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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의 어머니가 김방경을 뱃속에 잉태하였을 때 여러 차례 신선세계에서 구름과 노을을 먹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에 김방경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며 “아기가 반드시 신선 세계에서 내려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한 고집 했는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길바닥에 드러누워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길바닥에서 이랬는데도 지나가는 소와 말이 어린 김방경을 피해서 지나가서 주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한 고집 했는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길바닥에 드러누워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길바닥에서 이랬는데도 지나가는 소와 말이 어린 김방경을 피해서 지나가서 주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김방경이 태어나서 조부 김민성의 집에서 자랐는데 뜻에 조금만 마땅치 않고 노여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거리에 나가서 울었으나 오가는 소와 말이 그를 피해서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여겼다.《고려사》 김방경 열전
1229년 음서로 산원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1248년 서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어 위도(葦島)[3]에서 1차례 소규모 접전 끝에 몽골군을 몰아내는 전공을 세웠다. 위도에 주둔할 당시 위도에는 경작할만한 땅이 10여 개 정도 있었으나 조수물이 들어와서 경작을 못하고 있었는데 김방경은 방파제를 쌓고 이 땅에 파종을 하도록 시켰다. 그래서 처음에는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으나 가을이 되자 추수한 식량이 많아서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또한 위도에는 샘이나 우물이 없어서 식수를 구하기 위해 백성들이 육지로 나갔다가 몽골군에 잡혀가는 일이 많았는데 김방경은 비가 오면 빗물을 받아다 저장해 뒀다가 그 물로 저수지를 만들어서 식수 걱정을 없앴다. 행정 수완도 제법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 1263년 지어사대사(知御史大使)에 임명되어 진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이 공로로 상장군에 제수되었다.
모함을 받기도 해 좌천되기도 했으나 다시 지어사대사로 임명되어 삼별초 토벌에 앞장섰다. 삼별초의 난 당시 함락 직전이던 광주와 나주를 지켜내고 1273년 탐라에서 농성 중이던 삼별초 잔존 세력까지 모조리 일소하며 이에 문하시중에 올랐다. 삼별초 토벌 당시 진도 해협[4]에서 그 곳의 심한 물살에 휘말린데다가 대장선에까지 삼별초군이 뛰어올라 달려들었으나 김천록[5]이 단창으로 이를 저지해 위기를 모면했다. 직후 "물고기밥이 될지언정 어찌 반적의 손에 죽겠느냐"며 바다에 몸을 던지려 했으나 부관들이 말렸고 부상당해 쓰러진 병사들이 김방경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분투했다. 김방경은 생각을 고치고 병사들을 지휘했는데 안색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는 간신히 장군 양동무가 몽충으로 포위망을 돌파하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진도를 함락시킬 때는 원종의 명을 받고 삼별초가 세운 왕인 승화후 왕온을 구출하려 했으나 그의 가문에 원한이 있었던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6]가 먼저 왕온을 붙잡아 살해했다.[7]
모함을 받기도 해 좌천되기도 했으나 다시 지어사대사로 임명되어 삼별초 토벌에 앞장섰다. 삼별초의 난 당시 함락 직전이던 광주와 나주를 지켜내고 1273년 탐라에서 농성 중이던 삼별초 잔존 세력까지 모조리 일소하며 이에 문하시중에 올랐다. 삼별초 토벌 당시 진도 해협[4]에서 그 곳의 심한 물살에 휘말린데다가 대장선에까지 삼별초군이 뛰어올라 달려들었으나 김천록[5]이 단창으로 이를 저지해 위기를 모면했다. 직후 "물고기밥이 될지언정 어찌 반적의 손에 죽겠느냐"며 바다에 몸을 던지려 했으나 부관들이 말렸고 부상당해 쓰러진 병사들이 김방경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분투했다. 김방경은 생각을 고치고 병사들을 지휘했는데 안색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는 간신히 장군 양동무가 몽충으로 포위망을 돌파하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진도를 함락시킬 때는 원종의 명을 받고 삼별초가 세운 왕인 승화후 왕온을 구출하려 했으나 그의 가문에 원한이 있었던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6]가 먼저 왕온을 붙잡아 살해했다.[7]
1273년 삼별초의 난이 진압되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원나라의 요구로 합포현(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에 성을 쌓게 되었는데 이 때 감독관으로 가게 되었다. 1274년 10월 1차 원정군이 출발하였고 도독사로 임명된 김방경은 박지량, 김문비 등과 함께 고려군 8000여 명을 이끌고 원나라 정벌군과 함께 출진하였다. 1274년 10월 19일 모모치바라에 상륙한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은 사와라(삼랑포)를 넘던 도중 기쿠치가 이끌던 일본군을 맞았으나 근처에 있던 원나라군과 합심해 격파하였다. 이 때 <고려사>에는 고려군은 분전하였으나 원나라 병사들은 도망갔는데 이것은 원나라군이 전진만 외치는 김방경을 질투해서라고 적혀 있다. 이 때의 승리 이후 김방경은 쪽수가 밀려도 지금 여기서 싸우면 배수진 친거라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훈둔은 병력들이 지친 상황에서 더 들어갈 수 없다고 반대했다. 당시 정벌 동안 고려인이지만 몽골의 앞잡이로 유명한 남양 홍씨(당홍) 홍다구와의 마찰이 매우 잦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몽골군이 전투에 익숙하다고는 하나 어찌 고려군보다 더 낫겠느냐"《고려사》 김방경 열전에 기록된 여몽연합군 총사령관 훈둔(忻都, 忽敦)의 말.[8]
1차 정벌의 실패 후 고려로 복귀한 김방경은 원나라 간섭을 줄이기 위해 고심하던 충렬왕의 명령으로 성절사[9]에 임명되어 수 차례 원나라를 왕래하고 고려의 뜻을 전하였다. 1276년 7월에는 쿠빌라이 칸의 절일 축하 사절단으로 가기도 했다. 이 때 김방경은 호두금패라는 물건을 하사받는데 원나라 문무 2품 이상이 차는 상징으로 고려인 중에서는 유일하게 받았다고 한다. 쿠빌라이 칸이 그를 좋게 보았는지 생일 잔치 당시 멸망한 남송의 황제보다도 높은 자리에 앉혔다고 하는 루머가 있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르다. 정확히는 잔치 자리에서 서열대로 앉혀졌는데 이 때 김방경 바로 위 서열이 멸망한 남송 황족 중에 직위는 왕에 해당하는 자였으며 남송 황제도 아니고 그보다 윗자리를 받지는 못했다.[10]
1277년 위득유, 노진의, 김복대[11]가 사람을 모아 김방경과 그의 가족 및 측근들을 모함했다. 당시 몽골에서 고려를 제어하기 위해 보낸 다루가치를 죽여 역모를 꾀한다고 훈둔에게 익명의 투서를 보내 모함한 것. 결국 왕에게까지 일이 알려져 충렬왕은 이를 의심스러워 하면서도 위득유 일당, 김방경과 그 측근들을 소환하여 심문을 하게 되었다. 심문 중 위득유 일당에 동조했던 자들 중 일부가 위득유의 강압에 못 이겨 김방경을 무고했다며 자백하자 위득유가 뒤늦게 김방경이 자신에게 "관군을 다 죽이고 해도(海島)[12]에 들어가 머물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류경[13]이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왜 진작에 말하지 않았냐"고 강경하게 따져 묻자 위득유 일당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고 김방경의 부장 김천록이
"너희들은 개돼지같은 놈들이다. 진도(珍島)를 칠 때에 너희 두 사람이 군법을 어겨 중찬(中贊)[14]이 너희 장물을 몰수하여 관에 들였는데 너희들은 이를 원망할 뿐이다. 이제 거짓 말을 꾸며서 대신(大臣)을 모함하고자 하니 하늘이 너희를 죽이지 않으면 하늘이 없다 할 것이다."《고려사》 김방경 열전
라며 크게 꾸짖으니 김복대 등의 나머지 일당들도 무고를 실토하며 발을 빼버렸고 이에 충렬왕은 김방경이 결백하다고 판단해 그를 석방시켰다. 그렇게 무사히 넘어가나 했지만 홍다구가 다시 이 일을 꺼내들어 기어이 김방경을 심문대에 세워서는 잔혹하게 고문을 한다. 김방경을 심하게 매질하자 우연히 고려에 왔던 원나라 관리가 이를 보고 너무 심하다고 말렸고 그래도 고문을 하자 "그 이상 하면 황제께 직접 아뢰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멈췄는데 그 후 다시 심문을 하고 누명을 씌우는 등 끝까지 처리하려고 했다.
"다구는 쇠사슬로 그의 머리를 감고 못질을 할 것처럼 하며, 매질하는 자에게 그 머리를 치라고 소리쳤다. 종일 알몸으로 서서 추운 날씨에 살이 얼어서 먹장빛처럼 되었다."《고려사》 김방경 열전
○2월. 왕이 흔도(忻都)·홍다구(洪茶丘)와 함께 김방경(金方慶)을 재차 국문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소국이 상국(上國)을 하늘과 같이 떠받들고 어버이처럼 사랑하는데, 어찌 하늘을 배반하고 어버이를 거슬러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겠습니까. 저는 차라리 억울하게 죽을지언정 거짓으로 자복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홍차구가 기필코 그를 자복시키고자 참혹한 형을 더하니, 몸에 멀쩡한 피부가 없었고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ㅡ 「고려사절요」, 충렬왕 4년(1278), 2월 왕이 홍차구 등과 김방경을 다시 국문하고 유배보내다
그럼에도 거짓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자 홍다구는 충렬왕을 협박해 "자백하면 귀양으로 끝내겠다"라는 말을 하게 하지만 김방경은 거절했다. 결국 그는 대청도, 그의 아들 김흔은 백령도로 각각 귀양을 가게 된다.
"왕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신이 군졸 출신으로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이몸이 짓이겨 없어질지라도 국가에 보답하기에 부족합니다. 어떻게 저의 몸을 아껴서 허위로 자백하여 나라를 저버리겠습니까? 홍다구야! 나를 죽이려거든 바로 죽여라. 나는 정의에 어긋나는 일로 너에게 굴복하지는 않겠다."
ㅡ 「고려사절요」, 충렬왕 4년(1278), 2월 왕이 홍다구 등과 김방경을 다시 국문하고 유배보내다
이에 갑옷을 숨긴 일만을 죄로 삼아 김방경을 대청도(大靑島)에, 김흔(金忻)을 백령도(白翎島)에 유배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김방경이 유배를 갈 때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길을 막고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
ㅡ 「고려사절요」, 충렬왕 4년(1278), 2월 왕이 홍차구 등과 김방경을 다시 국문하고 유배보내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홍다구와 위득유 등을 소환하여 꾸짖고는 곧바로 김방경을 풀어주라 이른다. 그러나 정작 홍다구나 훈둔은 큰 벌을 받지 않았는데 이유는 홍다구와 훈둔이 당시 원나라 입장에서 고려를 관리하는데 매우 유용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홍다구가 작정하고 김방경을 처리하려고 했던 일인데 이를 겨우 쿠빌라이 칸이 직접 중재하면서 넘어간 것이다.
1280년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지만 믿을건 김방경밖에 없던 충렬왕은 거절한다. 이 때도 고려군의 물자 준비를 준비하던건 김방경이었는데 원나라 식으로 만들려고 했던 배들을 전부 고려 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다. 1281년 2차 일본 정벌군의 고려군 도원수로 임명되어 고려군을 이끌고 공을 세운다. 이후 전염병[15]과 악조건[16]으로 여몽연합군이 밀리게 되자 철군을 고민하던 때에 "우린 너희 왕이 3달이면 된다고 해서 3달 먹을 쌀 가져 왔는데 지금 도망가자는 말이냐? 아직 1달치 군량미가 남았고 남송 병력이 오면 일본군을 격퇴 할 수 있으니 기다려라"이라며 강력 제안해 퇴각을 막았다. 하지만 뒤늦게 온 남송 병력은 농기구나 들고 온 잡병들이 전부였던데다 병력들이 도착하고 3일 뒤에 태풍이 닥쳐 수군의 절반 가량이 쓸려가면서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고 말았다.
1280년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지만 믿을건 김방경밖에 없던 충렬왕은 거절한다. 이 때도 고려군의 물자 준비를 준비하던건 김방경이었는데 원나라 식으로 만들려고 했던 배들을 전부 고려 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다. 1281년 2차 일본 정벌군의 고려군 도원수로 임명되어 고려군을 이끌고 공을 세운다. 이후 전염병[15]과 악조건[16]으로 여몽연합군이 밀리게 되자 철군을 고민하던 때에 "우린 너희 왕이 3달이면 된다고 해서 3달 먹을 쌀 가져 왔는데 지금 도망가자는 말이냐? 아직 1달치 군량미가 남았고 남송 병력이 오면 일본군을 격퇴 할 수 있으니 기다려라"이라며 강력 제안해 퇴각을 막았다. 하지만 뒤늦게 온 남송 병력은 농기구나 들고 온 잡병들이 전부였던데다 병력들이 도착하고 3일 뒤에 태풍이 닥쳐 수군의 절반 가량이 쓸려가면서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고 말았다.
김방경ㆍ김주정ㆍ박구ㆍ박지량ㆍ형만호 등이 일본군과 힘껏 싸워 일본 군사의 머리 3백여 급을 베었다. 일본군이 돌진하여 오니 관군이 무너져 다구가 말을 타고 달아났는데, 왕만호가 다시 측면에서 공격하여 50여 급을 베니, 일본군이 마침내 불러가고 다구는 겨우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고려사》
1298년 관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 시기 고려의 암흑기를 지탱한 유일한 위인이라고 불러도 될만큼 활약이 많았다.
이제 이왕 일본과 대적한 이 중에, 족히 우리나라 민족의 명예를 대표할 만한 거룩한 인물을 구하건대, 고대에는 두 사람이니, 첫째는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요, 둘째는 신라 태종왕(太宗王)[17]이요, 근대에는 세 사람이니, 첫째는 김방경(金方慶)이요, 둘째는 정지(鄭地)요, 셋째는 이순신(李舜臣)이니 모두 다섯 사람이라.- 단재 신채호, <이순신전>에서
김방경은 군사적 능력은 물론 정치적 수완까지 고루 갖춘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인재였다. 관직을 물러난 이후에도 큰 의논거리가 있으면 왕이 김방경에게 자문을 구할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았다.
개인의 성품에 대한 평가 역시 뛰어난데, 매우 충직해 나라 걱정하기를 집안을 걱정하는 것처럼 했다고 한다. 또한 근검하고 엄격, 과묵하면서도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고, 아들이나 조카를 대할 때도 예의를 지켰다고 한다. 다만 김방경의 권세에 빌붙은 이들이 각지에서 횡포를 부렸으나 이를 막지 못했고, 일본 원정 당시 전공에 따른 포상을 내리는 과정에서 공정하지 못해 이로 인한 원망을 산 적이 있다고 한다.
동안거사 이승휴(李承休)는 김방경의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공작(公爵) 작위를 축하하는 단모부(旦暮賦)에서 공(公)이란 다섯 등급의 제후(諸侯) 중에서도 으뜸가는 작위이다. 외부로 나가면 모든 제후중에서 으뜸이 되고, 천자에게로 들어가면 천자 바로 다음이니 그 등급은 감히 발돋움을 하고 바라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 공(김방경)과 같은 분은 당대의 걸출한 패왕(覇王)의 영걸스런 기국을 지니셨으니 충(忠)과 의(義)와 인(仁)과 용(勇)과 지(知)와 모(謀)를 한 가지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으시니 전쟁에 나가면 장수요 조정에 들어오면 재상이니, 동쪽으로는 일본을 정벌하고, 북쪽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가셨다. 집채 많한 파도가 뱃머리에서 부서지고 아득한 북쪽 변방에서는 말발굽을 옮기기 힘들 정도였으나 이처럼 험난한 때를 당하여도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걸출하게 우뚝서서 지략을 발휘하여 자기 일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사졸과 더불어 고생을 같이하였다.
단재 신채호는 김방경을 고려의 최대 안사공신으로 평가 했다.
하지만 삼별초 토벌군의 지휘관을 맡았던 탓에 삼별초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몽골의 앞잡이라고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고려는 몽골를 이길 힘이 없었고 몽골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았다가는 또 몽골은 트집을 잡아 고려를 침략할 테고 그러면 죄없는 백성들이 죽어나갈 테니 김방경도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선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20]
오히려 김방경은 대몽항쟁 때 위도에서 몽골군을 물리치고 고려의 백성들을 보호한 전공도 있으며 이후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준비 당시 매우 혹독하기 그지없는 준비를 막고자 몽골과 고려 조정에 목숨을 건 충언을 올리기도 했다. 실제로 부원배들한테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고려 중기를 빛낸 충신이었지만 김경손 장군과 더불어서 정적들이 굉장히 많았다. 정치는 전쟁의 도구라는 점을 볼 때 김경손처럼 숱한 목숨을 뺏길 뻔한 매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충신이다. 또한 삼별초 진압 내내 한때 같이 싸운 동지들이자 같은 동족들과 싸우는 것 때문인지 심기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개인의 성품에 대한 평가 역시 뛰어난데, 매우 충직해 나라 걱정하기를 집안을 걱정하는 것처럼 했다고 한다. 또한 근검하고 엄격, 과묵하면서도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고, 아들이나 조카를 대할 때도 예의를 지켰다고 한다. 다만 김방경의 권세에 빌붙은 이들이 각지에서 횡포를 부렸으나 이를 막지 못했고, 일본 원정 당시 전공에 따른 포상을 내리는 과정에서 공정하지 못해 이로 인한 원망을 산 적이 있다고 한다.
동안거사 이승휴(李承休)는 김방경의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공작(公爵) 작위를 축하하는 단모부(旦暮賦)에서 공(公)이란 다섯 등급의 제후(諸侯) 중에서도 으뜸가는 작위이다. 외부로 나가면 모든 제후중에서 으뜸이 되고, 천자에게로 들어가면 천자 바로 다음이니 그 등급은 감히 발돋움을 하고 바라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 공(김방경)과 같은 분은 당대의 걸출한 패왕(覇王)의 영걸스런 기국을 지니셨으니 충(忠)과 의(義)와 인(仁)과 용(勇)과 지(知)와 모(謀)를 한 가지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으시니 전쟁에 나가면 장수요 조정에 들어오면 재상이니, 동쪽으로는 일본을 정벌하고, 북쪽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가셨다. 집채 많한 파도가 뱃머리에서 부서지고 아득한 북쪽 변방에서는 말발굽을 옮기기 힘들 정도였으나 이처럼 험난한 때를 당하여도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걸출하게 우뚝서서 지략을 발휘하여 자기 일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사졸과 더불어 고생을 같이하였다.
단재 신채호는 김방경을 고려의 최대 안사공신으로 평가 했다.
하지만 삼별초 토벌군의 지휘관을 맡았던 탓에 삼별초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몽골의 앞잡이라고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고려는 몽골를 이길 힘이 없었고 몽골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았다가는 또 몽골은 트집을 잡아 고려를 침략할 테고 그러면 죄없는 백성들이 죽어나갈 테니 김방경도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선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20]
오히려 김방경은 대몽항쟁 때 위도에서 몽골군을 물리치고 고려의 백성들을 보호한 전공도 있으며 이후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준비 당시 매우 혹독하기 그지없는 준비를 막고자 몽골과 고려 조정에 목숨을 건 충언을 올리기도 했다. 실제로 부원배들한테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고려 중기를 빛낸 충신이었지만 김경손 장군과 더불어서 정적들이 굉장히 많았다. 정치는 전쟁의 도구라는 점을 볼 때 김경손처럼 숱한 목숨을 뺏길 뻔한 매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충신이다. 또한 삼별초 진압 내내 한때 같이 싸운 동지들이자 같은 동족들과 싸우는 것 때문인지 심기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으론 김방경이 성년으로 있을 시점에 드라마 무신의 주인공을 난신적자인 김준보단 충신인 김방경으로 하는 게 더 나을 뻔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못해도 1년 이상의 분량을 찍어야하고, 제작비 문제와 그로 인해 시청률 문제가 역시 크다는 것이다. 고증도 어느 정도 나아지지만 크게 나아지지 않는게, 삼별초를 왜구와 결탁했다는 설정을 넣다가 또 종친회니 뭐니 하면서 시끄러워진다. 시청률 면에서도 문제인데 알다시피 교과서나 역사서에 나오는 것대로 충실하면 사람들이 너무 지루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김준이 주인공인 무신보단 훨씬 고증면에서 좋아진다는 것이다. 김방경과 관련해서 사극을 찍자면 이렇다.
- 1) 귀족으로 태어났으나 고려왕조가 신라계의 멸시를 꽤 오래하고 그로 인한 신라부흥운동과 관련된 이비 폐좌의 난과 관련해서 가문조차도 친인척이 연루되어 반역자로 찍히나 이내 부친과 본인이 관직을 얻어 백성들과 병사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인물로 훌륭한 귀족들이 있다는 이야기.
- 이것은 불멸의 이순신에 이순신 가문의 설정과 매우 비슷하지만 부친 김효인의 친인척이 이비 폐좌의 난 등과 연루되었다는 일각의 제기가 있긴하나 어디까지나 일각이다. 하지만 본관이 경주가 아닌 안동이라는 점을 봤을 때는 실제 역사는 몰라도 사극에선 그런 설을 제기할 법도 하다. 적어도 드라마 무신과 같이 아버지가 만적의 난에 연루되어 아버지는 죽고 이후 아들이 승려가 되어 이후 노비가 되어 호국영웅이 된다는 이야기 따위보단 낫다.
- 2) 권력 다툼으로 외지에 쫓겨나고, 죽을 위기를 수차례 넘기며 고생함.
- 드라마 무신과 같이 주인공의 고생담과 암살 떡밥을 넣다가 암살로 죽는 것을 넣는데, 죄다 불법행위로 인한 것이었다. 암살 또한 뇌물을 비롯해 온갖 부정한 방법과 관련한 다툼 끝에 죽었다. 김방경은 진짜로 권신들한테 찍혀 정계에 복귀를 하지 못했고, 그러한 불법행위와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부원배나 삼별초의 난 때 반역자들에게도 죽을 위기를 실제로 수차례나 넘겼다.
- 3) 신라황족의 후손으로 고려 역시 신라 후손 없이는 아무것도 안된다는 설정과 삼국시대는 물론 신라만도 못한 여몽전쟁때 고려를 개탄하나 자신을 돕던 일연의 이야기로 고려의 충신으로 남음.
- 4) 복귀하여 2인자가 됨
- 5) 내우외환으로 인한 고난을 겪음. 그리고 모두 극복 그리고 남은 여생을 무사히 마침.
- 몽골군의 침입과 반란군의 진압과 일본 원정전에 활약 등등으로 참소를 당하나 끈질기게 버틴 무인인 것은 맞다.
- 6) 왕조의 사직을 그나마 연명했던 고려 중기 최고의 충신.
등등이 있다. 실제로 드라마 무신에서도 김방경 장군이 이미 성년이 된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나와야 하는데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고, 그리고 드라마 무신에서 김준이 했던 바깥에서 나가서 싸웠다는 이야기도 실은 김방경 장군이 그 몫을 대신했다. 김방경 장군뿐만 아니라 후일 김방경 장군의 편에 선 사람들 죄다 김준이 했던 좋은 것을 대신 다 했고, 고려사 류경 열전과 고려사 김방경 열전만 봐도 드라마 무신에 나오는 김준의 왜곡이 꽤 황당한 편이다.
진주 대첩의 영웅인 충무공 김시민이 김방경의 12대손이며 백범 김구가 24대손이다.
일본쪽 위키에는 원정 도중에 쿠빌라이가 금지한 양민학살을 여러 차례 자행한 무법자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 위키에서는 入對馬島、撃殺甚衆라는 고려사의 기록을 예로 들지만, 여기서 衆은 백성 외에도 무리라고도 번역이 된다. 따라서 이 기록만 가지고 김방경이 양민학살을 저질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팔번우동기(八幡愚童記)이라는 기록 역시 김방경이 양민학살을 했다고 하고는 있으나 기록의 신빙성이 의심된다. 팔번우동기는 하치만신에 대해 가르치는 아이들용 교과서인데 출전부터가 불명인데다가 실제로 거짓으로 판명된 일부 기록들도 있다. 가령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이 대표적이다. 저런 기록들은 실제로 저랬다기보다는 그냥 '옛날옛날에 무시무시한 마녀가 살았대.'라는 수준의 기록으로 봄이 타당하다.
그런데 이 사람의 집안은 일본과는 참 악연이 깊다. 김방경은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때 고려군의 대장으로 임명되어 일본을 쳤고, 김방경의 외현손 박위[21]는 고려말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 토벌을 통해 명성을 쌓았으며, 1390년 창왕 2년에 제1차 대마도 정벌을 지휘 했다. 김방경의 12대 후손인 김시민은 진주성에서 3800여 명의 수비군으로 3만 명의 일본군 중 2만의 일본군을 몰살시켰고, 24대손인 김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홍커우공원 의거 등을 조직하며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저지른 악행만을 두고서 볼 때는 그야말로 충신이자 구국의 영웅들을 배출한 충신가문이라 할 수 있다.
여몽연합군의 고려군 대장으로 참전했기 때문인지 일본에서도 유명해서 칭기즈 칸 게임 등에서 고려의 장수로 나온다. 문제는 고증을 잘못 해서 열전에 삼별초의 장수로 분류되는데 실제 김방경은 삼별초를 토벌한 장수다. 아마도 같은 게임 시리즈에서 고려 장수로 자주 등장하는 김통정 등과 버무려 대충 고증하다보니 생긴 오류로 보인다.
원조비사에선 유저 시나리오의 장수들 중 그나마 가장 강한 장수. 지휘가 B 정도였던가... 이 게임은 능력치가 5 종류(A, B, C, D, E)뿐이라 C 이상이면 그럭저럭 괜찮은 장수이니 말이다. 징기스칸 4에서 고려 최강의 장수(...)의 자리는 김통정에게 빼앗겼다. 능력치는 정치 43, 전투 54, 지모 51에 특기는 내정 특기 등용 하나뿐이고 전투에 관련된 특기는 하나도 없다. 병과 특성도 보병 B, 궁병 D, 기병 C, 수군 C로 특별할 게 없다. 그나마 플스판에선 전투가 62로 올라갔지만 사실상 이 게임의 고려 장수 중 부당할 정도로 피해를 본 장수 중 하나로, 일본 원정에 참여한 장수라는 이유만으로 저평가됐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래도 등용 특기가 있으니 초반에 간첩질로 원의 사천택을 먼저 빼내고 사천택과 함께 간첩 유닛을 돌려서 원과 남송의 능력치 높은 장수들을 빼내는 용도로 쓸 수 있다.
이노우에 야스시[23]의 소설 <검푸른 해협>[24]에서는 원종, 충렬왕과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63년에 나온 이 소설은 미군정하의 일본을 몽골 지배하의 고려에 빗대어 냉전 때 군사기지화된 일본의 상황을 비판하기 위한 작품이지만,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원사와 고려사를 탐독하는 것은 물론 한국에도 세 번 방문했다고 한다. 김방경은 냉혹한 매국노인 홍다구와 대립각을 세우는 열렬한 충신으로 등장해서 어떻게든 원나라가 고려에 끼치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고려를 살아남게 하려고 애를 쓴다. 소설의 형식이 굉장히 특이한데, 사료를 거의 나열하다시피 하면서 사이사이에 창작신을 끼워넣는 식이다.
드라마 무신에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일본의 쓰시마가 주인공이 되어 여몽연합군을 막아내는 내용을 다룬 일본의 만화 앙골모아 ~원구전투기~에서는 두뇌와 용맹이 출중한 중간보스로 등장한다. 담당 성우는 마츠야마 타카시. 주인공이 이끄는 쓰시마군 잔당에 의해 자식을 잃어도[25] 냉정함을 확실히 유지하고 야간기습을 당한 상황에서 소리만 듣고도 적들의 수를 바로 알아차리는 등 능력있고 현명한 장군으로 묘사된다. 한편 원정군 부원수씩이나 돼서 직접 칼 들고 단독으로 쓰시마군을 사냥하려고 날뛰는 유복형을 여진족 놈이라 부르며 불쾌하게 생각한다.[26] 그가 이끄는 고려군 또한 효율적인 집단 전술을 통해 쓰시마 도주의 소규모 군대를 간단히 분쇄해버리는 등 강력한 모습을 보인다.
[1] 여담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산 황제가 청나라 건륭제(1711~1799)로 김방경과 같은 만 88세라는 걸 생각해보자...[2] 하지만 뛰는 이 위에 나는 이라고, 놀랍게도 김방경보다 더욱 장수하여 90대까지 산 이도 있고, 심지어 100살을 넘은 이도 존재한다. 김방경보다 27세 연하인, 정승 최유엄(1239-1331)은 92세까지 살았고, 현종 4년 계축년 1013년 9월 경술일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보국대장군 송능과 표기대장군 유손은 태조를 섬겼던 무인으로 당시 나이가 100세에 달하여 대광의 품계를 받았다.[3]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에 있는 섬. 청천강 하구에 있다.[4] 김방경의 시대로부터 약 300여 년 뒤에 명량 해전이 일어나는 곳이다.[5] 김방경의 부장. 이후 원나라의 일본원정 때도 김방경의 부장으로 동참하였다.[6] 그의 아버지인 홍복원이 영녕공 왕준과 토지 문제로 서로 대립을 벌였는데 영녕공의 부인이 원나라 황족 출신이었다. 이에 그녀가 직접 조정에 홍복원의 살해를 사주했고 결국 수 십 명의 장사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영녕공이 바로 승화후 왕온의 동생이었다.[7] 원종과 마찬가지로 영녕공 역시 자신의 아들들을 삼별초 진압군에 참여시키기까지 하며 형인 승화후를 구하려 했다.[8] 몽고가 땅에서 싸우는 육전에는 최강이었어도 대륙민족인 탓에 물에서 싸우는 수전에는 약하니까 삼별초의 난을 진압할때는 고전했는데 그때 김방경과 그가 이끄는 고려군이 수전에서 보여준 뛰어난 용맹과 능력을 훈둔 역시 인정한것이다.[9] 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고자 국가 차원에서 임명하는 사절.[10] 그러나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이때 쿠빌라이 칸이 말하길 "저항하다가 멸망당한 황족의 왕 따위가 어찌 고려의 재상 김방경보다 높겠냐만은 나이가 많으니 우대하는 뜻으로 윗자리에 앉히겠다"고 말하였다. 나이를 생각해서 남송 황족의 왕보다 아래지만 실제 취급은 왕보다도 위였던 셈.[11] 셋 모두 김방경에게 원한이 있는 인물들이다. 위득유는 일본 정벌 때 자신의 상관인 김신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를 두고 부장으로서 그를 구하지 않았다고 김방경이 책임을 물어 파면된 적이 있었다. 노진의는 김방경과 함께 삼별초 토벌에 참가하였으나 전투에 집중하기는커녕 약탈이나 저지르고 다니다가 김방경에 의해 약탈한 재산을 나라로 몰수당했다. 김복대는 자세한 내용은 나와있지 않으나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고 한다.[12] 강화도를 지칭.[13] 최항의 측근이었으며 김준을 도와 최의를 몰아내며 공신이 되었으나 이후 원종 때 유배됐다. 삼별초의 난 때 강화도에 있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왕을 알현했고 이에 삼별초와 함께 모반을 할 줄 알았던 류경이 제발로 찾아오자 원종이 기뻐하며 그에게 다시 관직을 내렸다.[14] 첨의중찬(僉議中贊). 고려의 실질적 최고 관직이다. 원 간섭기에 관제격하로 문하부가 첨의부로 격하되고 문하시중이 첨의중찬이 되었다. 여기서는 김방경을 지칭한다.[15] 이 때 사망한 고려군이 30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16] 애초에 참전하려고 했던 남송 출신의 병력이 6개월이 지나도 참여하지 않았고 일본군의 저항도 강해서 진군에 애를 먹었다.[17] 신라 태종왕이라면 태종 무열왕이지만, '일본과 대적한 이'라고 말했으니 사실은 문무왕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신채호가 혼동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18] 향년을 알 수 있는 숭의전에 배향된 고려 인물 가운데 2번째로 장수한 사람은 강감찬이다.[19] 충렬왕과 같은 시호인데 그 이유는 김방경이 죽었을 때는 충렬왕이 살아있어 충렬이라는 시호가 겹치지 않았다. 하지만 원나라가 충선왕 2년에 죽은 왕의 시호를 '충렬'이라고 정하며 겹치게 된다.[20] 게다가 고려는 길고 긴 항쟁으로 온나라가 황폐해지고 20만 명이 넘는 백성들이 죽거나 몽골로 끌려가고 안 그래도 나라가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상황이었던지라 또 몽골의 침략을 받았다면 삼별초가 기치로 내세웠던 국가의 자존심은 고사하고 백성들의 말살과 국가의 멸망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21] 김방경의 손자 찬성사 김영휘의 외손자[22] 저 얼굴은 시나리오 3에서 등장하는 몽골 장수인 곽간의 얼굴로 쓰인다.(...)[23] TV 드라마로 제작된 풍림화산의 원작자로, 역사소설계의 거장 중 한 명이다.[24] 원제는 풍도(風濤). 쿠빌라이가 고려에 내린 조서의 한 구절에서 따온 말로, 원래 구절은 바람(風)과 파도(濤)가 험하다는 걸 변명으로 삼지 말라'라는 내용.[25] 사실 이는 역사왜곡으로 김방경은 일본 원정에서 아들을 잃은 적이 없다. 장남 김선이 일찍 죽었는데 그는 일본 원정 전에 죽었다. 김방경의 차남 김흔이 아버지를 따라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모두 참전했었고 충선왕 초년까지도 생존했다.[26] 사실 김방경이 열 받을 만했다. 누구는 아들이 죽었는데도 애써 감정 억누르면서 기지를 방어하려 노력하는데, 갑자기 나타난 오랑캐 상관이라는 놈은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김방경 자신의 아들이 죽은 것을 들먹거리기나 하니 말이다. 게다가 위로는 커녕 아들 죽인 놈은 실력이 꽤나 되는 듯하다면서 죽은 아들을 전투력 측정용으로나 여기는 말을 내뱉고, 부원수라는 중요 직책에 있으면서도 적들이 우글거리는 산 속에 혼자 가서 일기토(...)를 벌여 그놈을 잡겠다는 원정 제대로 망칠 헛소리나 해대는데 화가 안 나면 그게 이상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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