위인 소니나 그 다음인 캐논에 비해 전반적으로 아쉬운 제품 완성도를 보였다.
한편 한국시장에서는 2020년 8월말 니콘이미징코리아가 2017년 당시 감원은 없을 거라고 언급한 것과 달리 직원 50%를 희망퇴직으로 감원하고 본사를 포스코센터에서 도심공항타워로 이전했다. 이 때 니콘인스트루먼트도 같이 이전하여 합병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이후 엔트리 모델인 Z 5를 선보였으나 발매 당시엔 Z 6의 오픈마켓 가격과 비슷하여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상위 기종인 Z 6만큼의 완성도, 급나누기로 인한 하드웨어 성능 격차가 심하지 않았고 수요 대비 공급이 많아 저렴한 가성비로 떠올라서 재평가되기도 했다. 2021년 10월에는 Z 시리즈 최초의 플래그십 풀프레임 미러리스 'Z 9'을 선보이면서 기존 니콘 제품들에서 아쉬움을 느꼈던 부분들이 해소되면서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보였다.
소니, 캐논도 지속적으로 신제품을 출시하고 있고 니콘은 두 회사 대비 상급·중급기에서 여전히 아쉬운 모습이 있어서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다. 특히 미러리스로 넘어오면서 카메라도 이제 사진보다 영상에 힘을 많이 쏟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니콘은 많이 밀리는 형국이다. 이 부분에서 캐논이나 소니가 필름 시절부터 노하우가 있는 것과 대비된다.
2024년 RED를 인수하며 영상 분야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한 것에 비춰볼 때, SLR/DSLR 시대 대비 많이 뒤처진 시점에서 경쟁하고 있지만 미러리스 시장에서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국시장에서는 2020년 8월말 니콘이미징코리아가 2017년 당시 감원은 없을 거라고 언급한 것과 달리 직원 50%를 희망퇴직으로 감원하고 본사를 포스코센터에서 도심공항타워로 이전했다. 이 때 니콘인스트루먼트도 같이 이전하여 합병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이후 엔트리 모델인 Z 5를 선보였으나 발매 당시엔 Z 6의 오픈마켓 가격과 비슷하여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상위 기종인 Z 6만큼의 완성도, 급나누기로 인한 하드웨어 성능 격차가 심하지 않았고 수요 대비 공급이 많아 저렴한 가성비로 떠올라서 재평가되기도 했다. 2021년 10월에는 Z 시리즈 최초의 플래그십 풀프레임 미러리스 'Z 9'을 선보이면서 기존 니콘 제품들에서 아쉬움을 느꼈던 부분들이 해소되면서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보였다.
소니, 캐논도 지속적으로 신제품을 출시하고 있고 니콘은 두 회사 대비 상급·중급기에서 여전히 아쉬운 모습이 있어서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다. 특히 미러리스로 넘어오면서 카메라도 이제 사진보다 영상에 힘을 많이 쏟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니콘은 많이 밀리는 형국이다. 이 부분에서 캐논이나 소니가 필름 시절부터 노하우가 있는 것과 대비된다.
2024년 RED를 인수하며 영상 분야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한 것에 비춰볼 때, SLR/DSLR 시대 대비 많이 뒤처진 시점에서 경쟁하고 있지만 미러리스 시장에서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공정에 핵심적인 액침노광 특허를 침해했다면서 네덜란드의 ASML를 고소하여 오랜 법정 다툼 중에 있었다. 위에 언급된 독일의 자이스와의 공방도 그 맥락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2001년부터 관련된 법정 공방이 시작되었는데, ASML과 특허공유로 합의하였으나 2009년 특허 공유가 만료된 이후에도, ASML이 계속 자사의 기술을 남용한다며[26] 다시 소송을 낸 상황이다. 그러나 원천 기술을 가진 니콘은 이미 시장에서 거의 도태된 것이 현실이며[27], 2018년에는 ASML, 자이스와의 소송에서 끝내 패한 것도 모자라 특허도 무효가 될 상황에 처했다. 반면 ASML은 반도체공정 미세화에 힘입어 독점 수준으로 시장을 장악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중.
그러다가 2019년 1월, 자이스-ASML-니콘 3사간의 10년 짜리 특허 공유 계약이 합의되면서 일단 특허 전쟁은 막을 내린 상황이다. 자이스와 ASML이 니콘에 약 1900억원을 일시금으로 지급하고, 이후 3사는 10년 동안 해당 기술이 들어간 제품 매출액의 0.8%에 해당하는 로열티를 서로에게 지급한다는 내용이며, 이로써 관런된 모든 국제소송들과 고발들을 취하하게 되었다. 결국 원천기술을 가진 니콘에게 어느 정도 유리하게 협상이 이뤄진 셈. 쌍방 로열티라는 애매한 합의에도 그런 평가가 나오는 사유는, 그만큼 니콘의 시장 점유율이 낮아서 ASML에게 낼 돈보다 받을 돈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EUV로의 세대교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이며 ASML은 근 25년간 니콘의 기술로 돈을 벌만큼 번 반면, 니콘은 EUV 시장에 안착을 실패했기 때문에 승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최근 소송에서 패소하는 등 암울한 상황에 비춰볼 때 생각보다 선방했다는 정도가 맞을 듯하다. 물론 액침노광 기술이 근시일 안에 구식 기술로 전락할 것 같지는 않지만.
또다른 소소한 소송이 하나 더 있는데, RED와 벌이던 RAW 포맷에 대한 특허권 소송도 레드를 인수합병하며 종료하게 되었다. 인수비용도 비교적 저렴한 편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다가 2019년 1월, 자이스-ASML-니콘 3사간의 10년 짜리 특허 공유 계약이 합의되면서 일단 특허 전쟁은 막을 내린 상황이다. 자이스와 ASML이 니콘에 약 1900억원을 일시금으로 지급하고, 이후 3사는 10년 동안 해당 기술이 들어간 제품 매출액의 0.8%에 해당하는 로열티를 서로에게 지급한다는 내용이며, 이로써 관런된 모든 국제소송들과 고발들을 취하하게 되었다. 결국 원천기술을 가진 니콘에게 어느 정도 유리하게 협상이 이뤄진 셈. 쌍방 로열티라는 애매한 합의에도 그런 평가가 나오는 사유는, 그만큼 니콘의 시장 점유율이 낮아서 ASML에게 낼 돈보다 받을 돈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EUV로의 세대교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이며 ASML은 근 25년간 니콘의 기술로 돈을 벌만큼 번 반면, 니콘은 EUV 시장에 안착을 실패했기 때문에 승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최근 소송에서 패소하는 등 암울한 상황에 비춰볼 때 생각보다 선방했다는 정도가 맞을 듯하다. 물론 액침노광 기술이 근시일 안에 구식 기술로 전락할 것 같지는 않지만.
또다른 소소한 소송이 하나 더 있는데, RED와 벌이던 RAW 포맷에 대한 특허권 소송도 레드를 인수합병하며 종료하게 되었다. 인수비용도 비교적 저렴한 편으로 알려져있다.
- 니콘 S1
- 니콘 S2
- 니콘 S3
- 니콘 S4
- 니콘 SP
- 니콘 D 시리즈 참조
- 니콘 쿨픽스 시리즈 참조
1970년대 후반부터 NASA와 계약하여 스페이스 셔틀용, 우주정거장용, 달탐사용(!) 등 특수 목적 우주 카메라를 공급했다. 여기에는 강한 내구성뿐만 아니라, 작동 중 미세한 불꽃을 일으키거나 가스를 발생시키면 안 되는 등 까다로운 제약도 충족하고, 렌즈는 태양광을 직접 쬐어도 플레어를 억제해야 한다는 요구에도 대응한다. 이 중 디지털백을 부착한 F4 NASA 버전은 세계 최초 DSLR이기도 하다. 니콘으로 수많은 멋진 EVA 사진들이 촬영되었으며 오늘날 ISS에서도 니콘 카메라를 사용한다. 척박한 환경에서 쓰는 군용 카메라도 니콘제가 많다. 이들 역시 베이스는 F3.
- Nikon S-100 : 니콘 슈퍼 8 기종 기반으로 한 비디오 카메라.
- Nikon QV-1000C : 니콘 SVC 프로토타입 이후 나온 기종. 스틸 이미지 카메라이며 대략 200대 정도밖에 생산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아남정밀을 통하여 필름전송기(필름스캐너) NT-2000A와 같이 들여왔다.
- 모기업 미쓰비시그룹은 일본제국 전범기업들 중 강제징용자(징용공)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사과와 배상 문제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논란과 비판이 많은 곳이다. 2019년 한일 무역 분쟁으로 일본 전범기업은 물론, 전범기업이 아닌 일본 기업들의 제품들 자체를 사지 않겠다는 2019년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한국 내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당연히 전쟁 시절 납품한 니콘 역시 피해야 할 전범기업으로 국내 커뮤니티서 찍혔고 휘청거렸다.
- 2012년 일본군 위안부 사진전 일방 취소 통보 논란도 있다. 사진작가 안세홍은 2012년 6월 오사카에서 위안부를 주제로 한 사진전을 열기 위해 니콘의 전시장인 '니콘 살롱'을 사용하기로 2011년 12월 계약했었으나 니콘이, 불과 전시 한 달 전에 "위안부 사진전에는 장소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여 논란이 있었다. 이에 안씨는 소송을 걸었고 (15년 1월 22일), 이에 도쿄지방재판소는 “니콘이 사진전 장소 제공을 약속했다가 일방적으로 거부한 것은 표현 활동의 기회를 빼앗는 것으로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며 니콘 사는 안세홍에게 110만엔(약 107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계약을 이행하라는 재판부의 결정에 오사카 전시회는 기존에 1대였던 CCTV를 10대로 추가 설치하고 입구에 보안검색대를 설치했으며 직원 6명을 배치해 언론사의 출입을 막는 등 온갖 방해공작을 펼쳤다.
1986년 아남정밀을 통해 진출하였으며 1993년 아남정밀이 부도가 나자 아남산업이 니콘의 모든 국내권리를 인수하였다. 그러다 아남인스트루먼트로 권리가 넘어갔고 아남인스트루먼트의 광학사업부문이 아남옵틱스로 분리되어 니콘 카메라의 국내판매를 맡게 되었으나 2005년 니콘이미징코리아로 국내에 직진출하여 아남옵틱스로부터 니콘의 모든 국내권리를 넘겨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추가로 반도체/디스플레이의 노광장비를 서비스하는 니콘프레시전코리아도 존재한다. ASML에 모든 점유율을 빼앗겨서 문제지만..
추가로 반도체/디스플레이의 노광장비를 서비스하는 니콘프레시전코리아도 존재한다. ASML에 모든 점유율을 빼앗겨서 문제지만..
[1] 일본 광학의 줄임말.[2] 1930년대에는 로고의 표기도 NIKKO였다. 갑자기 없던 N이 붙은것.[3] 영국에서는 니콘으로 발음한다.[4] 이는 현재의 DSLR, 미러리스 렌즈 이름에도 쓰이고 있다. 1960년대에 일본광학은 국제시장에 렌즈를 출시하는데 이미 렌즈를 팔고 있던 차이스 이콘과 이름이 비슷해 Nikkor이라는 이름을 썼고 이게 지금까지 굳어졌다. 한국 이용자들 중에는 NikKOR이라 그런지 '니콘 코리아'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는 듯.[5] 정신대,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 등을 포함하면 25,000명 가량 된다고 한다.[6] 어디서 툭 튀어나온게 아니라 Contax II 설계를 카피했다. [7] 로버트 카파가 생전 마지막으로 찍었던 사진도 이 카메라로 찍었다. 참고로 이때 카파는 Contax IIa 또한 사용중이었다.[8] 당시 던컨에게 니콘 렌즈를 소개한 사진 작가는 미키 준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은 LIFE 지에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진을 실은 일본 보도 사진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니콘의 아마추어 사진작가전의 '미키 준 상'이 그의 이름을 딴 것.[9] 세계 첫 번째 SLR 카메라는 펜탁스. 비공식적으론 옛 소련의 스뽀르뜨(스포츠)[10] 물론 F2, F3P, FM2, FA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11] 1985년 α-7000 발매[12] 렌즈 측에 모터가 탑재되었으며, 렌즈 아래로 전원부가 툭 튀어나온 그야말로 못생긴 형태.[13] 실제로 니콘은 렌즈에 박스가 붙은 AF렌즈의 프로토타입을 1971년에 선보인 적이 있다.[14] F3AF와 함께 발매된 전용 렌즈는 2종으로, 추가 렌즈를 발매하겠다는 언급이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즉 로드맵을 변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5] 코비카로도 알려져 있다. 셔터 부분(마미야와 제휴)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산화시킨 기종이기에 의미가 있다. 수출을 고려하여 초기형에는 테사 렌즈를 장착한 기종도 있다.[16] 최초의 100% 국산화 기종은 삼성 퍼지줌 10-50.(발매 당시가 55만원)[17] 세계 첫 번째 DSLR 카메라는 니콘 F3기반 '코닥 DCS-100'. 후지필름과 이후 x1.3배 크롭 센서로 출시한 기종이 E시리즈이다.[18] 색공간이 NTSC로 고정되어 있는 점 등.[19] 또한 캐논은 이렇게 되사들인 니콘 장비들을 중고시장에서 헐값에 풀어 니콘 중고시세를 폭락시켰다.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기였다.[20] 캐논은 코닥이 만든 CCD 계열에 대항해 CMOS 기술을 자체적으로 발전시켰다. 일반적으로 CMOS는 노이즈가 심해 화질이 중시되는 분야에는 CCD보다 불리하다고 여겨지고 있었지만, 노이즈 처리 기술을 정립함으로써 약점을 극복하였다. 자체 공장을 통해 원하는 사양의 센서를 원하는 시기에 조달할 수 있는 캐논은 제품발표 시기에서 유리한 입장이었다.[21] LBCAST 개발팀은 전원 해고. 한편 소니가 센서를 개발하고 니콘이 받아 쓴다는 식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니콘-소니 공동개발로 진행되는 것과 니콘 독자 설계로 진행되는 것 두 종류가 있으며, 전자의 경우 니콘의 기여가 있기 때문에 독점공급기간 이후 타사(미놀타 등)에 공급되면 니콘이 로열티를 받는다. D3의 센서는 니콘의 독자 설계이다.[22] 이러한 구분법을 먼저 제창한 것도 니콘이다. 비록 D2h가 망해버렸지만…[23] 이 상황은 1Dx가 나오는 2012년에야 해결된다. 거의 5년이 지나서야 화소수를 낮추면서 니콘의 콘셉트에 대응할 수 있게 된 것.[24] 말이 퇴직이자 해고다.[25] 그것도 성의 없이 100주년 마크만 붙여 놓은 게 고작이라, 니콘과 타 회사 제품 유저들 모두 어이없어 했다.[26] ASML 측은 니콘이 부르는 값이 너무 크다며 연장을 거부.[27] 90년대까지는 마땅한 해외 경쟁사가 없을 지경이었고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업계 점유율 40%대로 1위였으며 ASML은 캐논에도 뒤져 3위였으나 점점 뒤지기 시작하더니 EUVL로의 전환에 실패해서 이제는 저가 장비시장에서나 일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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