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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말기 진성여왕 시대에 신라 왕실의 부패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자연재해가 잇달아 일어났다. 889년 국고가 비게 되자 전국에 세금을 독촉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났고 전국에 반란군이 잇달아 일어나게 되었다. 기훤은 죽주[1]를 기반으로 한 세력이었다.
891년 궁예가 세달사에서 나와 가장 먼저 찾아간 것은 기훤이었다. 세달사는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으로 추정되는데, 궁예는 더 가까운 북원[2]의 양길 대신 굳이 멀리 기훤에게 찾아간 것과 후삼국시대 지방세력 중에서는 독보적으로 적괴(賊魁)라는 칭호(?)를 갖고 있기도 한 점을 보면 궁예가 몸담을 당시에는 기훤이 양길 이상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었거나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기훤은 궁예를 우습게 보고 소홀하게 대했고 궁예는 기훤의 부하였던 신훤, 원회 등과 함께 북원의 양길에게로 옮겨갔다.
이후에는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궁예와 양길의 양강 구도로 가고 궁예가 승리해 후고구려를 건국하는 과정을 보면 얼마 못가 패망한 것으로 보인다.[3]
891년 궁예가 세달사에서 나와 가장 먼저 찾아간 것은 기훤이었다. 세달사는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으로 추정되는데, 궁예는 더 가까운 북원[2]의 양길 대신 굳이 멀리 기훤에게 찾아간 것과 후삼국시대 지방세력 중에서는 독보적으로 적괴(賊魁)라는 칭호(?)를 갖고 있기도 한 점을 보면 궁예가 몸담을 당시에는 기훤이 양길 이상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었거나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기훤은 궁예를 우습게 보고 소홀하게 대했고 궁예는 기훤의 부하였던 신훤, 원회 등과 함께 북원의 양길에게로 옮겨갔다.
이후에는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궁예와 양길의 양강 구도로 가고 궁예가 승리해 후고구려를 건국하는 과정을 보면 얼마 못가 패망한 것으로 보인다.[3]
자세한 내용은 기훤(태조 왕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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