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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 나무위키

김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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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범 목록 ]
김민기 1집
김민기 1
김민기 2
김민기 3
정규 1집


1971. 10. 21.
시리즈 1집

김민기 1

1993. 2. 15.
시리즈 2집

김민기 2

1993. 2. 15.
시리즈 3집

김민기 3

1993. 2. 15.
김민기 4
시리즈 4집

김민기 4

1993. 2. 15.
김민기의 수훈 및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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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예술대상로고(1)
baeksangartsawar...
연극 부문 대상
제36회
2000년
제37회
2001년
제38회
2002년
김민기
(의형제)
폐지[1]
연극 부문 연출상
제36회
(2000년)
제37회
(2001년)
제38회
(2002년)
김민기
(의형제)
폐지[2]

괴테 메달 백색
괴테 메달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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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 펼치기 · 접기 ]
2000년
2001년
2002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4년
2005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괴테 메달 백색
한국인 및 한국계 외국인 괴테 메달 수상자
1995년
1998년
2007년
윤이상(독일)
백남준(미국)
* 괄호는 수상 당시의 국적

KMAlogoblack1
공로상
이판근
(2011년)
김민기
(2012년)
박성연
(2013년)
한국뮤지컬어워즈 로고
공로상
제2회
(2010)
제3회
(2011년)
제6회
(2012년)
공석
공석
제7회
(2023년)
제8회
(2024년)
제0회
(2025년)
-
김민기
金敏基 | Kim Min-gi
김민기프로필고화질
출생
사망
2024년 7월 21일 (향년 73세)
장지
국적
학력
병역
데뷔
가족
배우자 이미영
장남 김종화
차남 김소윤
종교
직업
가수, 작곡가, 뮤지컬 제작자, 극단 학전 대표
수상
[ 펼치기 · 접기 ]
백상예술대상 음악상 '개똥이'
한국평론가 협회 음악극 부문 연극상
서울연극제 극본상, 특별상 《지하철 1호선
한국연극협회 '98 우수공연 5' 단체상, 번안상 《의형제》
제35회 동아 연극상 작품상 《의형제》
제6회 한국 뮤지컬 대상 특별상
제3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분 대상 및 연출상 《의형제》
파라다이스상 문화예술부문
괴테 메달
제5회 더 뮤지컬 어워즈 공로상
제10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2018년 대중문화예술상 문화훈장 은관

1. 개요2. 생애3. 작품 목록4. 여담
4.1. 인간관계

1. 개요[편집]

청년 문화를 노래한 포크 뮤지션

나는 뒷것이야, 너희는 앞것이고.

김민기

대한민국싱어송라이터, 작사, 작곡가, 뮤지컬 연출가, 극단 학전 대표, 민주화 운동가.
젊은김민기
30대의민기
20대 시절
30대 시절
attachment/kmk11
현재민기2
50대 시절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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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작품 목록[편집]

김민기의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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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1집 (1971年)
아하 누가 그렇게
저 부는 바람
그날
눈길(연주곡)
세노야*
4월**
김민기 전집 1 (1993年)
두리번 거린다
아침 이슬(연주곡)
잃어버린 말
그날
김민기 전집 2 (1993年)
새벽길
나비
고향 가는 길
눈산
차돌 이내몸
아무도 아무데도
바다
눈길(연주곡)
김민기 전집 3 (1993年)
서울로 가는 길
강변에서
소금땀 흘리흘리
밤뱃놀이
김민기 전집 4 (1993年)
아하 누가 그렇게
작은 연못(연주곡)
날개만 있다면
인형
고무줄 놀이
아침(연주곡)
그 외 나무위키에 등재된 작품
*갈색 재킷 버전에서 꽃 피우는 아이가 빠지고 들어간 곡.
**갈색 재킷 버전에서 꽃 피우는 아이가 빠지고 들어간 곡. 사실 이 곡은 딥 퍼플(Deep Purple)의 곡 "April"의 앞 부분이 무단으로 쓰인 곡인데 이는 김민기 본인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다.
***기울임체는 2004년 'Past life of 김민기' 수록작.

4. 여담[편집]

  • 노래를 작곡할 때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즉석에서 작곡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산문을 쓰고 악상이 떠오르면 바로 쓴다고 한다. 상록수, 친구, 기지촌,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그렇게 작곡된 노래들이며, 이는 김민기의 지인에 의해 밝혀진 내용이므로 아직 밝혀지지 않는 즉석곡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른다.
  •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민중가요인 아침 이슬상록수를 작사/작곡한 전설적인 민중가수임에도 정치적 의견을 직접적으로 피력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의 운동권 예술가들은 현실 정치로 진출한다든지 하다못해 성명서에 동참하며 정치적 의견을 직접적으로 피력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김민기는 간접적으로만 정치적 표현을 했을 뿐 직접적으로는 본인의 정치적 의견을 전혀 밝힌 적이 없다. 물론 그의 노래가 군부정권 시절 미친 영향력은 수도 없이 크지만 정작 김민기 본인이 공식 석상에 나오기를 꺼리는 것과 더불어 직접적으로 본인이 정치적인 인물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던 것은 김민기의 오랜 특징으로 꼽힌다.
  •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학살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광주로 향했으나 장성에서 계엄군에 막혀 실패했다고 한다. #
  • 광주와는 또다른 인연이 있는데 당시 5.18 민주화운동 참여자이자 신예 작곡가였던 김종률과 무등산을 함께 등반한 후 '이곳이 무등산 타잔 박흥숙이 살았던 곳이고 어제가 그의 사형이 집행된 날이다' 라며 김종률에게 '민중과 민주화, 자유를 위해 노래하라' 고 당부했고 김민기와 헤어진 이후 김종률이 틈틈이 작곡하던 노래집 중 한곡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 2016년 밥 딜런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국의 노벨문학상 후보로 잠시 언론이 뜨거워기도 했다. 같이 언급된 것은 일본의 하루키 작가이며, 어떤 기사는 한국의 밥 딜런으로 한대수를 언급하기도 했다. #
  • 윤이상, 백남준과 더불어 국내의 세 번째 괴테 메달 수상자다. 수상 작품은 뮤지컬 지하철 1호선.
  • 김민기가 창단한 극단 학전이 배출한 배우들이 꽤 유명하다. '학전 독수리 오형제'로 널리 알려진 김윤석, 황정민, 설경구, 조승우, 장현성 등 모두 대학로의 학전을 한 번씩 거쳐간 인물들이다. 학전은 동명의 직영 소극장도 대학로에 33년 가까이 운영했었지만, 2023년 말년을 바라보는 김민기 본인의 병세 악화와 경영난으로 인해 극장 문을 닫게 되었다.[4] 그 외에도 전배수, 이정은, 배성우, 배해선, 김희원, 안내상, 김원해, 방은진, 나윤선[5] 등 열거 할 수 없이 많은 이들이 학전을 거쳐갔다. 노래로 유명한 학전 출신 가수는 김광석, 유재하[6], 김민기 본인 등이 있다.[7][8]
  • 김광석추모사업회의 회장이다. 김광석 다시부르기 프로젝트도 그의 소관이라고. 생전에 김광석은 김민기 덕에 대학로의 스타가 될 수 있었고, 김민기 또한 그의 등장으로 학전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서로가 은인인 셈. 김광석 관련 사업을 생전 그의 멘토였던 김민기가 맡는 것에 이의를 품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김광석 다시부르기 프로젝트로 약 4억 3000만원이 모였고, 혹여 가능하다면 이를 통해 2018년이나 혹은 그 다음 해에 김광석의 이름을 딴 장학 재단을 만들겠다고 김민기가 직접 언급했다. 분명 김광석의 노래라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텐데, 왜 그러지 못했는지는 하단 '인간관계' 문단의 김광석 항목 참조.
  • 휘파람을 잘 분다. 1971년 김민기 첫 앨범에 수록된 연주곡 '눈길' 의 휘파람 반주도 본인이 직접 불렀고, 22년 뒤 녹음한 그사이와 천리길의 휘파람 반주도 본인이 직접 불었다.
  • 자신의 목소리가 낮은 것을 단점으로 여기는 듯하다. JTBC 뉴스룸의 인터뷰에 등장했을 때, 자신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손석희에게 자신은 목소리가 낮아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대답했다. 김민기의 노래인 봉우리, 친구, 가을편지 등이 낮고 나긋한 목소리로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던 것을 생각하면 의외인 점이다.
  • 김민기의 팬 사이트 격으로 김민기 마이너 갤러리가 개설되었다. 김민기 마이너 갤러리
  • 김민기의 추모사이트 아름다운사람, 김민기가 개설되었다.

4.1. 인간관계[편집]

양희은이 김민기의 재동초등학교 1년 후배. 아침 이슬을 양희은에게 건넴으로써 양희은의 히트적인 데뷔에 도움을 주었다. 이외에도 양희은의 많은 히트곡들[9]을 작곡하여 양희은이 70년대의 일약 스타로 도약하는 것에 크게 공헌했다. 사실상 지금의 양희은을 만든 것이 김민기라고 말하는 것도 과하지 않다. 양희은의 동생 연극배우 양희경과도 친분이 있다고 한다.
녹음불
'행복의나라 2013' 뮤비에서 한대수가 자신과 전인권, 김민기를 '녹음불가 3형제'로 칭하고 있다.
세 사람 모두 이제는 나이가 들어, 현역에서 은퇴하여 더 이상 음반 녹음이 힘들다는 뜻.
김민기와는 절친한 관계. 한대수와 김민기 모두 대한민국 포크 음악을 발전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했으며, 음악이 메시지를 띠고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실제로 1971년 김민기의 앨범에 한대수의 음악 '바람과 나' 가 실리기도 했고, 한대수도 2013년에 부른 '행복의 나라' 에서 '이제 나이 들어서 (음반을) 녹음할 수 없는 사람들' 로 김민기와 전인권을 뽑았다. 이를 통해 전인권과의 커넥션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민기의 대학시절, 김민기가 만든 2인조 밴드 '도비두' 의 멤버였던 인물. 김민기와는 절친한 관계라고 한다. 현재는 산업 디자이너로 이노디자인의 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김지하와도 제법 연을 맺었는데, 김민기는 시인 김지하를 고평가하며 그가 가수가 되는 과정에서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에 쓰일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다만 그의 정치적 성향과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김지하가 말년인 2010년대 한동안 박근혜를 지지하는 등[10] 정치적 행보를 보인 것에 대해 김민기는 사적인 정도 섞어서 김지하와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예전에도 문화운동 쪽에서는 김지하 옆에 내 이름이 늘 따라붙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꼭 하는 말이 있었다. 내가 김지하한테 무한한 고마움을 가지는 건, 내게 우리말의 생동성을 처음 깨우쳐준 선배라는 점. 문자에 갇혀 있지 않고 살아 있는 말의 생동성. 그게 판소리하고도 통하는 건데… 그래서 내가 학전 배우들한테도 유난히 강조했던 게, 배우는 ‘모국어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이었다. 그 점에 있어선 여전히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난 그 양반의 사상적인, 정치적인 입장에는 전혀… 그건 나와 무관한 일이고 영향을 준 바도 없어. 최근 몇 년 동안 그 양반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도 난 뭐 코멘트 할 게 없지. 그건 그 양반 생각이고.”

한겨레 인터뷰#
김광석이 처음 데뷔를 하게 된 것이 김민기의 극단 '학전'의 배우로서였다. 처음에 김광석이 김민기 앞에 왔을 때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학전이 빚을 떠안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불렀는데, 의외로 큰 히트를 거두었다고 한다. 땡볕 아래 사람들이 모두 학전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고 할 정도. 김민기는 그를 보고 '싱어송라이터들은 대개 자신들의 노래만 진창 부르려고 하는데, 그는 다른 이들의 좋은 노래도 부르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그의 좋은 점이었다' 라며 그를 칭찬했다. 김광석 사후, 김광석 추모사업의 회장을 맡았다. 김광석 추모사업 중 하나였던 '김광석 다시부르기' 콘서트로 인하여 학전에 사람들이 쏠리니, 밖의 대형 극장으로 콘서트를 옮겼다. 한 기자가 '오는 돈도 마다하는 것 아니냐' 라고 물어보니, "나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지, 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일언했다. 김민기는 사망 몇주 전 후배 가수 박학기와의 통화에서 마지막으로 "광석이 추모 공연을 김광석추모재단과 잘 진행해 달라"는 부탁을 남겼다고 한다.#
공장의 불빛을 만들 때도 송창식의 개인 녹음실에서 송창식이 직접 녹음해주었고, 김민기 앨범 1에 수록된 송창식 작곡의 '내나라내겨레', 송창식이 부른 김민기 작곡의 이 세상 어딘가에 등, 김민기와 굉장히 많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둘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뉴스, 기사는 없지만 굉장히 친했던 듯. 사실 자칫 발각되면 함께 연행될 수 있었던 공장의 불빛의 녹음을 도와주었다는 것 자체가 어지간히 믿는 사이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희은이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송창식은 김민기에 대해 이야기하길 "아마 김민기가 세상에 나왔다면 나는 없었을 거다"라고 말했다고... 반면에 김민기는 송창식을 형님으로 칭하면서 대인이시며 자신에 대한 송창식의 평가에 매우 쑥스러워하는 인터뷰가 있다. 한수진의 선데이클릭.
이수만이 1살 어린 동생으로, 같이 동아리 활동도 한 서울대 후배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수만이 평소 김민기를 형님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1978년 유신 정권 시절 가수였던 이수만이 밤무대에서 김민기가 만든 금지곡 아침 이슬을 불렀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을 뻔한 적도 있었다. 김민기가 사망한 2024년 7월 22일에도 직접 빈소를 찾아 "역경과 성장의 혼돈 시대, 대한민국에 음악을 통해 청년 정신을 심어줬던 김민기 선배에게 마음 깊이 존경을 표하며 명복을 빈다"라고 애도했다고 전해진다. 발인식 하루 전인 7월 23일엔 조문객 식사비용하라며 조의금으로 5000만원을 건네기도 했지만 유족 측이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며 받진 않았다. 이전에도 이수만은 생전 고인이 운영하던 학전이 폐관할 당시 1억 원 이상을 쾌척했다고 알려졌다. 많이 존경했던 모양.
들국화의 전인권은 김민기가 프로듀싱한 겨레의 노래 음반에 참여해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다. 당시 곡 해석을 둘러싸고 김민기와 의견이 달랐다고 한다. 전인권에게 김민기는 우상이자 컴플렉스고 대한민국에 둘도 없는 천재다. 관련 기사.
전인권이 필로폰 복용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을때 김민기가 증인으로 출석해 전인권에 관해 증언한 바 있다.관련글 관련기사 관련기사
전 국무총리인 정운찬에게 부인될 사람(서울대 미대 동문)을 소개해주었다고 한다 관련기사 관련기사
음악평론가 강헌의 주선으로 조용필과 방배동 근처에서 만나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조용필이 노래방 기기로 아침이슬을 불렀다고 한다. 당시 만남에 대해 강헌이 다소 과장된 어법으로 흥미진진하게 얘기한 바 있다. '김민기와 조용필의 만남' - 강헌. 조용필이 아무래도 김민기보다 늦은 시기에 활동한데다가 주요 음반이 현대가요이기 때문에 김민기보다 젊을 것 같지만, 알고보면 김민기가 조용필보다 1년 후배이다.
설경구는 무명 시절 지하철 1호선에 출연을 하면서 연기 경력을 쌓았고, 당시 연출자였던 김민기를 은인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설경구 말고도 황정민, 김윤석, 장현성, 조승우는 학전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학전의 독수리 오형제’라는 호칭과 함께 신인 시절 대학로에서 주목을 받았다. 관련기사 관련기사
조영남과는 젊었을 때부터 친한 사이로 술을 같이 자주 마셨다고 한다. 관련기사. 조영남과 쎄시봉 멤버들이 김민기의 환갑잔치를 해주었다고 하며, 이와 관련해 조영남이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때 TV 출연이 손에 꼽히는 김민기가 무려 공중파 방송에서 전화연결로 깜짝 출연한 적이 있다. #
들국화의 최성원에게도 김민기는 우상이자 존경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들국화 1집 이후 매니저 김진성씨와 함께 했던 이유가 바로 김민기의 음반을 제작했기 때문이라고.. 더 나아가 음악사상이나 철학에도 영향을 미친 듯 하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사회적 의식은 백기완 선생과 김민기 형으로 끝났다고 할 정도. 관련 기사.

[1] 2020년 제56회 연극부문 부활.[2] 2020년 제56회 연극부문 부활.[3]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중앙동[4] 다행스러운 건 김민기 사후에도 학전이 완전히 폐쇄될 일은 없는듯하다. 건물주와 합의한 다음 리모델링후 재개장할 예정이라고...[5] 재즈가수 데뷔 이전에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 가수로서 성공적인 데뷔 이후 나윤선은 영어가사 위주의 앨범에도 한두 곡씩 한국어 노래를 꼭 수록했는데, 3집 앨범에 김민기의 아름다운 사람, 5집 앨범에 '세노야'를 불러 수록했다[6] 김민기가 유재하로 하여금 '가요계의 블루칩 같은 존재' 라고 언급한 적도 있다.[7] 실제로 학전을 창단한 뒤로도 김민기는 자신의 음악 활동을 이어갔으며,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1993년 김민기 전집 1~4이다.[8] 1993년 김민기 전집 1~4을 발매했을 때에는 주요 일간지가 발매 소식을 비중있게 소개하다 못 해 발매일에는 아예 1면 머리기사로 싣기까지 했다.[9] 아침 이슬, 상록수[10] 이후 탄핵 과정 등을 거치면서 지지를 철회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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