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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무공훈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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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1묘역-71호 | |||||||||||||||||||||||||||
본관 | ||||||||||||||||||||||||||||
재임기간 | 제2대 해병대사령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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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11월 2일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4]에서 태어났다. 1934년 신징(新京)사범학교를 나와 1937년 봉천군관학교를 5기로 졸업했다. 당시 졸업 성적 우수자에게는 일본 육사에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 여기에 선발되어 석희봉과 함께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54기로 졸업했다.
만주로 돌아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창설된 간도특설대에서 정보반 책임자(주임)으로 활동하였다. 이 정보반의 목적은 팔로군, 항일 지하공작원, 민병의 활동과 주민들의 사상 동태를 정찰하여 항일군민을 소탕하거나 체포하고 학살하기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정보반원은 각 중대에서 13명의 정예분자를 선발하여 조직되었으며, 정보 수집을 넘어 항일무장세력이나 민간인을 직접 체포, 심문하고 학살하는 일까지 담당하였다.[5]
김석범은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6위 주국장(柱國章)을 수여받았다. 1945년 8월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한 뒤, 신징(新京)으로 가서 정일권의 뒤를 이어 신징보안사령부 사령관을 맡았다.
1946년 인천으로 귀국한 뒤 조선해안경비대 견습사관을 거쳐 그해 5월 참위(소위)로 특별 임관한 뒤 교두를 거쳐 1948년 묵호기지사령관, 1949년 2월 해군통제부 참모장을 지냈다. 1950년 진해군항 방위사령관을 지내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8월 통제부 방어사령관(해군 준장)으로 재직했다. 그 뒤 초대 해병대사령관이 된 신현준의 권유로 1951년 7월 해병대에 전입하였고, 1952년 4월 당시 해병대 제1연대장으로 있던 김동하 대령과 임무를 교대해 제1연대장으로서 전투를 지휘했다. 그 뒤 10월 1일 해병대 제1연대와 해병대 독립5대대가 합병되어 해병대 제1전투단으로 개편되자 제1전투단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같은 해 해병대 부사령관에 임명된 뒤 1953년 10월 15일부터 1957년 9월 4일까지 제2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냈다.
이후 1958년부터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을 역임했으며, 1960년 6월 25일 해병대 중장으로 예편했다. 1960년 7월 16일 사단법인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1963년 3월 18일 상공부로부터 조선기계제작소 관리인에 임명되었다가 4월 27일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성우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98년 2월 18일 오전 9시 50분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現 서울아산병원)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1998년 2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에 안장되었다.
만주로 돌아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창설된 간도특설대에서 정보반 책임자(주임)으로 활동하였다. 이 정보반의 목적은 팔로군, 항일 지하공작원, 민병의 활동과 주민들의 사상 동태를 정찰하여 항일군민을 소탕하거나 체포하고 학살하기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정보반원은 각 중대에서 13명의 정예분자를 선발하여 조직되었으며, 정보 수집을 넘어 항일무장세력이나 민간인을 직접 체포, 심문하고 학살하는 일까지 담당하였다.[5]
김석범은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6위 주국장(柱國章)을 수여받았다. 1945년 8월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한 뒤, 신징(新京)으로 가서 정일권의 뒤를 이어 신징보안사령부 사령관을 맡았다.
1946년 인천으로 귀국한 뒤 조선해안경비대 견습사관을 거쳐 그해 5월 참위(소위)로 특별 임관한 뒤 교두를 거쳐 1948년 묵호기지사령관, 1949년 2월 해군통제부 참모장을 지냈다. 1950년 진해군항 방위사령관을 지내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8월 통제부 방어사령관(해군 준장)으로 재직했다. 그 뒤 초대 해병대사령관이 된 신현준의 권유로 1951년 7월 해병대에 전입하였고, 1952년 4월 당시 해병대 제1연대장으로 있던 김동하 대령과 임무를 교대해 제1연대장으로서 전투를 지휘했다. 그 뒤 10월 1일 해병대 제1연대와 해병대 독립5대대가 합병되어 해병대 제1전투단으로 개편되자 제1전투단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같은 해 해병대 부사령관에 임명된 뒤 1953년 10월 15일부터 1957년 9월 4일까지 제2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냈다.
이후 1958년부터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을 역임했으며, 1960년 6월 25일 해병대 중장으로 예편했다. 1960년 7월 16일 사단법인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1963년 3월 18일 상공부로부터 조선기계제작소 관리인에 임명되었다가 4월 27일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성우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98년 2월 18일 오전 9시 50분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現 서울아산병원)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1998년 2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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