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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의 건저의 사건을 계기로 분화되었다. 홍문관에서 정철을 탄핵하는 차자를 올리려 할때 부제학인 김수가[16] 사성인 우성전의 집에 찾아가 의논하느라 결국 올리지 못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우성전과 사이가 안좋았던 대사간 홍여순이 이성중과 우성전을 정철의 무리라며 탄핵해, 결국 북인과 남인이 갈라서게 되었다. 흔히 정철의 처벌 문제를 놓고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섰다고 알려졌으나, 남인이라고 해서 정철에 우호적일 리가 없었다. 애당초 양천경의 친족인 기효증에게 최영경에 대한 무고의 배후가 정철이라는 것을 밝히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한 인물이 김성일이다.
초기 남인의 주요 인물로는 유성룡, 이원익, 이덕형, 김성일[17] 등 왜란 당시 전시 행정부를 이끈 주역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집권 여당이었고 향촌 기반이 있는 동부 경북 및 동부 경남이 왜란 때 완전히 짓밟혀 버린지라 의병 활동보다는 조정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한편 이순신의 경우 본인은 순수 무관이고 정치적으로도 중립을 지켰으나, 유성룡과의 깊은 친분 때문에 당대에는 남인으로 취급받았다.
초기 남인의 주요 인물로는 유성룡, 이원익, 이덕형, 김성일[17] 등 왜란 당시 전시 행정부를 이끈 주역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집권 여당이었고 향촌 기반이 있는 동부 경북 및 동부 경남이 왜란 때 완전히 짓밟혀 버린지라 의병 활동보다는 조정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한편 이순신의 경우 본인은 순수 무관이고 정치적으로도 중립을 지켰으나, 유성룡과의 깊은 친분 때문에 당대에는 남인으로 취급받았다.
- 유성룡, 윤두수, 정철, 유홍, 최흥원, 이양원 등의 서인, 남인 연립 전시 내각: 임진왜란 발발 (1592년), 유성룡의 영의정 제수 (1593년) ~ 유성룡이 북인의 탄핵으로 사임 (1598년), 윤두수 역시 북인의 탄핵으로 사임 (1599년)[18]
임진난 이후 남북 분열이 확실시된 이후로는 별 다른 움직임은 없었고 북인 정권 내에서 뿌리가 같다는 이유로 서인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으며 조정에서 여러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광해군 때 대북의 날조로 일어난 옥사로 몰락하자 대북의 전횡에 대해서 깊은 불만을 품고 인조반정의 조짐이 보이는데도 방관하면서 사실상 서인들에게 동조했다.
그 결과 인조 반정 이후 서인 정권이 들어서자 이번에도 만년 야당으로서 조정에서 제법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관제야당으로 서인 정권의 들러리나 마찬가지여서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없었고 남인들의 불만은 고조되었지만 막강한 서인 정권에게 대들 만한 힘도 기회도 없었다. 한편 서인은 남인과 함께 하면서 북인 정권에서 실세였다거나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이 재기하면 정권을 견제할 가능성이 높다는 미명 하에 북인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이 과정에서 이이첨, 류희분, 등이 죽임을 당했고 박승종은 광해군에게 절의를 지키기 위해 아들 박자흥과 함께 자결했다. 중북 유몽인과 기자헌은 광해군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인조 정권에 출사하기를 거부했다가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처형 당했으며 임취정, 박홍구, 유효립 등은 광해군을 위한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서 처형되었다.
이렇게 북인 내의 실력자들과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이 사라지고 중북과 청소북이 남게되자 남인은 그 두 세력들을 흡수했으며 기존의 남인들은 대부분 중앙정치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에[20] 실제로는 청소북이 남인으로 간판만 바꿔단 것과 차이가 없다. 두 차례의 호란과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 이후 효종이 즉위할 즘에 서인 정권은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유계 등의 산당과 김육, 이시백과 이시방 형제, 정태화, 원두표 등으로 구성된 한당으로 대립하였다. 하지만 이는 훗날의 피터지는 권력 다툼과는 달리 다소 부드러운 것이었고 노골적인 충돌이랄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는 효종이 붕당 타파를 강력히 추진하던 시기로 당파를 내세우기가 뭣한 시기였다.
그 결과 인조 반정 이후 서인 정권이 들어서자 이번에도 만년 야당으로서 조정에서 제법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관제야당으로 서인 정권의 들러리나 마찬가지여서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없었고 남인들의 불만은 고조되었지만 막강한 서인 정권에게 대들 만한 힘도 기회도 없었다. 한편 서인은 남인과 함께 하면서 북인 정권에서 실세였다거나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이 재기하면 정권을 견제할 가능성이 높다는 미명 하에 북인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이 과정에서 이이첨, 류희분, 등이 죽임을 당했고 박승종은 광해군에게 절의를 지키기 위해 아들 박자흥과 함께 자결했다. 중북 유몽인과 기자헌은 광해군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인조 정권에 출사하기를 거부했다가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처형 당했으며 임취정, 박홍구, 유효립 등은 광해군을 위한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서 처형되었다.
이렇게 북인 내의 실력자들과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이 사라지고 중북과 청소북이 남게되자 남인은 그 두 세력들을 흡수했으며 기존의 남인들은 대부분 중앙정치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에[20] 실제로는 청소북이 남인으로 간판만 바꿔단 것과 차이가 없다. 두 차례의 호란과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 이후 효종이 즉위할 즘에 서인 정권은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유계 등의 산당과 김육, 이시백과 이시방 형제, 정태화, 원두표 등으로 구성된 한당으로 대립하였다. 하지만 이는 훗날의 피터지는 권력 다툼과는 달리 다소 부드러운 것이었고 노골적인 충돌이랄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는 효종이 붕당 타파를 강력히 추진하던 시기로 당파를 내세우기가 뭣한 시기였다.
서인과의 제대로 된 충돌이 터져나온 것은 효종이 갑자기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터진 예송논쟁이었다.
효종보다 어린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년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논쟁이 발생한 것인데(기해예송), 초기에는 효종이 차남이란 이유로 기년복으로 잠정 합의가 되었으나 남인 출신의 윤휴가 효종은 소현세자를 대신한 적장자로서 효종을 위해서 마땅히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송이 커졌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상복 입는 기간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졸곡이 끝나는 기간이라는 다소 두루뭉술한 기준을 적용시켰던 터라, 효종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1년 정도 입고 말자는 분위기여서 윤휴의 주장은 묻히는 듯 했다.[21]
그러나 뒤이어 남인의 거두 허목이 3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며 상소를 올리면서 기존의 기년복을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송준길의 반박에도 허목의 논리로 원두표 등이 허목 지지로 선회하는 등 분위기가 3년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송시열이 "체이부정" 논리로 정리를 하려고 했으나 윤선도가 강경한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논쟁은 다시 재격화가 되었다.
서인 산당이 장악한 삼사는 윤선도가 송시열을 역적으로 몰았다며 반좌의 율을 적용하여 윤선도를 사실상 죽일 것을 청했으나, 송시열 파의 강경 드라이브에 회의를 느낀 일부 산당과 한당 세력에서도 윤선도를 지지하는 상소가 나오는 등 조정이 시끄러워졌다. 결국 현종이 예송 금지를 명하고 기년복으로 상복을 결정지으면서 기해예송은 일단 마무리지어졌다. 기해예송은 이이의 이기일원론[22]과 이황의 이기이원론[23]간의 논쟁이기도 했다.
15년 뒤 2차 예송인 갑인 예송이 효종 비인 인선왕후가 죽으면서 벌어졌다. 이번에도 자의 대비는 살아있어서 오례의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해진 상복이었는데, 산당이 예조에서 효종을 위해 기년복을 입었으니 그 비를 위해서는 마땅히 대공복(9개월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을 고쳐 올리자 왕은 노하여 예조 당상들을 모조리 파직하고 이어서 기년복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영상 김수흥 등이 반발했으나 왕은 반대하는 신료들을 파직하고 3일 만에 기년복으로 상복을 정했다.
남인들이 신속하게 개입했으면 서인들을 역으로 몰아 처벌하고 정권을 잡을 수 있었겠지만 현종이 너무도 빨리 예송을 마무리지으면서 그럴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현종이 불과 2달 후 급사하고 세자 숙종이 즉위하면서 새로운 판국에 접어들었다. 불과 14살인 숙종은 부왕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송시열을 비롯하여 서인들을 대거 귀양보내거나 조정에서 몰아내고 남인에게 정권을 준 것이다. 게다가 남인이 집권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서인 내 비주류였던 한당세력의 도움도 한 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효종보다 어린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년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논쟁이 발생한 것인데(기해예송), 초기에는 효종이 차남이란 이유로 기년복으로 잠정 합의가 되었으나 남인 출신의 윤휴가 효종은 소현세자를 대신한 적장자로서 효종을 위해서 마땅히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송이 커졌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상복 입는 기간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졸곡이 끝나는 기간이라는 다소 두루뭉술한 기준을 적용시켰던 터라, 효종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1년 정도 입고 말자는 분위기여서 윤휴의 주장은 묻히는 듯 했다.[21]
그러나 뒤이어 남인의 거두 허목이 3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며 상소를 올리면서 기존의 기년복을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송준길의 반박에도 허목의 논리로 원두표 등이 허목 지지로 선회하는 등 분위기가 3년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송시열이 "체이부정" 논리로 정리를 하려고 했으나 윤선도가 강경한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논쟁은 다시 재격화가 되었다.
서인 산당이 장악한 삼사는 윤선도가 송시열을 역적으로 몰았다며 반좌의 율을 적용하여 윤선도를 사실상 죽일 것을 청했으나, 송시열 파의 강경 드라이브에 회의를 느낀 일부 산당과 한당 세력에서도 윤선도를 지지하는 상소가 나오는 등 조정이 시끄러워졌다. 결국 현종이 예송 금지를 명하고 기년복으로 상복을 결정지으면서 기해예송은 일단 마무리지어졌다. 기해예송은 이이의 이기일원론[22]과 이황의 이기이원론[23]간의 논쟁이기도 했다.
15년 뒤 2차 예송인 갑인 예송이 효종 비인 인선왕후가 죽으면서 벌어졌다. 이번에도 자의 대비는 살아있어서 오례의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해진 상복이었는데, 산당이 예조에서 효종을 위해 기년복을 입었으니 그 비를 위해서는 마땅히 대공복(9개월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을 고쳐 올리자 왕은 노하여 예조 당상들을 모조리 파직하고 이어서 기년복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영상 김수흥 등이 반발했으나 왕은 반대하는 신료들을 파직하고 3일 만에 기년복으로 상복을 정했다.
남인들이 신속하게 개입했으면 서인들을 역으로 몰아 처벌하고 정권을 잡을 수 있었겠지만 현종이 너무도 빨리 예송을 마무리지으면서 그럴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현종이 불과 2달 후 급사하고 세자 숙종이 즉위하면서 새로운 판국에 접어들었다. 불과 14살인 숙종은 부왕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송시열을 비롯하여 서인들을 대거 귀양보내거나 조정에서 몰아내고 남인에게 정권을 준 것이다. 게다가 남인이 집권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서인 내 비주류였던 한당세력의 도움도 한 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50년에 가까운 서인 정권에 종지부를 찍고 남인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다만 서인 정권이 종지부를 찍을 것은 징조가 보이던 일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경신대기근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송시열과 윤증-윤선거 부자의 대립과 산당-한당 대립으로 서인이 분열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 가지고는 정권교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경신대기근이 일어나면서 정치적 혼란이 가속화 되기 시작했고, 서인 정권은 이에 사치를 자제하는 것 등의 자구책을 내놓기도 하고, 척신세력과 함께 상대당을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이 상당히 가중되면서, 서인 정권의 레임덕이 시작된 듯 보인다. 그러나 당장 정권이 남인으로 교체되지는 않았고 서인이 3년 동안은 더 집권을 한다.
이때 남인의 수뇌부는 허적, 허목, 윤휴, 권대운, 민희, 목내선, 오시수, 김덕원, 오정창, 민암 등이 있었는데 서인 정권 밑에서 야당의 위치기는 하나 벼슬을 하며 비교적 잘 지낸 탁남과 서인에 맞서 예송을 주도한 청남으로 갈렸다. 윤휴, 허목, 오시수, 이원정, 홍우원 등은 청남이었고 허적, 유혁연, 권대운, 민희 등이 탁남의 영수였다. 탁남 쪽 인사들은 서인 정권에서 요직을 역임했던 경험이 있는 중진들이 많았고 반대로 청남 쪽 인사들은 일부를 제외하면 주로 서인들과 맞선 신진세력들이나 삼사에 포진한 대간들과 언관들이 많았다.
탁남은 정치적 변동을 크게 추구하지 않았지만 윤휴 등 청남은 북벌을 추구하는 등 여러모로 정권 교체에 따른 변화를 추구했다. 특히 대동법, 호포제 등의 세역 개혁안에 대해서는 윤휴와 허목 등의 인물 사이에 의견차가 있었는데, 윤휴는 대동법에 소극적인 대신 호포제를 추진하였고, 허목은 대동법에는 호의적이었으나 호포제에는 비판적이었다.[24] 노비제를 비롯한 사회 질서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오가작통제와 호패법 등을 강화하여 호구 파악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25]
이들은 송시열의 고묘를 주장하면서 협력하기도 했지만 권대운, 유혁연 등이 당시 맹렬하게 북벌을 주장하던 윤휴를 탄핵하거나 비난하고 허목 등이 허적을 탄핵하는 등 서로간의 공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1680년, 집권 6년만에 김석주가 허견의 역모를 밝혀내면서부터 시작된 경신환국으로 남인 정권은 축출되었다.[26] 역모 죄로 단박에 허적, 윤휴, 유혁연, 오시수, 이원정, 오정창 등 남인 정권의 수뇌부가 사사되면서 남인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야사에는 영상(영의정) 허적이 멋대로 유악을 가져다 써 숙종의 분노를 일으켰다는 유악 일화가 전해오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유악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고 허적을 처형할 때도 그의 죄목에는 유악 얘기가 없다. 어쨌든 권대운, 민암, 오정위, 민희, 홍우원 등 살아남은 수뇌부들도 야인이 되었고, 정권은 송시열, 김수항을 위시로 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9년 후 인현왕후 폐출과 장희빈 문제로 다시 남인에게 기회가 왔다. 숙종은 장희빈이 경종을 낳은지 돌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원자의 명호를 내리려 했는데, 송시열이 이를 반대하다가 삭직 문외출송되었다.[27]
또한 숙종은 송시열의 삭직에 동의하지 않은 도승지 이하 4명의 승지들과 대간들을 모조리 파직 및 체직한 후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 살아남은 남인의 영수들을 삼정승에 기용하면서 다시 남인 정권을 세우니 이가 바로 기사환국이다. 이번에는 청남, 탁남 할 것 없이 서인에게 관용이란 없었다. 탁남은 서인을 온건하게 대해쥤는데 허적을 죽게 만들고 은혜를 원수로 갚아 이를 가는 실정이였다. 청남 또한 원래 서인에 강경했는데 허견의 역모와 관련없는 윤휴와 유혁연을 사사하여 서인하면 찣어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청남이나 탁남 모두 할 것 없이, 서인에 대해 원한에 사무쳐 서인의 온건론을 버리고 강경하게 나갔다.[28]
단, 이 과정에서 남인도 원호(원자의 명호)지정과 인현왕후 민씨의 폐출만은 반대했다. 남인 역시 서인과 마찬가지로 '조금만 참고 용서하십시오', '여자들이 투기를 하는 건 원래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폐출할 이유까진 아닙니다', '(중전이) 스스로 반성하도록 기다려 보십시오'라며 숙종을 말렸다. 그만큼 숙종이 너무 막무가내로 나간 것.[29] 이로 보아서 재집권에 성공한 남인 정권도 초반기에는 상황을 잘 보고 신중하게 처신하는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남인들이 점령한 대간은 송시열을 안치할 것을 청하자 숙종은 이를 수용함은 물론 심지어 가극[30]할 것을 명했다. 남인 정권을 굳힌 왕은 이번에는 인현 왕후를 내칠 것을 명하고 이에 반대하고 연명 상소를 주창한 소론 오두인, 박태보를 고문한 후 유배했으며 오두인과 박태보는 유배 중에 장독으로 인해 사망했다. 장희빈을 중전으로 세우고 인현 왕후는 폐출했다. 그리고 서인의 거두이자 남인의 철천지 원수인 송시열을 사사할 것을 명했다.[31]
남인은 다시 모든 것을 되찾은것 처럼 보였다. 허목을 시작으로 윤선도, 오시수, 홍우원, 이원정 등 관작이 추탈된 남인들이 복권되었으며 민희, 윤휴, 유혁연, 허적 등 사형당한 남인들도 신원되어 왕에 의해 치제했다.이이와 성혼은 문묘에서 출향되고 파괴된 정개청[32]의 사당이 복구되었다. 또한 허적의 아들인 허견의 옥사에 대한 재조사가 명해졌다.[33]
하지만 기사환국으로 들어선 남인 정권은 그 이상의 변화를 주도하진 못했다. 과거 허견의 옥사로 핵심 세력이 사사되고 삭직된 청남 대부분도 세상을 뜬 상태에서 집권한 건 탁남 뿐이었고, 그나마 허적 같이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인물도 이미 죽고 없었다. 대표적인 이 시대의 인물인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이현일 등은 소극적인 인물이었으며, 그 중에서 민암, 유명현, 유명천, 조사기 등이 장희재를 비롯한 외척들과 동맹을 맺고 왕의 철저한 예스맨들로 정권을 유지해갔다. 재집권한 남인세력은 개혁이나 안정, 시정 또는 변화를 이끌기보다는 주로 정권 유지와 정적 숙청에 치중했던 것이다.[34]
탁남은 정치적 변동을 크게 추구하지 않았지만 윤휴 등 청남은 북벌을 추구하는 등 여러모로 정권 교체에 따른 변화를 추구했다. 특히 대동법, 호포제 등의 세역 개혁안에 대해서는 윤휴와 허목 등의 인물 사이에 의견차가 있었는데, 윤휴는 대동법에 소극적인 대신 호포제를 추진하였고, 허목은 대동법에는 호의적이었으나 호포제에는 비판적이었다.[24] 노비제를 비롯한 사회 질서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오가작통제와 호패법 등을 강화하여 호구 파악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25]
이들은 송시열의 고묘를 주장하면서 협력하기도 했지만 권대운, 유혁연 등이 당시 맹렬하게 북벌을 주장하던 윤휴를 탄핵하거나 비난하고 허목 등이 허적을 탄핵하는 등 서로간의 공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1680년, 집권 6년만에 김석주가 허견의 역모를 밝혀내면서부터 시작된 경신환국으로 남인 정권은 축출되었다.[26] 역모 죄로 단박에 허적, 윤휴, 유혁연, 오시수, 이원정, 오정창 등 남인 정권의 수뇌부가 사사되면서 남인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야사에는 영상(영의정) 허적이 멋대로 유악을 가져다 써 숙종의 분노를 일으켰다는 유악 일화가 전해오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유악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고 허적을 처형할 때도 그의 죄목에는 유악 얘기가 없다. 어쨌든 권대운, 민암, 오정위, 민희, 홍우원 등 살아남은 수뇌부들도 야인이 되었고, 정권은 송시열, 김수항을 위시로 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9년 후 인현왕후 폐출과 장희빈 문제로 다시 남인에게 기회가 왔다. 숙종은 장희빈이 경종을 낳은지 돌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원자의 명호를 내리려 했는데, 송시열이 이를 반대하다가 삭직 문외출송되었다.[27]
또한 숙종은 송시열의 삭직에 동의하지 않은 도승지 이하 4명의 승지들과 대간들을 모조리 파직 및 체직한 후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 살아남은 남인의 영수들을 삼정승에 기용하면서 다시 남인 정권을 세우니 이가 바로 기사환국이다. 이번에는 청남, 탁남 할 것 없이 서인에게 관용이란 없었다. 탁남은 서인을 온건하게 대해쥤는데 허적을 죽게 만들고 은혜를 원수로 갚아 이를 가는 실정이였다. 청남 또한 원래 서인에 강경했는데 허견의 역모와 관련없는 윤휴와 유혁연을 사사하여 서인하면 찣어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청남이나 탁남 모두 할 것 없이, 서인에 대해 원한에 사무쳐 서인의 온건론을 버리고 강경하게 나갔다.[28]
단, 이 과정에서 남인도 원호(원자의 명호)지정과 인현왕후 민씨의 폐출만은 반대했다. 남인 역시 서인과 마찬가지로 '조금만 참고 용서하십시오', '여자들이 투기를 하는 건 원래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폐출할 이유까진 아닙니다', '(중전이) 스스로 반성하도록 기다려 보십시오'라며 숙종을 말렸다. 그만큼 숙종이 너무 막무가내로 나간 것.[29] 이로 보아서 재집권에 성공한 남인 정권도 초반기에는 상황을 잘 보고 신중하게 처신하는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남인들이 점령한 대간은 송시열을 안치할 것을 청하자 숙종은 이를 수용함은 물론 심지어 가극[30]할 것을 명했다. 남인 정권을 굳힌 왕은 이번에는 인현 왕후를 내칠 것을 명하고 이에 반대하고 연명 상소를 주창한 소론 오두인, 박태보를 고문한 후 유배했으며 오두인과 박태보는 유배 중에 장독으로 인해 사망했다. 장희빈을 중전으로 세우고 인현 왕후는 폐출했다. 그리고 서인의 거두이자 남인의 철천지 원수인 송시열을 사사할 것을 명했다.[31]
남인은 다시 모든 것을 되찾은것 처럼 보였다. 허목을 시작으로 윤선도, 오시수, 홍우원, 이원정 등 관작이 추탈된 남인들이 복권되었으며 민희, 윤휴, 유혁연, 허적 등 사형당한 남인들도 신원되어 왕에 의해 치제했다.이이와 성혼은 문묘에서 출향되고 파괴된 정개청[32]의 사당이 복구되었다. 또한 허적의 아들인 허견의 옥사에 대한 재조사가 명해졌다.[33]
하지만 기사환국으로 들어선 남인 정권은 그 이상의 변화를 주도하진 못했다. 과거 허견의 옥사로 핵심 세력이 사사되고 삭직된 청남 대부분도 세상을 뜬 상태에서 집권한 건 탁남 뿐이었고, 그나마 허적 같이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인물도 이미 죽고 없었다. 대표적인 이 시대의 인물인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이현일 등은 소극적인 인물이었으며, 그 중에서 민암, 유명현, 유명천, 조사기 등이 장희재를 비롯한 외척들과 동맹을 맺고 왕의 철저한 예스맨들로 정권을 유지해갔다. 재집권한 남인세력은 개혁이나 안정, 시정 또는 변화를 이끌기보다는 주로 정권 유지와 정적 숙청에 치중했던 것이다.[34]
이 시기에 남인의 지도부 중진들은 대부분 외척 장희재의 후원을 받는 민암, 유명현, 유명천, 이의징 일파였다. 특히 갑술환국 직전에는 민암이 1691년에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남인의 지도부는 민암 우위로 다 재편되었고 이담명, 이서우마저도 민암 일파로 전향하면서 민암 일파가 남인의 다수를 점했다. 그리고 또 병권과 군권과 경찰권도 대부분 민암과 장희재 일파가 쥐고 있었다. 민암은 남인 재집권기에 병조판서를 역임한 적이 있고 장희재는 좌포도대장, 총융사 등을 지냈으므로 민암과 장희재 일파가 병권과 군권을 쥐는 것은 당연했다. 그 뿐 아니라 오시복이 수어사로 있었고, 이의징이 훈련대장으로 있었고, 황징이 어영대장으로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민암과 장희재의 사람들이었고 이의징이 어영대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므로 군권이 민암, 장희재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민암 외의 병조판서인 윤심, 민종도도 민암의 일파였고 민암의 후임 병조판서인 목창명도 민암의 일파였다.[35] 그 뿐 아니라 의금부도 민암 일파가 다 장악했었던 상태였다. 판의금부사는 공조판서 유명현이 겸임했고, 지의금부사는 훈련대장 이의징이 겸임했는데 이의징이 민암 일파였던 것은 물론, 유명현 또한 민암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 그 외에도 민암 자신 또한 판의금부사를 했고, 심재, 유명천, 오시복, 유명현 등 다른 판의금부사도 모두 민암의 일파였다. 이관징과 이우정을 빼고는 모두 민암 일파가 판의금부사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작 5년만에 남인의 세도는 기울기 시작했으니, 숙빈 최씨가 왕의 총애를 얻기 시작하면서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총애는 약해진 것이다. 1690년 하반기 이후로 조금씩 여론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장희재의 전횡 및 청나라 조총 3천정 사건으로 남인 정권에 대한 여론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특히 조총 3천정 사건 이후로는 남인 정권에 대한 여론이 불안정해지더니, 사씨남정기와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나리는 한철이라라는 노래가 퍼지면서 남인 정권에 대한 여론은 더욱 악화되고 안 좋아졌다. 또한 서인에 대한 여론도 조금씩 다시 반전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숙빈 최씨가 숙원으로 책봉이 되면서 남인들에 대한 여론은 더욱 급격히 약화되었고 서인에 대한 여론이 다시 좋아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희재가 1693년 갑술환국 이전에 체포가 된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인 정권은 더욱 큰 위기에 빠졌다. 숙빈 최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면서 남인 정권은 급격한 레임덕에 시달렸고, 반대로 권력에서 밀려났던 야당인 서인은 이를 기회로 급격히 여론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또한 1693년에 갑술환국 이전에 장희재가 체포된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인 정권의 레임덕은 더욱 더 극심해진다.[36]
그러나 숙종은 장희빈에 대한 총애는 거두었어도 남인 정권에 대한 믿음은 쉽사리 거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인 정권을 의심했으면서도 여전히 굳건히 신뢰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세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인들이 점점 거만해지자 숙종은 남인 정권에 대한 기대도 조금씩 접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게다가 재집권한 남인 정권도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계열과 민암, 장희재 계열로 나뉘어서 싸움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남인들이 장악한 대간들(삼사)이 남인의 핵심 실세였던 장희재를 탄핵하는 지경에 이르고 남인 세력이 장악한 승정원마저도 승지들이 남인 최고 실세였던 장희재의 처벌을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남인 정권의 레임덕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는 남인 중에서 군부, 포도청의 인원들로 구성된 장희재 세력들과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인원들로 구성된 남인 대간들 사이에 반목이 심했음을 잘 알려준다. 그리고 기사환국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귀양을 갔던 일부 서인 인사들이 서서히 귀양에서 풀려나고 서인 세력이 세를 회복한 것도 남인들에게 큰 위기감을 줬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긴장한 남인 정권은 서인의 젊은 세력인 소론 함이완, 한중혁, 노론 김춘택, 유복기 등이 인현 왕후를 복위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것을 포착하여 쟁점화시킨 후 서인을 재기 불능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역으로 유학 김인의 상소에 돌변한 숙종이 민암, 유명현, 이의징, 장희재를 문외출송 시키면서 사태는 환국으로 치달았다.
민암, 유명현, 이의징, 장희재가 하옥되면서 남인 정권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살펴볼 것이 장희재를 일개 외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나, 그것으로는 곤란하다. 장희재가 하옥되면서 남인 정권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으므로, 장희재는 단순한 외척이 아니라 남인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 외에는 장희재를 비호한 좌의정 민암이 남인의 영수였다. 그 외에도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등도 남인의 영수였지만 힘을 거의 못 썼고 진정한 남인 정권의 상징은 바로 장희재였던 것이다.
영상 권대운, 좌상 목내선, 우상 민암, 훈련대장 이의징[37], 이판 이현일, 호판 오시복, 예판 권유[38], 병판 목창명, 형판 민취도, 공판 유명현[39]까지 죄다 쫓겨난 빈자리에 남구만을 영상으로 임명하고 연이어 박세채를 우상에 앉혔다가 좌상으로 승진시키고 윤지완을 우상에 앉히고 훈련 대장에 신여철을 이판에 유상운을[40] 호판에 이세화를[41] 예판에 윤지선을[42] 병판에 서문중을[43] 형판에 박태상을[44] 임명하고 공판에는 훈련대장 신여철을[45] 임명하여 핵심 수뇌부를 서인으로 채웠으니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이다.
결국 장희빈은 강등되었고 인현왕후가 복귀했으며, 민암과 이의징은 사사되었고, 조사기와 목창명은 처형을 당했다. 그리고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을 비롯한 대신들이 줄줄이 유배가거나 향리로 전전하게 되어서, 조정에서는 남인들이 거의 박멸당하게 되었고, 경종이 즉위할 즈음이 되면 제대로 된 야당 자리도 갖추지 못하게 된다. 한편 인현왕후 복위를 주도했던 김춘택, 한중혁, 이시회, 이시도, 강만태, 최격은 살아남으나 죄의 형평성 문제 탓에, 다시 한번 조사에 들어가서 이시도와 강만태는 갑술환국과 같은 시기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3년 뒤인 1697년에 김춘택, 한중혁, 이시회, 최격은 다시 한번 조사에 들어가게 되어서 이때 한중혁, 이시회, 최격은 죽임을 당했고, 김춘택은 유배지를 전전하며 곤궁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인현왕후 복위를 주도했던 사람들의 가문들은 거의 풍비박산이 나버렸고 결과적으로 이득은 소론과 노론 대신들이 가져갔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면서 남인들이 조정에서 밀려난 이후에 허목의 제자 유형원의 종제인 성호 이익은 "실학"을 완성시키며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고, 남인 최후의 거두가 된다. 실사구시와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46] 균전론[47] 을 통한 중농주의의 완성 등이 그의 학문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민암 외의 병조판서인 윤심, 민종도도 민암의 일파였고 민암의 후임 병조판서인 목창명도 민암의 일파였다.[35] 그 뿐 아니라 의금부도 민암 일파가 다 장악했었던 상태였다. 판의금부사는 공조판서 유명현이 겸임했고, 지의금부사는 훈련대장 이의징이 겸임했는데 이의징이 민암 일파였던 것은 물론, 유명현 또한 민암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 그 외에도 민암 자신 또한 판의금부사를 했고, 심재, 유명천, 오시복, 유명현 등 다른 판의금부사도 모두 민암의 일파였다. 이관징과 이우정을 빼고는 모두 민암 일파가 판의금부사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작 5년만에 남인의 세도는 기울기 시작했으니, 숙빈 최씨가 왕의 총애를 얻기 시작하면서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총애는 약해진 것이다. 1690년 하반기 이후로 조금씩 여론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장희재의 전횡 및 청나라 조총 3천정 사건으로 남인 정권에 대한 여론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특히 조총 3천정 사건 이후로는 남인 정권에 대한 여론이 불안정해지더니, 사씨남정기와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나리는 한철이라라는 노래가 퍼지면서 남인 정권에 대한 여론은 더욱 악화되고 안 좋아졌다. 또한 서인에 대한 여론도 조금씩 다시 반전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숙빈 최씨가 숙원으로 책봉이 되면서 남인들에 대한 여론은 더욱 급격히 약화되었고 서인에 대한 여론이 다시 좋아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희재가 1693년 갑술환국 이전에 체포가 된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인 정권은 더욱 큰 위기에 빠졌다. 숙빈 최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면서 남인 정권은 급격한 레임덕에 시달렸고, 반대로 권력에서 밀려났던 야당인 서인은 이를 기회로 급격히 여론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또한 1693년에 갑술환국 이전에 장희재가 체포된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인 정권의 레임덕은 더욱 더 극심해진다.[36]
그러나 숙종은 장희빈에 대한 총애는 거두었어도 남인 정권에 대한 믿음은 쉽사리 거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인 정권을 의심했으면서도 여전히 굳건히 신뢰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세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인들이 점점 거만해지자 숙종은 남인 정권에 대한 기대도 조금씩 접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게다가 재집권한 남인 정권도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계열과 민암, 장희재 계열로 나뉘어서 싸움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남인들이 장악한 대간들(삼사)이 남인의 핵심 실세였던 장희재를 탄핵하는 지경에 이르고 남인 세력이 장악한 승정원마저도 승지들이 남인 최고 실세였던 장희재의 처벌을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남인 정권의 레임덕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는 남인 중에서 군부, 포도청의 인원들로 구성된 장희재 세력들과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인원들로 구성된 남인 대간들 사이에 반목이 심했음을 잘 알려준다. 그리고 기사환국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귀양을 갔던 일부 서인 인사들이 서서히 귀양에서 풀려나고 서인 세력이 세를 회복한 것도 남인들에게 큰 위기감을 줬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긴장한 남인 정권은 서인의 젊은 세력인 소론 함이완, 한중혁, 노론 김춘택, 유복기 등이 인현 왕후를 복위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것을 포착하여 쟁점화시킨 후 서인을 재기 불능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역으로 유학 김인의 상소에 돌변한 숙종이 민암, 유명현, 이의징, 장희재를 문외출송 시키면서 사태는 환국으로 치달았다.
민암, 유명현, 이의징, 장희재가 하옥되면서 남인 정권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살펴볼 것이 장희재를 일개 외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나, 그것으로는 곤란하다. 장희재가 하옥되면서 남인 정권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으므로, 장희재는 단순한 외척이 아니라 남인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 외에는 장희재를 비호한 좌의정 민암이 남인의 영수였다. 그 외에도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등도 남인의 영수였지만 힘을 거의 못 썼고 진정한 남인 정권의 상징은 바로 장희재였던 것이다.
영상 권대운, 좌상 목내선, 우상 민암, 훈련대장 이의징[37], 이판 이현일, 호판 오시복, 예판 권유[38], 병판 목창명, 형판 민취도, 공판 유명현[39]까지 죄다 쫓겨난 빈자리에 남구만을 영상으로 임명하고 연이어 박세채를 우상에 앉혔다가 좌상으로 승진시키고 윤지완을 우상에 앉히고 훈련 대장에 신여철을 이판에 유상운을[40] 호판에 이세화를[41] 예판에 윤지선을[42] 병판에 서문중을[43] 형판에 박태상을[44] 임명하고 공판에는 훈련대장 신여철을[45] 임명하여 핵심 수뇌부를 서인으로 채웠으니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이다.
결국 장희빈은 강등되었고 인현왕후가 복귀했으며, 민암과 이의징은 사사되었고, 조사기와 목창명은 처형을 당했다. 그리고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을 비롯한 대신들이 줄줄이 유배가거나 향리로 전전하게 되어서, 조정에서는 남인들이 거의 박멸당하게 되었고, 경종이 즉위할 즈음이 되면 제대로 된 야당 자리도 갖추지 못하게 된다. 한편 인현왕후 복위를 주도했던 김춘택, 한중혁, 이시회, 이시도, 강만태, 최격은 살아남으나 죄의 형평성 문제 탓에, 다시 한번 조사에 들어가서 이시도와 강만태는 갑술환국과 같은 시기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3년 뒤인 1697년에 김춘택, 한중혁, 이시회, 최격은 다시 한번 조사에 들어가게 되어서 이때 한중혁, 이시회, 최격은 죽임을 당했고, 김춘택은 유배지를 전전하며 곤궁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인현왕후 복위를 주도했던 사람들의 가문들은 거의 풍비박산이 나버렸고 결과적으로 이득은 소론과 노론 대신들이 가져갔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면서 남인들이 조정에서 밀려난 이후에 허목의 제자 유형원의 종제인 성호 이익은 "실학"을 완성시키며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고, 남인 최후의 거두가 된다. 실사구시와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46] 균전론[47] 을 통한 중농주의의 완성 등이 그의 학문의 특징이었다.
경종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노론을 제거하려고 했고 결국 신임옥사로 노론을 작살내버리고 소론 정권을 세웠다. 그와 함께 소론 중에서도 준소(강경파)와 관계가 깊었던 남인들도 대거 조정에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그 기간은 얼마 가지 않았다. 결국 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게 되자 다시 실각한 준소 - 탁남의 주도로 이인좌의 난이 터졌다. 그러나 난은 진압되었고, 이를 기념하여 평영남비(平嶺南碑)가 세워졌으며, 경북 상주 목사, 경기도 도사 출신 전라감사 정사효가 남은 세력들을 다시 모아 재기를 도모했으나 실패하고, 영조 31년의 나주 괘서 사건과 연이은 과거 시험장 답안지 문제로 집단 자결 수준으로 대들다가 준소도 궤멸된다.
이인좌의 난으로 남인 지역인 영남은 "반역향"으로 낙인찍히고, 이 지역의 남인들은 벼슬길이 막히게 된다.[48] 심지어 이인좌의 난 토벌에 적극 동참한 영남 출신 의병이 많았음에도 말이다. 이로써 영남 출신 남인들은 다수가 재야로 잠적하게 된다. 이로서 남인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채제공 일파의 청남만[49] 정조 대에 잠깐 나오고 끝난다. 정조 때 # 영의정을 맡은 채제공은 남인의 역사를 이와 같이 변호하고 있다. 채제공은 숙종 때 숙청 된 허적, 허견 등의 남인은 물론 김일경 무리와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것도 모두 탁남들이며 자신들은 일체 연관 없는 청남이라고 못 박고 있다. 즉, 당파로서의 남인은 청남만 남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나마도, 채제공과 정약용 집안을 보듯 기호남인이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이 영조와 정조에 의해 중용된 영남 남인의 본산인 양동마을의 이언적 후손들과 기호 남인의 채제공 등이었다.[50] 영조와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대학>의 명덕(明德) 개념에 천착했고, 이와 관련해서 선구적 업적을 남긴 "선정신"이자 문묘 및 종묘 동시 배향 6현 이언적을 재차 주목하게 된다. 이언적 덕분에 영남 남인으로서는 거의 드물게 이 시대에만 양동 마을 출신 4명이 2품 이상의 고위 관직자가 된다.
사도세자가 죽고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남인은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했다. 남인인 채제공 등의 복귀에 노론 벽파와 완소이면서 벽파와 행동을 같이한 서명선 등이 손을 잡고 격렬하게 탄핵하였고 서명선은 아예 "저놈이 역적이 아니면 제가 역적입니다!"라고 선언하기에 일렀지만, 정조가 탕평파의 옛 수장 김재로의 아들 시파 김치인을 영상으로 중용하여 중재에 나서자 채제공과 남인 세력은 한 세력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시전의 독점을 철폐한 신해통공이 그의 업적이다.
채제공은 사도세자 추숭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섬으로 당시 조정의 절대 다수였던 노론을 죄인으로 은글슬쩍 몰아붙혀 실각시킨 다음 남인 정권을 세울 궁리를 했고, 이는 여려차례 벌어진 영남 만인소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때문에 노론 벽파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았는데, 채제공이 죽을 때가 다 되었음에도 그의 후계자인 이가환 등은 이단 신봉자 등으로 낙인 찍혀 구심점이 될 만한 인물로 성장하지 못했던 것도 노론의 지속적인 견제가 원인이었다.
무엇보다 정치에서 밀려난 남인들이 서학(천주교)에 상당히 심취하게 되었던 것이 복귀 후 재성장을 가로막은 결정적 원인이었다. 정조 때 남인은 공서파와 신서파로 나뉘며, 신서파가 서학(천주교)와 연관이 있었다. 천주교와의 연관은 정조 시기엔 어느 정도 용서를 받았으나,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자 집권한 벽파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결국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권일신 등의 목이 한꺼번에 날아가며 남인(특히 기호남인)은 대 타격을 입었다.[51]
한편 남인의 공서파들 중 강경한 이기경, 목만중, 홍낙안도 남인이면서 천주학을 못마땅하게 여겨 벽파와 동조하여 신유박해때 신서파들을 강경탄압하였다. 이들이 신유박해에 동조하여 사람들이 노론벽파라고 오해하지만 이들은 남인이였다. 이기경은 남인이였던 정약용과 친우였다가 천주학의 견해 차이로 같은 남인이면서도 서로 정적이 되었고 목만중의 가문인 사천 목씨는 가문이 당파가 남인이였다. 홍낙안도 채제공의 조카로 진산사건때 천주교를 믿는 권철신과 이승훈의 경위를 채제공에게 고하여 그들이 문초되었다.
이인좌의 난으로 남인 지역인 영남은 "반역향"으로 낙인찍히고, 이 지역의 남인들은 벼슬길이 막히게 된다.[48] 심지어 이인좌의 난 토벌에 적극 동참한 영남 출신 의병이 많았음에도 말이다. 이로써 영남 출신 남인들은 다수가 재야로 잠적하게 된다. 이로서 남인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채제공 일파의 청남만[49] 정조 대에 잠깐 나오고 끝난다. 정조 때 # 영의정을 맡은 채제공은 남인의 역사를 이와 같이 변호하고 있다. 채제공은 숙종 때 숙청 된 허적, 허견 등의 남인은 물론 김일경 무리와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것도 모두 탁남들이며 자신들은 일체 연관 없는 청남이라고 못 박고 있다. 즉, 당파로서의 남인은 청남만 남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나마도, 채제공과 정약용 집안을 보듯 기호남인이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이 영조와 정조에 의해 중용된 영남 남인의 본산인 양동마을의 이언적 후손들과 기호 남인의 채제공 등이었다.[50] 영조와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대학>의 명덕(明德) 개념에 천착했고, 이와 관련해서 선구적 업적을 남긴 "선정신"이자 문묘 및 종묘 동시 배향 6현 이언적을 재차 주목하게 된다. 이언적 덕분에 영남 남인으로서는 거의 드물게 이 시대에만 양동 마을 출신 4명이 2품 이상의 고위 관직자가 된다.
사도세자가 죽고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남인은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했다. 남인인 채제공 등의 복귀에 노론 벽파와 완소이면서 벽파와 행동을 같이한 서명선 등이 손을 잡고 격렬하게 탄핵하였고 서명선은 아예 "저놈이 역적이 아니면 제가 역적입니다!"라고 선언하기에 일렀지만, 정조가 탕평파의 옛 수장 김재로의 아들 시파 김치인을 영상으로 중용하여 중재에 나서자 채제공과 남인 세력은 한 세력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시전의 독점을 철폐한 신해통공이 그의 업적이다.
채제공은 사도세자 추숭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섬으로 당시 조정의 절대 다수였던 노론을 죄인으로 은글슬쩍 몰아붙혀 실각시킨 다음 남인 정권을 세울 궁리를 했고, 이는 여려차례 벌어진 영남 만인소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때문에 노론 벽파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았는데, 채제공이 죽을 때가 다 되었음에도 그의 후계자인 이가환 등은 이단 신봉자 등으로 낙인 찍혀 구심점이 될 만한 인물로 성장하지 못했던 것도 노론의 지속적인 견제가 원인이었다.
무엇보다 정치에서 밀려난 남인들이 서학(천주교)에 상당히 심취하게 되었던 것이 복귀 후 재성장을 가로막은 결정적 원인이었다. 정조 때 남인은 공서파와 신서파로 나뉘며, 신서파가 서학(천주교)와 연관이 있었다. 천주교와의 연관은 정조 시기엔 어느 정도 용서를 받았으나,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자 집권한 벽파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결국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권일신 등의 목이 한꺼번에 날아가며 남인(특히 기호남인)은 대 타격을 입었다.[51]
한편 남인의 공서파들 중 강경한 이기경, 목만중, 홍낙안도 남인이면서 천주학을 못마땅하게 여겨 벽파와 동조하여 신유박해때 신서파들을 강경탄압하였다. 이들이 신유박해에 동조하여 사람들이 노론벽파라고 오해하지만 이들은 남인이였다. 이기경은 남인이였던 정약용과 친우였다가 천주학의 견해 차이로 같은 남인이면서도 서로 정적이 되었고 목만중의 가문인 사천 목씨는 가문이 당파가 남인이였다. 홍낙안도 채제공의 조카로 진산사건때 천주교를 믿는 권철신과 이승훈의 경위를 채제공에게 고하여 그들이 문초되었다.
다만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 "숭례문을 3층으로 높이겠다"는 야사와 같이 근기 남인, 이언적과 이황, 유성룡의 후손 등을 비롯한 영남 남인이 등용되었고, 이후로도 영남 세력은 대원군의 지지 세력인 위정척사파가 되었다. 남인의 후예들은 후에 독립운동가로도 일부 이어지게 되었지만, 이미 정치세력으로서의 의미는 정조 대에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조선 최후의 붕당인데, 숙청당한 경기/충청권 기호남인과 달리 영남 지역에 상주한 정통파 남인인 영남남인은 지금까지도 경상북도 일부(특히 경주시, 안동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조선 최후의 붕당인데, 숙청당한 경기/충청권 기호남인과 달리 영남 지역에 상주한 정통파 남인인 영남남인은 지금까지도 경상북도 일부(특히 경주시, 안동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권이진(경종~영조 초반): 역시 탕평당에 참여한 영조 초기 남인의 영수로 이인좌의 난 진압에 앞장서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 오광운(영조 초~중반): 탕평당에 참여한 남인의 영수로서 이인좌의 난을 고하고 앞장서 진압하는 등의 행보로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 목만중(재야영수, 영조 후기~순조 초기): 18세기 대표적인 남인 문인으로 평가받으며, 남인이면서도 거의 유일한 벽파라 심환지 등 노론 벽파와 함께 시파, 천주교 탄압에 적극 동조했다.
- 정범조(정조 후기~순조 극초기): 준론 탕평에는 비판적이었으나 당색을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고, 주로 홍문관이나 예문관에서 관직을 지내며 문체반정 등에 적극 동조해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 이익운(순조 이후): 체제공의 제자로 체제공을 변호했다가 여러번 유배를 갔다. 그러다 순조 초 사면받아 사실상 씨가 마른 상태가 된 남인에서 유일하다시피 한 거물이 되었다. 순조 시기 천주교 박해 때는 스승처럼 천주교에 적대적이라 직접 천주교도들을 심문하고 처형을 집행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조선의 역대 집권세력 |
[1] 북인과 분당.[2] 정여립의 난 이후.[3] 신유박해로, 남인(특히 근기남인)이란 정치 세력이 조정에서 일망타진된, 말하자면 끈질기게 살아남았다가 완전히 제거되었다.[4] 초기 남인의 수장으로, 후에 서인 정권이 들어섰지만 그는 그렇게 깎여지지 않았다.[5] 초기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원래는 동인이었으나 남인이 되었다.[6] 무당파 남인이다. 그의 인망은 대단해서 서인이 인조반정 후 그를 영의정에 앉혔다.[7] 탁남의 영수.[8] 청남의 영수.[9] 정조 시기에 등용된 남인의 마지막 거두이다. 채제공을 끝으로 남인은 영향력 있는 인물을 배출하지 못한다.[10] 신서의 주요 인물.[11] 갑인환국 후 서인 정권 하 벼슬을 했던 인물들과 그렇지 않았던 인물들.[12] 1790년 서학(천주교)에 대한 태도와 채제공에 대한 입장.[13] 18세기 초.[14] 단독 집권 기간.[15] 공동 집권 기간 합산.[16] 대제학인 이성중(李誠中)은 동인이었지만 정철의 의견에 동조하며 세자 책봉을 주장했다.[17] 교과서나 일반 역사책에서는 그저 당파를 위해 거짓말이나 하는 찌질이로 나오지만 유성룡과 함께 이황의 수제자를 다투는 대 유학자였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초유사로서 의병과 관군 사이를 조율하고 지원해 경상우도 방어와 탁월한 공적을 쌓았다.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안경 착용자이기도 하다.[18] 사실 이 시기는 특정 당파의 집권 기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19] 다만 이 때는 내각에서도 병조판서 만큼은 서인이 차지하고 있었고 갑인예송 이후에도 1675년 5월까지는 서인이 여전히 조정의 다수였다.[20] 정확히 말하자면 초기 남인 중 이황 직계로 분류되는 인사가 대거 낙향하고 이덕형, 이원익 등 실무 지향적인 인사가 남인을 이끌었기 때문에 극도로 성리학적 정치를 추구하던 초창기와 달리 실용정치를 지향하던 청소북과 별 차이가 없던 상태였다.[21] 하루를 달로 쳐서 1달만에 끝내는 조선 초의 역월법에 비하면 1년도 충분히 긴 것이었다.[22] 이와 기가 같은데서 나옴 ≒ 왕도 사대부에 포함됨. 요즘식으로 치면 공화파로 해석할 수 있는 태도이며, 서인의 당론이다.[23] 이와 기가 유별함 ≒ 왕은 특별하며 사대부와 구분됨. 북인과 남인이 취한 태도로,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이이학파에 비해 근왕파적인 면모가 있다고 볼 수 있다.[24] 후에 윤휴가 송시열과 노론에 의해 확고한 사문난적으로 규정되면서 남인들은 허목을 정통으로 규정하고 그의 후예를 자처하게 된다. 예외가 선명한 노선을 좋아했던 정약용. 참고로 윤휴와 허목 모두 소북 출신으로 남인에 합류한 인사다.[25] 후에 재야 인물이 된 남인 세력(유형원 등)에서는 초기 유교의 이상이었던 균전제, 한전제 등으로 토지의 집중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이들이 실학의 중농학파이다.[26] 남인 정권은 최초 집권 이후에는 큰 지지를 받았지만, 홍수의 변 및 윤휴 뇌물사건으로 민심을 잃으면서 여론이 약화되어 가고 있었고, 경신환국 직전에 남인 정권은 극심한 레임덕에 시달렸다.[27] 장희빈이 원자를 낳으면서 경신환국으로 집권한 서인 정권은 레임덕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도 남인 인사에 대한 과도한 숙청으로 인한 여론 악화, 노론과 소론의 분열, 허새의 옥사 조작, 민유중, 김만기, 김석주 등 삼척의 죽음과 등으로 서인 정권에서도 악재가 수차례 찾아왔지만 명성왕후와 자의대비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서인 정권이 강력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리고 장희빈이 원자를 낳기 이전에는 남인 정권도 큰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장희빈이 원자를 낳고, 자의대비까지 1688년 12월에 세상을 떠나면서 서인 정권의 레임덕은 점점 심화된다.[28] 사실 허적을 죽이는 데 반대한 서인 대신들도 있었다. 송시열, 김수항, 김수흥, 민유중, 민정중, 이정영, 홍처량, 정지화 등의 적지않은 서인 대신들도 허적을 죽이는 데 반대했지만 숙종의 완강한 뜻으로 인해서 실패한 듯 하다. 김만기, 김만중, 김익훈, 김석주, 이사명 등은 허적을 죽일 것을 청했다.[29] 그 외에도 남인들이 인현왕후 폐위에 반발한 것은 기사환국으로 재집권한 남인들도 과거 탁남이었고 서인들과 한 때는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으며, 심지어 장희빈 세력과 가까웠던 민암마저도 인현왕후 폐위에 반발했다.[30] 유배지에 가시 울타리를 치는 것을 뜻한다.[31] 제주도로 유배갔던 송시열은 서울로 압송되다가 정읍에서 금부도사를 만나 83세로 사사되었다.[32] 동인 인물로 정여립의 난 당시 옥사한 인물. 원래 서인의 영수 박순의 제자로 박순이 영의정에서 파직되자 화가 미칠까 두려워 동인들과 어울렸다. 후에 정철이 역적의 혐의를 받은 정개청을 가혹하게 고문하여 숨지게 했다.[33] 이때 전 훈련 대장인 김익훈이 70세의 나이로 형장을 받다 죽었으며, 김환, 이회 등 고변자들도 모조리 참수되었다. 김석주 역시 관작이 추탈되는 등 죽어서 벌을 받았으며 전 영의정 김수항이 61세를 일기로 사사되었다.[34] 기사환국은 한 번에 숙청이 끝난 것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1689년에 1차 숙청이 있었고 그 뒤 1690년에 2차 숙청이 있었으며 1691년에는 3차 숙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5] 1차 남인 집권기에는 서인인 김석주가 병조판서였고 어영대장을 겸했으며 김만기가 훈련대장과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기도 했으므로 병권 절반이 그래도 서인에게 가 있었지만 2차 남인 집권기는 병권을 모두 남인이 차지했다.[36] 남인 정권도 재집권한 초반기에는 신중하게 처신하는 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만해진 것으로 추정된다.[37] 당시 지의금부사도 겸임을 했다.[38] 당시 대제학도 겸했는데 갑술환국으로 대제학 자리도 박탈되었다.[39] 당시 판의금부사도 겸임을 했다.[40] 유상운은 그 외에 판의금부사도 겸임을 하게 되었다.[41] 기사환국 때 경기감사로 있으면서 오두인, 박태보 등과 인현왕후 폐위 반대를 주장하다가 유배된 자이다.[42] 본래 형판에 앉았다가 예판으로 옮겼다.[43] 서문중은 그 외에 지의금부사에도 제수되었다.[44] 박태상은 이후 대제학 자리에도 앉았다.[45] 갑술환국 이후 개편된 임시내각에서는 공판에 신익상이 임명되었다.[46] 사실 붕당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의 대부분은 이익의 논리에서 비롯되었다.[47] 17세기 중반 이후 다수의 지식인과 관료들이 제기했던 토지제도 개혁안이다.[48] 다만 그게 아니더라도 원래 숙종시기로 접어들며 점점 수도권 출신들이 벼슬을 독점하는 현상이 벌어지긴 했다.[49] 앞서 나온 이인좌의 난 등의 남인들은 모두 탁남이다. 채제공 자신도 노론이 남인을 공격하자 이에 무신난(이인좌의 난) 등을 일으킨 자들은 탁남의 자손인데 왜 우리를 욕하냐고 반박했다.[50]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측근으로, 이미 영조 시절 승지와 대사헌, 대사간과 여러 판서(병조, 예조, 형조, 이조)를 역임했다. 처음에 폐세자가 거론 될때 극력으로 막았기에 노년의 영조에게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정조)의 충신이다.”라는 말도 들었다. (사도세자가 사사당할 때는 모친상으로 시골에 내려가 있었다.)[51] 충청도 일대와 경기도 일대에 천주교 순교 성지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기호 남인이 신유박해 때 주르륵 순교한 데다가, 이후에도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지로 끌고 와서 처형했기 때문이다.[52] 허목은 이미 현종조에 80살이 넘은 상황이라서 윤휴가 실세였다.[53] 딘, 노장파=공서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당시 남인은 공서와 신서의 분열 속에 채제공이란 거물로 좋든 싫든 붙어있는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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