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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4대 국회의원 김향수 金向洙 | Kim Hyang Su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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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한 가난한 선비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니혼대학 법과 전문부를 수료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명예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9년에 일만무역공사를 세워 기업인 커리어를 시작해 1945년 8.15 해방 뒤 1956년에 한국자전차공업을 설립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강진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자유당 김성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낙선자인 민주당 양병일 후보로부터 선거 무효 소송을 당하였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대한민국 참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1년 3.15 부정선거를 이유로 공민권 제한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이후 아남산업 경영에 전념하여 1968년에는 당시 불모지였던 한국 반도체 산업을 개척했고, 1974년에 국내 최초로 컬러 TV 수상기를 개발해냈다. 1980년대 초반에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에게 D램 개발을 권유하기도 했으며 1986년 아남건설, 1992년 아남시계 및 아남전기를 각각 세웠고, 같은 해에 장남 김주진에게 그룹의 전권을 맡긴 후 명예회장으로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외에 제9대, 제10대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을 지냈다.
2003년 6월 2일 오후 8시 50분, 그는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강진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자유당 김성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낙선자인 민주당 양병일 후보로부터 선거 무효 소송을 당하였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대한민국 참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1년 3.15 부정선거를 이유로 공민권 제한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이후 아남산업 경영에 전념하여 1968년에는 당시 불모지였던 한국 반도체 산업을 개척했고, 1974년에 국내 최초로 컬러 TV 수상기를 개발해냈다. 1980년대 초반에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에게 D램 개발을 권유하기도 했으며 1986년 아남건설, 1992년 아남시계 및 아남전기를 각각 세웠고, 같은 해에 장남 김주진에게 그룹의 전권을 맡긴 후 명예회장으로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외에 제9대, 제10대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을 지냈다.
2003년 6월 2일 오후 8시 50분, 그는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김주진 앰코테크놀로지 회장 등 4남 2녀를 두었으며, 사위로는 황인길 전 아남반도체 부회장 등 2명이 있다. 외손자로는 나성균 네오위즈 대표가 있다.
- 일본은 한국이더라 (문학수첩,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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