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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2·5대 국회의원 김광준 金光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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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11월 15일 강원도 울진군(現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태어났다.
일본 도쿄도 주오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고 조선변호사시험, 조선총독부 보통문관시험,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및 행정과에 합격해 일제강점기 말 관료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후 경찰공무원에 입직해 경감에 올랐고, 전라남도경찰청 경무과장을 거쳐 1946년 7월 18일부터 1947년 10월 25일까지 제3대 춘천경찰서장을 역임했다. 이후 변호사를 개업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강원도 울진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징계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8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위원에 선임되며 훗날 이 법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49년 9월 29일 국회에서 강원도의 실정보고를 하였다. 그는 1949년 8월에 일어난 인제사건으로 국군이 후퇴한것으로 인해 민심이 동요되었다고 말하였으며, 범죄수사기관 난립과 군경의 비용염출이 심각하다고도 말하였다.# 1949년 10월 1일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김명동 의원의 석방에 동의를 표했다. 며칠 후인 10월 8일 강원도 태백산 인근에서 좌익 공비들에 의해 벌어진 소요사태를 보고하였고 태백산 사건 조사하기 위한 소란지구 소개대책위원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1950년 1월 대통령책임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헌법 개정안에 찬성을 표했다.# 1950년 3월 내무치안위원장대리로 국회의원 선거법의 질의응답을 하였고 국회의원 선거법을 제정하는데 기여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내무치안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51년 2월 20일 엄상섭 의원등이 발의한 '국회법 중 개정법률안'에 대해 반대하였다.[1] 며칠 후인 2월 27일 내무치안위원회 위원장 서민호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못오자 방공법을 국회에서 질의응답하여 방공법을 제정하는데 기여하였다.[2]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자유당 전만중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자유당 전만중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때 동생 김명윤이 처가가 있는 강원도 강릉시 선거구에 같은 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서 형제 국회의원으로 주목받았다.
1963년 민정당에 참여하였으나 제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당으로 당적을 변경하고 경상북도 울진군-영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정당 진기배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지역구를 매제 오준석에게 물려주었다.
1971년 2월 24일 새벽 2시 50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이화여자대학교 동대문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일본 도쿄도 주오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고 조선변호사시험, 조선총독부 보통문관시험,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및 행정과에 합격해 일제강점기 말 관료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후 경찰공무원에 입직해 경감에 올랐고, 전라남도경찰청 경무과장을 거쳐 1946년 7월 18일부터 1947년 10월 25일까지 제3대 춘천경찰서장을 역임했다. 이후 변호사를 개업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강원도 울진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징계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8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위원에 선임되며 훗날 이 법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49년 9월 29일 국회에서 강원도의 실정보고를 하였다. 그는 1949년 8월에 일어난 인제사건으로 국군이 후퇴한것으로 인해 민심이 동요되었다고 말하였으며, 범죄수사기관 난립과 군경의 비용염출이 심각하다고도 말하였다.# 1949년 10월 1일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김명동 의원의 석방에 동의를 표했다. 며칠 후인 10월 8일 강원도 태백산 인근에서 좌익 공비들에 의해 벌어진 소요사태를 보고하였고 태백산 사건 조사하기 위한 소란지구 소개대책위원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1950년 1월 대통령책임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헌법 개정안에 찬성을 표했다.# 1950년 3월 내무치안위원장대리로 국회의원 선거법의 질의응답을 하였고 국회의원 선거법을 제정하는데 기여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내무치안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51년 2월 20일 엄상섭 의원등이 발의한 '국회법 중 개정법률안'에 대해 반대하였다.[1] 며칠 후인 2월 27일 내무치안위원회 위원장 서민호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못오자 방공법을 국회에서 질의응답하여 방공법을 제정하는데 기여하였다.[2]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자유당 전만중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자유당 전만중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때 동생 김명윤이 처가가 있는 강원도 강릉시 선거구에 같은 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서 형제 국회의원으로 주목받았다.
1963년 민정당에 참여하였으나 제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당으로 당적을 변경하고 경상북도 울진군-영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정당 진기배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지역구를 매제 오준석에게 물려주었다.
1971년 2월 24일 새벽 2시 50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이화여자대학교 동대문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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