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소의 《오서》에 의하면, 누규는 어릴 때부터 야망이 크고 호전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평소 그는 "남자가 태어났으면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한 나라를 이루어 역사에 이름을 남겨야지!" 와 같은 말을 자주하며 큰 포부를 숨김없이 밝혔으나, 그의 친구들은 이런 그를 우습게 여겨 조롱하며 비웃었다고 한다.
누규는 죄인을 숨겨주고 타군으로 도주시킨 일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밤중에 담을 뛰어넘어 탈옥하였다. 이를 알게 된 관리들은 누규의 뒤를 쫓았지만, 누규는 오히려 "누규를 쫓아라!"라고 외치며 이들과 한패거리인듯 위장하여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1]
그는 젊어서부터 호전적이었으며 큰 야망을 가졌고, 이를 숨기지 않았던 그의 당당한 모습과 더불어 꾀를 써 일신을 보존하였던 일화를 미루어 보아 누규는 당대에 유행했던 임협이나 건달 무리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나라가 본격적으로 혼란스러워졌던 초평 연간(190년 ~ 193년)부터 누규는 그가 젊은 시절에 말했던 것처럼 무리를 모아 군벌로서 할거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그는 유표를 의지하였다.
이후 그의 행적은 왕충에 관련된 《위략》의 기록에서 잠시 언급되는데, 왕충은 삼보의 난[2]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인육을 먹으며 다른 무리들과 함께 남쪽으로 갔지만 누규가 형주(=유표)를 위해 이들을 맞아들이려 하자, 왕충은 이에 반발해 같이 온 무리들과 함께 누규를 공격했는데, 왕충은 총 일천 명의 군사들을 빼앗아 조조에게 귀부했다고 한다. 아마 195년 전후의 일일 것이다.
누규가 유표에게 의지했고, 형주(=유표)를 위해 형주 북쪽의 경계지역에서 북방의 객인들을 맞아들였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누규는 독자적인 세력이라기 보다는 유표를 따르던 형주 북방[3]의 유력자로서 관리일을 했던 것 같다. 즉, 남양군의 치안 및 거주민들의 생업을 돕고 중원에서 난을 피해 남하하는 인구들을 정착시키고 그들의 수를 조사해서 상부에 보고하는 일을 그가 맡았던 것이다. 제갈량의 본래 고향이 서주였던 만큼 당시 강하에는 중원에서 남하한 사람들에 의하여 인구가 크게 늘어났는데, 늘어나는 인구 수는 세수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니 호구수를 조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후의 행적은 불명확하나 그는 훗날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평소 그가 보였던 호전적인 협객의 모습과는 별개로 실무 능력이 매우 높게 평가되었는지 조조는 그를 중요한 계책을 의논하는 자리에 항상 참석시켰다. 다만 조조는 누규를 대장의 지위에 임명했으되 그에게 병사들을 인솔할 수 있는 권력은 주지 않았다고 한다. 《오서》에 반복되어 언급되어 있듯, 조조는 누규의 야망을 눈치채어 그를 경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 조조가 형주를 치고자 남진하였을때, 유표가 병으로 죽자 뒤를 이은 유종은 채모를 비롯한 외척의 권세에 밀려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조조의 좌우에서는 모두 이것이 속임수라고 평했지만, 누규만은 형주가 싸울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였고, 조조는 누규의 의견에 따라 유종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나아가 누규는 조조가 서진하여 마초 등을 격파할 때도 여러차례 공을 세웠는데, 조조는 항상 "누자백의 계책은 나도 따라갈 수 없다." 며 탄식했다고 한다.
《조만전》에 따르면, 이때 누규는 추운 날씨를 이용해 모래로 둔덕을 쌓고 이것에 물을 뿌려 얼음성을 만드는 계책을 올려 하룻밤 사이에 요새를 구축하는데에 큰 공을 세웠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정사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때가 8월이었음을 근거로 들어 이와 같은 기록을 부정했다. 따라서 이는 조조도 어렵게 여기던 책략가로서의 누규의 능력이 과장되어 당대에 떠돌던 풍문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조조는 그를 우대하여 그에게 높은 봉록과 은상을 내렸다. 누규의 부유함은 상상 이상이었는데, 집에 천금을 쌓아둘 정도였다고 하며, 이에 조조는 "부귀함은 나와 같으나, 다만 그 권세가 나에게 미치지 못하는구나." 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후 누규는 조조를 따라 기주로 갔는데, 《위서》에 따르면 그는 조조가 아들과 유람하며 노는 것을 보고 "이 집안의 부모와 자식은 저렇게 노는구나."라고 주변에 말했다. 이것을 조조에게 일러바친 자가 있어 조조는 건방지다는 이유로 그를 처형했다.
그러나 《오서》의 기록에는 습수라는 사람이 "부자가 저렇게 노니 참 대단하구나."라고 말하자 누규가 평소 버릇을 못 버렸는지 "세상에 태어났으면 스스로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저 남을 지켜볼 뿐이라니!" 라고 탄식했다가 습수가 조조에게 그것을 말하자 주살당했다고 한다. 《오서》에 따르면 야망의 일단을 드러냈다가 이를 경계한 조조에게 주살당한 것이다.
누규는 죄인을 숨겨주고 타군으로 도주시킨 일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밤중에 담을 뛰어넘어 탈옥하였다. 이를 알게 된 관리들은 누규의 뒤를 쫓았지만, 누규는 오히려 "누규를 쫓아라!"라고 외치며 이들과 한패거리인듯 위장하여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1]
그는 젊어서부터 호전적이었으며 큰 야망을 가졌고, 이를 숨기지 않았던 그의 당당한 모습과 더불어 꾀를 써 일신을 보존하였던 일화를 미루어 보아 누규는 당대에 유행했던 임협이나 건달 무리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나라가 본격적으로 혼란스러워졌던 초평 연간(190년 ~ 193년)부터 누규는 그가 젊은 시절에 말했던 것처럼 무리를 모아 군벌로서 할거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그는 유표를 의지하였다.
이후 그의 행적은 왕충에 관련된 《위략》의 기록에서 잠시 언급되는데, 왕충은 삼보의 난[2]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인육을 먹으며 다른 무리들과 함께 남쪽으로 갔지만 누규가 형주(=유표)를 위해 이들을 맞아들이려 하자, 왕충은 이에 반발해 같이 온 무리들과 함께 누규를 공격했는데, 왕충은 총 일천 명의 군사들을 빼앗아 조조에게 귀부했다고 한다. 아마 195년 전후의 일일 것이다.
누규가 유표에게 의지했고, 형주(=유표)를 위해 형주 북쪽의 경계지역에서 북방의 객인들을 맞아들였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누규는 독자적인 세력이라기 보다는 유표를 따르던 형주 북방[3]의 유력자로서 관리일을 했던 것 같다. 즉, 남양군의 치안 및 거주민들의 생업을 돕고 중원에서 난을 피해 남하하는 인구들을 정착시키고 그들의 수를 조사해서 상부에 보고하는 일을 그가 맡았던 것이다. 제갈량의 본래 고향이 서주였던 만큼 당시 강하에는 중원에서 남하한 사람들에 의하여 인구가 크게 늘어났는데, 늘어나는 인구 수는 세수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니 호구수를 조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후의 행적은 불명확하나 그는 훗날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평소 그가 보였던 호전적인 협객의 모습과는 별개로 실무 능력이 매우 높게 평가되었는지 조조는 그를 중요한 계책을 의논하는 자리에 항상 참석시켰다. 다만 조조는 누규를 대장의 지위에 임명했으되 그에게 병사들을 인솔할 수 있는 권력은 주지 않았다고 한다. 《오서》에 반복되어 언급되어 있듯, 조조는 누규의 야망을 눈치채어 그를 경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 조조가 형주를 치고자 남진하였을때, 유표가 병으로 죽자 뒤를 이은 유종은 채모를 비롯한 외척의 권세에 밀려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조조의 좌우에서는 모두 이것이 속임수라고 평했지만, 누규만은 형주가 싸울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였고, 조조는 누규의 의견에 따라 유종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나아가 누규는 조조가 서진하여 마초 등을 격파할 때도 여러차례 공을 세웠는데, 조조는 항상 "누자백의 계책은 나도 따라갈 수 없다." 며 탄식했다고 한다.
《조만전》에 따르면, 이때 누규는 추운 날씨를 이용해 모래로 둔덕을 쌓고 이것에 물을 뿌려 얼음성을 만드는 계책을 올려 하룻밤 사이에 요새를 구축하는데에 큰 공을 세웠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정사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때가 8월이었음을 근거로 들어 이와 같은 기록을 부정했다. 따라서 이는 조조도 어렵게 여기던 책략가로서의 누규의 능력이 과장되어 당대에 떠돌던 풍문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조조는 그를 우대하여 그에게 높은 봉록과 은상을 내렸다. 누규의 부유함은 상상 이상이었는데, 집에 천금을 쌓아둘 정도였다고 하며, 이에 조조는 "부귀함은 나와 같으나, 다만 그 권세가 나에게 미치지 못하는구나." 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후 누규는 조조를 따라 기주로 갔는데, 《위서》에 따르면 그는 조조가 아들과 유람하며 노는 것을 보고 "이 집안의 부모와 자식은 저렇게 노는구나."라고 주변에 말했다. 이것을 조조에게 일러바친 자가 있어 조조는 건방지다는 이유로 그를 처형했다.
그러나 《오서》의 기록에는 습수라는 사람이 "부자가 저렇게 노니 참 대단하구나."라고 말하자 누규가 평소 버릇을 못 버렸는지 "세상에 태어났으면 스스로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저 남을 지켜볼 뿐이라니!" 라고 탄식했다가 습수가 조조에게 그것을 말하자 주살당했다고 한다. 《오서》에 따르면 야망의 일단을 드러냈다가 이를 경계한 조조에게 주살당한 것이다.
옹주 경조윤 출신으로, 종남산에 숨어 살고 있는 '누자백' 또는 '몽매거사(夢梅居士)'라는 도호를 가진 사람으로 등장한다.
마초와의 전투에서 조조가 진채를 구축하는데 어려움을 겪자[4] 누규가 '학 같은 모습에 소나무 같은 자태를 하고 있는 신선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조금 있으면 날씨가 추워 질 것이니 모래로 성을 쌓고 물을 뿌려두면 얼음성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조조에게 간언한다.
이를 실행하여 큰 효과를 본 조조가 기뻐하며 상을 내리려고 하자, 누규는 거부하고 떠났다. 이후 그는 더 이상 출현하지 않는다.
위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감택과 더불어 정사와 연의의 내용이 상당히 다른 인물 중 하나다.
마초와의 전투에서 조조가 진채를 구축하는데 어려움을 겪자[4] 누규가 '학 같은 모습에 소나무 같은 자태를 하고 있는 신선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조금 있으면 날씨가 추워 질 것이니 모래로 성을 쌓고 물을 뿌려두면 얼음성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조조에게 간언한다.
이를 실행하여 큰 효과를 본 조조가 기뻐하며 상을 내리려고 하자, 누규는 거부하고 떠났다. 이후 그는 더 이상 출현하지 않는다.
위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감택과 더불어 정사와 연의의 내용이 상당히 다른 인물 중 하나다.
삼국지 10, 11 |
삼국지 12, 13, 14 |
삼국지 10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보통 조조가 감탄했다는 것과 얼음성 일화로 지력만은 80이상으로 나오나, 야망이 큰 데다 그걸 숨기지 못해 죽었기 때문에 매력은 매우 낮게 책정된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4/무력 19/지력 88/정치력 69/매력 8로 특기는 기술, 보수, 반목, 유인, 지리, 반박, 도발, 군사. 총 8개다. 기술 특기도 있고 군사 특기도 있기 때문에 약소세력이라면 여러모로 쓸 만하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2/무력 13/지력 87/정치력 67/매력 15이며 특기는 축성이다.
부장으로선 상급인 87의 지력에다 연노대 등을 한 턴만에 뚝딱뚝딱 지을 수 있는 축성이라는 좋은 특기를 가졌지만, 건설 수치를 좌우하는 정치력이 다소 아쉽다. 전투 중에 병력이 줄어들면 내구도 몇십 차이로 '건설 중'이 떠 버리면 참 난처하다. 능력 연구를 통해 정치력을 올려주기엔 나이 때문에 활약할 시간이 적은 것도 소소한 단점. 이는 군제개혁이나 해당 부대의 주장의 관직으로 많은 군사를 끌게 되면 어느 정도 보완이 가능하다. PK 하진포위망 시나리오에서 군주로 등장하는데, 부하인 괴량, 괴월의 능력치는 꽤 좋으나 문제가 본인의 매력이 20대도 안되니 능력연구로 매력 증가를 연구해 시급히 육성시키는 게 좋다. 혹은 육성해봐야 35가 끝인 매력은 버리고 통솔력을 75까지 키우는 방법도 있다. 어차피 행동력 회복량은 통솔력과 매력 중 높은 걸 따르는 데다 35이어도 여전히 사람 몫은 못 해내는 반면 통솔력 75면 축성용 보조부대로는 그럭저럭 쓸 만하기 때문.
삼국지 12에서의 일러스트는 얼음성 일화를 특징으로 잡아서 고드름을 들고 있으며 능력치는 통솔력 52/무력 13/지력 87/정치력 67이다. 전법은 잉여한 지력상승이지만 수집, 인맥이 있고 변설특기도 있으니 구인소에 배치하거나 외교에 사용하자. 정사에서의 행보를 봤을 때 상재와 군사 특기도 부여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전작과 같으며 특기는 상업 1 단 하나. 중신특성은 적중작적으로 전수특기도 당연히 상업이고 전법이 수비약화였지만 PK에서 금족으로 변경되었다. 조조를 도와 [[마초(삼국지 시리즈)|마초]를 격파할 수 있게 도와주었는데 설파, 언변, 공성, 견수 등의 특기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너무 아쉽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2, 무력 13, 지력 83, 정치력 67, 매력 11로 전작과 달리 지력이 4 하락했다. 개성은 언독, 축성, 오만, 주의는 명리, 정책은 공법개혁 Lv 4, 진형은 장사, 정란, 전법은 저지, 도발, 정란,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은 모두 없다.
삼국지 8 리메이크에서는 통솔력 58, 무력 40, 지력 82, 정치력 54, 매력 20이다.
정사을 반영하여 완을 근거지로 세력을 한 군주로 등장하며, 등장 역사 시나리오는 193년 ~ 211년이다. 193년부터 196년까지 누규군의 군주이고 이후로는 조조군 소속이며, 생몰년도는 143년 ~ 212년[5]으로 되어 있는데, 15세부터 성인으로 등장할 수 있지만 193년 이전에는 선택할 수 없다.
부하는 한 명도 없고 혼자만 있는 약한 세력으로 원술의 영토인 여남에 있는 인재들을 등용해야 하지만, 초반에는 무명이 낮아서 배원소, 주창, 요화 등은 만나주지 않고 서구를 등용해서 세력을 꾸려나가야 한다.
삼국지 조조전에서만 등장한다. 삼국지연의의 설정대로 선인으로 나오며 고유직업 선인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몽매거사란 호를 따서 지은 몽매라고만 나와서 누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도 원작대로 주인공 조조를 돕는 신선 같은 이미지로 나온다. 컨텐츠 이름 몽매의 시련 때문에 유저들한테는 악명이 높다.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도 원작대로 주인공 조조를 돕는 신선 같은 이미지로 나온다. 컨텐츠 이름 몽매의 시련 때문에 유저들한테는 악명이 높다.
조조에게 얼음성 제작비법을 알려주고 퇴장한다.
누규라는 이름 때문에 더 후의 피트 타운샌드로 등장한다. 정사를 반영하여 군벌 중 하나였다가 조조에게 귀부했다는 설정이 붙어 있으며, 거기에 더해 조조가 가장 싫어하는 촐싹 천재형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첫 등장한 위구 전투 (2)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위구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조조의 얼음 벽돌 계획을 발상은 좋지만 응용이 틀렸다고 말하고 모래성에 물만 뿌려서 완성할 수 있는 얼음 성의 계책을 말했다. 이후 조조에게 "역시 자백의 지혜는 내가 못따라간다니깐~"이라고 칭찬을 듣긴 했지만 직후 바로 잊혀졌다. 본인도 자기가 부각될 포인트가 후루룩 지나간 느낌이라고 말한 건 덤. 위구 전투 편 이후에는 등장이 없다.
위구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조조의 얼음 벽돌 계획을 발상은 좋지만 응용이 틀렸다고 말하고 모래성에 물만 뿌려서 완성할 수 있는 얼음 성의 계책을 말했다. 이후 조조에게 "역시 자백의 지혜는 내가 못따라간다니깐~"이라고 칭찬을 듣긴 했지만 직후 바로 잊혀졌다. 본인도 자기가 부각될 포인트가 후루룩 지나간 느낌이라고 말한 건 덤. 위구 전투 편 이후에는 등장이 없다.
[1] 삼국지연의의 복양 2차전에서 여포가 조조를 건드리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2] 이각과 곽사가 장안을 점령한 뒤 그들에 의한 형편없는 통치가 중앙에서 이루어지던 도중 그들이 정치적인 주도권 다툼을 일삼아 일대가 초토화된 사건으로, 30만 가구가 넘던 경조지역의 인구가 2년 사이에 사실상 전멸했다.[3] 누규의 고향인 남양군이 형주 북쪽 경계지역에 속한다.[4] 특히나 직전에 마초군과의 전투에게서 살아남겠다고 붉은 전포도 버리고 수염까지 잘랐건만 소용이 없자, 겨우 깃발을 찢어 턱을 싸매서 정체를 숨긴 뒤에야 도망칠 수 있었던지라 꽤나 침울한 상태였다. 이 때의 대굴욕은 나중에 장송이 조조가 서촉을 먹지 못할 인물이라 판단하고 놀릴 때 다시 언급된다.[5] 부자연사 판정을 받기 때문에 최소 219년까지 생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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