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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김해부 진례성제군사 명의장군(知金海府眞禮城諸軍事 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은 가정(鯉庭)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대궐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선문에 귀의하여 숭앙하고 삼보(三寶)의 집을 돕고 수리하였다. 대사는 마음에 가련히 □□하고 여생을 보낼 뜻을 가졌다. 현묘한 종지를 높이 강연하고 부처의 도를 널리 선양하였다.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 비문(924년)
김인광은 무력화한 후삼국시대 신라 조정에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충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장군직을 자칭한 점에서 진짜 신라의 충신이라기보단 흔한 후삼국시대의 야심가 호족 중 한 명이라 볼 수도 있지만, 그래도 5소경 중 하나인 김해처럼 신라에서 손에 꼽히는 대도시에, 위치도 신라 수도 서라벌과 가까운 지역 호족이 적어도 신라 조정을 적대하고 위협하지는 않았던 점에서 그나마 신라 조정에는 다행이었던 셈.
그의 출신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김해지역을 지배하는 김씨 호족이란 점에서, 가야계 김해 김씨 계통 재지호족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경주에서 지방관으로 파견된 신라계 경주 김씨 계통이 전국이 혼란스러워지자 호족으로 눌러앉은 케이스일 가능성도 있다.
진례성제군사란 호칭으로 지금의 김해시 진례면을 중심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진례성제군사라는 호칭은 이후 소율희가 계승한다.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승려들을 후원했으며, 이에 고승들이 김해에 많이 정착하게 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말에 소충자, 소율희 형제가 김해를 공격하는데, 그 당시 성주가 김인광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소씨 형제도 김인광과 마찬가지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 때문에 김해는 계속 후삼국시대 승려들의 안식처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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