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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봉 관련 틀 |
출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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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제15대 대통령비서실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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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2월 8일 경상남도 마산부(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라전모방[6] 창업주인 아버지 노준용(盧峻容)과 어머니 제주 고씨[7] 고두성(高斗成)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8] 마산고등학교(12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9]에서 정치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브리검 영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 그리고 뉴욕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이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교수에 임용됐다. 전공은 국제정치사상으로 토크빌, 민족주의 등이 주요 연구 대상. 1970년대에는 신민당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에게 중도통합론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한 바 있다. 또 1987년 6.29 선언 완성 참여자이기도 하다.
1988년 "광주 사태는 김대중 씨의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정치 기술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라는 발언이 논란이 되면서 강경보수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추진 등의 배경까지 감안해 1988년 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외교담당특별보좌관에 임명됐다.
1990년 3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는 노태우 정부의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하며 내각제 개헌을 지지했고, 12월 27일 제22대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재야 현대사학자 임영태는 저서 <대한민국 50년사> 2권에서 노재봉 내각 출범을 노태우의 '마지막 카드'라고 평했는데, 전자는 내각제요, 후자는 내각제 실패를 대비한 마지막 후계포석이었다. 훗날 김윤환 의원도 후자에 대해 청와대가 노재봉을 강영훈 전 국무총리,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과 함께 대선후보로 고려했다고 말했다.
취임 후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 등의 재야 민주화세력에 대한 탄압이 격화됐다. 언론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좌경세력으로 몰아붙였고, 시위는 시종일관 강경진압이었다. 이로 인해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해 2월에는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10]이 터지면서 노태우 정권에 대한 의혹과 불신이 깊어지는 와중에 그는 5월 10일 KBS1 <시국 어떻게 풀 것인가>라는 특집 대담에서도 고압적 자세를 견지했다. 당시 사회자가 "노 총리가 들어선 이후 의원 외유 사건, 수서사건, 강경대 군 사건 등으로 시끄러운데, 그 자체만으로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묻자 노재봉은 "내각 사퇴가 시국 수습이라는 주장에 관해서는 행정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차원에선 모르겠으나 행정적 차원에선 물러날 체계가 아니다. 시끄러우니까 물러나라는데, 앞으로도 민주화 과정에서 시끄러운 일이 많으리라 생각한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노재봉의 총리 생명은 끝났다. 이런 발언으로 여론이 더 악화된 데다 학생들과 재야 세력까지 들고일어났으며, 여당인 민주자유당 내에서도 비판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민주계인 김수한 전 의원은 "퇴계로에서 시위 현장을 지켜보니 공안통치가 아닌 무법천지"라고 했으며, 그는 이기붕과 차지철까지 들먹이면서 "그런 사람들이 대통령을 모시지 않았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 하여 결국 노태우가 추진하려던 내각제는 물 건너갔고, 그로 인하여 같은 해 5월에 사퇴했다. 심지어 나중에는 상기한대로, 이철승의 중도통합론[11]이란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사람임이 밝혀지면서, 재평가할 여지조차 사라졌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문민정부 시기인 1995년 민자당을 탈당했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4위로 낙선했다.
2002년부터 3년간 서울디지털대학교 2대 총장을 지냈다.
2019년 디지털타임스 인터뷰에서 총리 재임 당시 서울시의 도시경관 정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때는 서울시가 총리 직속의 조직이었으니 이것저것 해 볼 수 있었다고. 전체적으로는 관료주의의 병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예로 든 이야기였다.
2020년 총선 부정선거 음모론에 동참하면서 각 신문에 자신의 이름을 건 광고를 내기도 했다.#
2020년 8월에는 성창경 기독자유통일당 대표의 유튜브 영상에 출연해서 문재인 대통령이 고려연방제 통일을 위한 북한의 포석이라고 주장했다.
2021년 10월 30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국가장에서 추도사 낭독을 했는데, 여기서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 등 정규육사 1기 졸업생들에게) 한국 정치는 우선 국방의식이 전혀 없는 난장판으로 인식됐던 것”이라며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통치 기능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였고, 1기 장교들의 숙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을런지도 모른다”고 말해 군부의 12.12 군사반란과 군사정권 탄생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 #, 영상
2024년 4월 23일, 혈액암 투병 중 향년 88세로 사망했다. # 여담으로 한덕수 국무총리가 빈소에 등장하여 조문을 하였다. #
귀국 이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교수에 임용됐다. 전공은 국제정치사상으로 토크빌, 민족주의 등이 주요 연구 대상. 1970년대에는 신민당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에게 중도통합론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한 바 있다. 또 1987년 6.29 선언 완성 참여자이기도 하다.
1988년 "광주 사태는 김대중 씨의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정치 기술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라는 발언이 논란이 되면서 강경보수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추진 등의 배경까지 감안해 1988년 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외교담당특별보좌관에 임명됐다.
1990년 3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는 노태우 정부의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하며 내각제 개헌을 지지했고, 12월 27일 제22대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재야 현대사학자 임영태는 저서 <대한민국 50년사> 2권에서 노재봉 내각 출범을 노태우의 '마지막 카드'라고 평했는데, 전자는 내각제요, 후자는 내각제 실패를 대비한 마지막 후계포석이었다. 훗날 김윤환 의원도 후자에 대해 청와대가 노재봉을 강영훈 전 국무총리,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과 함께 대선후보로 고려했다고 말했다.
취임 후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 등의 재야 민주화세력에 대한 탄압이 격화됐다. 언론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좌경세력으로 몰아붙였고, 시위는 시종일관 강경진압이었다. 이로 인해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해 2월에는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10]이 터지면서 노태우 정권에 대한 의혹과 불신이 깊어지는 와중에 그는 5월 10일 KBS1 <시국 어떻게 풀 것인가>라는 특집 대담에서도 고압적 자세를 견지했다. 당시 사회자가 "노 총리가 들어선 이후 의원 외유 사건, 수서사건, 강경대 군 사건 등으로 시끄러운데, 그 자체만으로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묻자 노재봉은 "내각 사퇴가 시국 수습이라는 주장에 관해서는 행정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차원에선 모르겠으나 행정적 차원에선 물러날 체계가 아니다. 시끄러우니까 물러나라는데, 앞으로도 민주화 과정에서 시끄러운 일이 많으리라 생각한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노재봉의 총리 생명은 끝났다. 이런 발언으로 여론이 더 악화된 데다 학생들과 재야 세력까지 들고일어났으며, 여당인 민주자유당 내에서도 비판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민주계인 김수한 전 의원은 "퇴계로에서 시위 현장을 지켜보니 공안통치가 아닌 무법천지"라고 했으며, 그는 이기붕과 차지철까지 들먹이면서 "그런 사람들이 대통령을 모시지 않았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 하여 결국 노태우가 추진하려던 내각제는 물 건너갔고, 그로 인하여 같은 해 5월에 사퇴했다. 심지어 나중에는 상기한대로, 이철승의 중도통합론[11]이란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사람임이 밝혀지면서, 재평가할 여지조차 사라졌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문민정부 시기인 1995년 민자당을 탈당했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4위로 낙선했다.
2002년부터 3년간 서울디지털대학교 2대 총장을 지냈다.
2019년 디지털타임스 인터뷰에서 총리 재임 당시 서울시의 도시경관 정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때는 서울시가 총리 직속의 조직이었으니 이것저것 해 볼 수 있었다고. 전체적으로는 관료주의의 병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예로 든 이야기였다.
2020년 총선 부정선거 음모론에 동참하면서 각 신문에 자신의 이름을 건 광고를 내기도 했다.#
2020년 8월에는 성창경 기독자유통일당 대표의 유튜브 영상에 출연해서 문재인 대통령이 고려연방제 통일을 위한 북한의 포석이라고 주장했다.
2021년 10월 30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국가장에서 추도사 낭독을 했는데, 여기서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 등 정규육사 1기 졸업생들에게) 한국 정치는 우선 국방의식이 전혀 없는 난장판으로 인식됐던 것”이라며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통치 기능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였고, 1기 장교들의 숙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을런지도 모른다”고 말해 군부의 12.12 군사반란과 군사정권 탄생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 #, 영상
2024년 4월 23일, 혈액암 투병 중 향년 88세로 사망했다. # 여담으로 한덕수 국무총리가 빈소에 등장하여 조문을 하였다. #
[1] 해은공파 30세 재(在) 항렬.[2] 국무총리 서리 수행. (1990년 12월 27일 ~ 1991년 1월 22일)[3] 라전모방 창업주로, 1965년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에서 창업한 이래 '나전텍스'라는 브랜드로 한동안 제일모직과 함께 고급 양복지 사업에서 이름을 날렸으나, 1970년대 이후 경쟁사들의 협공에 1980년대 초부터 공해문제로 사정이 안 좋아져 1983년 남재우에게 회사를 넘겼다. 어떤 사람들은 노재봉의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악질고문형사인 노덕술이라고 주장하나, 근거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4] 장흥백파 고두성(高斗成)의 딸이다.[5] #[6] 아버지 노준용의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 나전리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7] 장흥백파[8] 1977년 9월 대전 회상사에서 발행된 광주노씨세보 58쪽 참조.[9] 53학번 입학동기인 지연월과 결혼하였다.[10] 통칭, 수서 비리라고 하던 그 사건이다.[11] 말이 중도통합론이지, 여당인 민주공화당에 유화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관제야당이 되자는 소리였다. 김영삼을 비롯한 다른 민주인사들에게 사쿠라라는 소리까지 들었다.[12]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비례대표제로 개칭[13] 95.2.27: 민주자유당 탈당으로 인한 의원직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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