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옥사에서 넘어옴
※ 대한제국기의 사건 포함 |
전 도사(都事) 조대중(曹大中)을 하옥하여 죽였다. 대중이 전라 도사가 되어 역변의 초기에 부안(扶安)의 관창(官娼)을 대동하고 보성(寶城)에 이르러 서로 이별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에 종인(從人)이 지체하는 것을 지루하게 여겨 밖에 나와 사람에게 말하기를 ‘현재 울고 있는 중이니 어느 겨를에 길을 떠나겠는가.’ 하였는데, 이 말이 와전되어 ‘대중이 정여립의 죽음을 듣고 방에 들어가 울었다.’는 것으로 되었다. 홍여순이 이 말을 듣고 보성군의 향관(鄕官)·이복(吏僕) 등에게 첩문(牒問)하니, 모두들 공술하기를 ‘관창과 이별하며 눈물을 흘린 것은 사실이다.’ 하였다. 그런데 그 설이 유소(儒疏)에서 ‘적을 위해 울었다.’로 되어 마침내 대론(臺論)에 나와 나국(拿鞫)하게 된 것이다.
대중이 공초하기를 ‘여립이 죽었다는 것을 들은 날 나는 광주(光州)의 향가(鄕家)에 있었다. 담양 부사(潭陽府使) 김여물(金汝岉)이 내방하여 「국적(國賊)이 이제 죽었으니 오늘은 술 마시며 즐겨도 관계없을 것이다.」 하기에 여물과 함께 종일토록 술자리를 벌이고 크게 취한 뒤에 파하였다. 증명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때 여물이 서울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는데도 국청에서는 물어보지 않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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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사(朝士) 김빙(金憑)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평소 눈병을 앓아 바람만 쏘이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립을 추형(追刑)할 때 김빙이 반행(班行)에 서 있었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 흐르는 눈물을 아무리 닦아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논핵을 입고 국문을 받다 죽었다. 이 당시 와언(訛言)이 날로 일어나 대론(臺論)이 매우 준엄하였으므로 이런 식으로 억울하게 걸려든 자가 많았다.[2]조선왕조실록 선조 23년 3월 1일 기사
발단은 선조 22년(1589)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신천군 군수 한응인(韓應寅), 안악군 군수 이축(李軸), 재령군 군수 박충간(朴忠侃)의 연명 상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정여립이 한강이 얼 때를 기다려 한양으로 쳐들어가 병조판서 신립과 조정 중신들을 죽이고, 어명을 위조하여 지방관들을 파직하거나 죽이는 등의 혼란을 야기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놀란 선조는 중신들을 불러모아 대책 회의를 하였다. 당시에는 동인들이 집권 중이었고, 정여립은 동인에 속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정언신을 중심으로 한 동인들은 정여립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동인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정여립은 안악의 교생 변숭복(邊崇福)[3]으로부터, 안악의 교생인 조구(趙球)가 안악군수 이축에게 역모를 고변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 후 변숭복 및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자신이 서실을 차리고 대동계(大同契)를 운영했던 죽도(竹島)[4]로 도주했다. 그러나 진안 현감 민인백(閔仁伯)이 토벌대를 조직해 추격하자, 변숭복과 함께 자살하고 정옥남은 박연령(朴延齡)의 아들 박춘룡(朴春龍)과 함께 추포되었다. 선조는 정옥남을 직접 심문했는데, 이때 정옥남은 길삼봉이라는 자가 모주이며, 해서사람 김세겸(金世謙), 박연령, 이기, 이광수(李光秀),변숭복 등이 공모했다고 자백하였다. 정여립 일당들 일부는 처형되었고, 일부는 장형을 받다가 맞아 죽었다.
여기서 정여립이 정말 모반을 꾀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정여립의 행보와 정황적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정여립이 모반을 꾀했다고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 우선 정여립이 정말 모반을 꾀한 게 맞다면, 설령 도망치더라도 그 전에 모반과 관련된 모든 문서들을 소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집에서는 수많은 문서와 편지들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그의 도피는 변숭복의 급보로 이루어졌다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곧 본인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집안에 각종 편지와 문서들을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연루자로 죽게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 다른 정황적 증거들도 의구심을 더 부채질한다. 김장생(金長生)의 《송강행록》[5]에 의하면 "정여립 사건이 났을 때, 공은 나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는 정여립이 반드시 도망을 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입궐을 서둘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만 놓고 본다면, 정철은 정여립의 행적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이로 인해서 서인 세력들이 이 사건의 실체를 알고 있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실제로 《동소만록》과 같은 야사에서는 "정여립이 죽도로 놀러갔는데, 선전관과 현감이 정여립을 습격하여 살해한 후 자결로 위장했다"라는 기록도 존재한다.
- 길삼봉은 원래 나이 많은 어느 집 노비라는 이야기가 돌았으며, 정여립과 친해서 반역을 같이 도모하다가 정여립의 체포 당시에 사망했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정작 진안 죽도에 가서 정여립의 체포 작전 당시에 희생된 사람들을 조사하는 것보다 엉뚱하게도 정여립의 시체와 정옥남을 압송해갔다. 그렇게 해서 정여립의 체포 작전에 대해 제대로 된 조사보다 급하게 조사를 마무리 하다보니 길삼봉은 조선 시대 역사서에 등장하는 최대의 미스테리 인물이 되면서 신분도 불명이고, 연령도 불명이 되었다.
- 사망했거나 실종된 길삼봉은 나중에는 연령도 20대에서 70대까지, 신분도 사대부에서 노비까지, 반역에 있어서도 일개 수하에서 심지어 정여립보다도 상위 위치('길삼봉이 상장, 정팔룡과 정여립이 차장')를 커버하게 되면서 정체가 완전히 사라졌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등장하는 길삼봉의 기록만 해도 밑도 끝도 없다. 그래서 길삼봉이라는 이름은 가져다 붙이기만 하면 사람이 죽어나가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의 말처럼 사용되었다. 길삼봉으로 엮여서 죽은 사람만 1천여 명에 이른다. 이 때문에 길삼봉에 대해 정여립 본인 혹은 옥사를 주도한 인물들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란 해석도 있다.[6]
- 다만 길삼봉으로 가장 유력한 인물로 추정되는 사람은 길운절(吉雲節)로 정여립의 잔당이자, 1601년 정여립의 첩의 사촌인 소덕유(蘇德兪)와 함께 제주도에서 역모를 획책했던 자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제주목사 성윤문(成允文)이 제주성을 증축하면서, 제주도민을 혹독하게 대해 민심을 잃자, 이를 기회로 여겨 먼저 소덕유를 보내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한 후, 뒤이어 제주도에 들어간다. 그러다 일이 글렀다고 생각해 자신이 획책한 역모를 고변해버렸다. 결국 소덕유 등은 모두 능지처사에 처해졌고, 길운절 본인은 참수되었다. 길운절은 어렸을 때 머리에 뿔같은 혹이 3개 달려서 아명이 삼봉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의문점들로 인해 정여립의 난이 아예 날조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만약 자살이 아니라 살해설이 맞다면 모반의 주동자로 지목된 정여립 본인을 잡아다가 문초하지도 않았으며, 실제로 당시에는 정철이 서인의 모략가인 송익필(宋翼弼)[7] 형제와 모의하여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조작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8]
하지만 타살설은 어디까지나 설이고 엄연히 정여립은 자살한 게 맞다. 실제로는 정여립은 도주하다가 관군의 추격을 더 이상 뿌리칠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정여립이 같이 도주하던 동료들을 죽이고 자신도 칼에 목을 박아서 자살한 것이었다. 정여립이 자결할 때 그 자리에 있던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과 박춘룡은 정여립의 죽음이 자살로 위장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을 심문했던 사람은 정여립과 9촌 관계로 정여립과 가까운 사이라고 유배되었던 정언신이었다. 이후 선조가 친국하는 자리에서도 정여립이 타살당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정옥남과 박춘룡은 잡혀온 후 한참 동안을 감옥에서 심문 받고 권정례 이후 처형되었는데, 만약 서인이 정여립을 죽인 후 자살로 위장한게 사실이라면 서인들이 그때까지 정옥남과 박춘룡을 살려둘 이유가 없다.
이 소문에 의하면, 정철은 송익필 형제를 시켜 전라도에서 "정여립이 모반을 꾀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또한 송한필은 황해도에 정여립에 대한 호의적인 소문을 내서 정여립으로 하여금 모반을 부추기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조작의 주체는 세력도 미미했던[9] 서인이 아니라 선조 본인이 상황을 기가 막히게 이용한 것뿐일 가능성이 크다. 후술하겠지만 후일 선조는 정철이 '건저 사건'으로 몰락한 이후 정철의 측근들과 양천회를 비롯한 당시의 고변자들을 혹독하게 심문하여 정철의 사주였다는 증언을 받아내긴 했는데 이거 자체도 그냥 고문으로 인한 허위 자백일 가능성이 크다. 역모 조작범이라는 정철을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정여립이 반역을 꾀하려고 한 것이 사실이라는 의견도 있다. 정여립의 형 정여복과 정여립의 사위인 김경일이 정여립의 행동을 수상하게 생각했고, 정여립과 친하게 지내던 승려인 도잠과 설청은 정여립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생각해 정여립에게서 도망치는 등 정여립의 행동은 엄연히 수상했으며 동인 강경파 이발의 동생인 이길이 정여립과 만난 후에 이발에게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고 편지를 쓰는 등 당대 동인들도 엄연히 정여립이 모반을 꾀했다고 보았다.
애초에 정여립 역모 조작설은 어디까지나 정황이 앞뒤가 안 맞아서 제기되는 가설일 뿐, 확실한 증거도 없고, 근거로 제시된 것들 또한 어느정도는 신빙성이 부족한 것들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조작설을 처음 제기한 건 당시 기축옥사로 큰 피해를 본 동인 측인데, 잘 보면 이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당파적 입장과 서인에 대한 적대감이 상당히 반영된 주장이다. 객관성도 부족하고, 증거와 근거로 제시된 설들 또한 교차검증해보면 사실과 다른 점들이 많았다.
게다가 조선 조정에서도 역모 고변이 들어왔다고 처음부터 바로 정여립을 역적으로 몰지도 않았다 선조는 의금부 도사를 보내 정여립을 체포하도록 지시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역모고변을 한 이들까지 체포해서 조사하려고 금부도사를 파견하는 등 무고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심지어 정여립의 친척인 정언신은 고변을 무고로 보았기 때문에 나지막한 소리로 킬킬 웃었으며 정여립을 고변한 자 5∼6인을 베려고까지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여립은 자신을 체포하려는 의금부 도사 유담을 피해 도주해 버렸다. 이 시점부터 조정내에서 정여립은 역적으로 찍혀 버렸다 순순히 붙잡히지 않고 도주한 시점부터 정여립 본인의 행동은 엄연히 문제가 있는 행동이었다.
정여립은 파격적인 이론 제시가로 알려지기도 했다. 다만 그가 말했다는 '천하는 공물(公物)이니...'라는 말은 정여립이 먼저 한 건 아니고, 이전부터 나와 있던 말이다. 단재 신채호는 이 부분을 높이 평가하여 조선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인물이 정여립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조선이 정여립의 '천하는 공물(公物)' 이라는 사상을 받아들였다면, 서양 크롬웰의 공화정보다도 앞서 이를 실현한 나라가 됐을 것이라고 하였다.[10][11]
"이에 자신을 비우는 도량을 넓혀 자신을 책망하는 교서를 내리니, 우리 대소 신료와 아래로 초야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각각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소회를 펴서 숨기지 말고 극언하여 나의 미흡한 점을 교대로 바루어 나로 하여금 위 아래에 죄를 얻는 일이 없게 하라."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 22년 11월 1일 기사
처음 국청은 동인인 정언신과 이산해에 의해 주도했는데, 이들은 10월 27일 종묘에 사건이 마무리되었음을 아뢰고, 사면령을 반포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렇게 동인은 정여립 일당에 대해서만 조사를 하고 그이상은 확대하지 않았는데, 이는 선조와 서인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결국 선조는 정여립의 난에 대한 의견을 널리 구한다는 하교를 내리면서 사건은 다시 촉발되었다. 그리고 11월 3일 성균관 생원 양천회(梁千會)가 동인의 옥사 처결이 잘못되었음을 성토하고 역적 정여립이 이발, 이길(李洁), 백유양(白惟讓), 정언신 등과 친밀했다는 것을 상소했다. 동인의 주요 인사들의 이름이 나오자, 선조는 정철을 우의정, 성혼을 이조참판, 최황(崔滉)을 대사헌, 백유함(白惟咸)[12]을 헌납으로 임명하여 국청을 서인에게 맡겼다. 한편 정언신도 위관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정언신이 정여립의 9촌(九寸)으로, 즉 인척지간이므로 위관을 해서는 안 된다고 아뢰자 정언신은 11월 7일 사퇴한다.
그런데 정언신이 "역모를 고변한 자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며 여러 대신들과의 자리에서 한 발언이 선조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정여립과 주고 받은 서신들이 발견되어 삭탈 관작되고 옥에 갇혔다. 그렇게 정언신은 우의정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는데, 정언신이 삭탈되자 무인(武人)들이 한숨짓고 개탄했다며, 정언신이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무인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운 점도 훗날 화근이 될 수 있다며 문제가 되었다. 결국 사헌부에서 정언신에 대하여 역적을 두둔하고 옥사를 지연시켰다는 죄목으로 유배형에 처할 것을 청하니 선조가 그렇게 하라 명했다. 정언신은 이렇게 고변 당시에는 전혀 믿지 않고 손 놓고 있다가 선조가 독촉하자 하는 시늉만 하려고 했다.[13] 그리고 상식적으로 역모 의심자의 인척이 역모 사건에서 추국을 담당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문제가 된 서신도 처음에는 주고 받은 사실이 없다고 했는데, 원래 서신에는 정언신이 '종로'(宗老) 즉 '집안의 큰 어른'으로 적혔있던 걸 알지 못했다가 '종로'(宗老)가 '정언신'임이 밝혀지자 기군망상죄가 되어 문제가 커진 것이었다.
정언신을 대신해서 위관이 된 사람은 우의정으로 임명된 정철이었다. 하지만 정철은 병을 핑계로 입궐을 거부했다. 세번이나 정철이 입궐을 거부하자, 선조는 내시를 보내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원한을 갚아야 한다며, 가마에 실려서라도 적을 토벌하라며 기어이 위관에 앉혔다. 기존의 오해와 달리 정철은 옥사를 어떻게든 축소시키려 했다. 정언신과 정언지(鄭彦智) 형제에 대해서도 같은 서인인 최황은 고문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철은 그들이 늙었음을 이유로 반대했다. 또한 그들이 단지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 받았을 뿐 어찌 천하에 두명의 여립이 있을 수 있겠냐며 변호했다.
정여립의 조카 정즙(鄭緝)이 고문을 받아 역모를 자복하면서, 무려 70여명의 이름을 대었다. 정언신, 정언지, 홍종록(洪宗祿), 정창연(鄭昌衍), 이발, 이길, 백유양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중 정창연만 석방되었다. 특히 이발은 왕의 권력을 위협하거나, 국정을 혼란스럽게 하고 나라를 망치려는 권간으로 지목당해서 원지로의 귀양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낙안의 교생 선홍복(宣弘福)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다시 이발의 이름이 나오자, 선조에 의해 예비 권간으로 지목당한 이발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다시 끌려와 국문을 받게 되었고, 국문 과정 중 장을 맞다 죽고 말았다. 선홍복은 이발 외에도 백유양, 유덕수(柳德粹) 등의 이름을 대고 처형되었는데, 처형 직전 "이발 등의 이름을 대면 살려 주겠다고 했으면서 왜 이렇게 하느냐"고 울부짖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부제학이었던 백유양은 사촌인 백유성(白惟成)의 고변으로 체포되었다. 백유양은 정여립의 동생 정여흥(鄭汝興)과 사돈관계를 맺었고 정여립에게 여러번 서찰을 보냈는데 그 서찰에 선조를 비판하는 내용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선조의 큰 분노를 샀고 이 때문에 백유양은 고문을 받고 죽었으며 백유양의 아들들인 백진민(白振民)과 백흥민(白興民), 백수민(白壽民)[14]역시 고문을 받고 사망하였다. 또한 정여립의 동생들인 정여회(鄭汝會), 정여복(鄭汝復), 정여흥도 모두 장살되었다.
백유양이 정여립에게 보낸 서찰의 내용은 이렇다고 한다. 광해군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光海君)이 총애를 잃었고 주상(主上)의 혼미함이 날로 심해진다라고 디스했다고 하며,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이 사람(임금)이 시기심이 많고 모질며 고집이 세다.” 하였고, 또 “이 사람은 조금도 임금의 도량이 없다라고 디스하였다고 한다.
가장 처참하게 당했던 죽음으로는 멸문당한 이발의 가족들일 것이다. 동인 출신인 이발은 본인뿐만 아니라 일가가 모조리 붙잡혀 선조 앞에서 국문을 당했다. 이발의 가문은 9대조부터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이었는데, 선조는 이발의 가문을 세도정치를 할 가문이라는 잘못된 생각으로 가문 자체를 거의 박살냈다.
이때 선조가 이발의 어린 아들에게 "너는 네 아비로부터 무엇을 배웠느냐"라고 묻자, 이발의 어린 아들이 "저는 아버지께 충, 효 외에는 배운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말에 선조가 길길이 날뛰며 "역적의 자식놈이 저런 참람한 말을 하다니!"라며 이발의 어린 아들을 고문했다. 이발의 아들은 압슬형[15]을 받고 사망했으며, 80세가 넘은 노모는 장형으로 사망, 즉 맞아 죽었다.[16][17]
이런 엄청난 비극 때문에, 오늘날 겨우 살아남은 이발의 후손들은 조상의 제사를 모실 때마다 고기를 다지며 "정철! 정철!"을 외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정철이 이 모든 일에 주도적으로 나서긴 했으나, 결국 최종적인 지휘자는 선조였다. 정철도 일이 커지자 크게 당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정철이 이발 이길 백유양등을 살려줄려고 하자 선조에게 욕을 먹은 일도 있었다 훗날 선조는 "과인이 간악한 정철에게 속아 호남의 어진 선비들이 고초를 겪었다"며 정철에게 뒤집어씌우니 선조가 정철을 이용한 것인지 아님 정철이 주도한 것인지 다만 추측할 뿐이다. 또한 호남 출신의 유학자로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가지고 있었던 정개청도 조정에서 제대로 된 관직을 지내지 않았지만 정여립의 집터를 봐주었다는 것과 예비 권간이라는 이유로 붙잡혀와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정철은 정개청의 저서인 《우득록》을 보고선 "절의를 배격했다."며 그를 맹비난했다.[18] 심지어 "개청은 반역하지 않은 여립이요, 여립은 반역한 개청이다" 라고 할 정도였다. 사실상 정개청을 왕의 권력을 위협하거나 나라를 어지럽게 해 국정을 혼란하게 만드는 권간으로 다루어서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말이었다. 정개청의 제자들은 이를 정철이 젊을 적에 정개청이 "정철처럼 술마시고 노는 걸 어린애들이 보고 배운다."라고 말한 것에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야사가 있다. 다만 정개청이 꾸중했기에 정철이 정개청에게 원한을 가져 죽였다는 건 정개청의 제자들의 주장이었다, 정개청도 정여립 같은 철새였기 때문이다. 서인측의 의견에 의하면 정철이 정개청을 죽인 이유는 정개청 역시 정여립 같은 철새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정개청은 서인의 영수 박순이 거두어서 가르치고 키운 인물인데, 박순이 실각한 이후에 그를 배신하고 동인들과 어울렸으며 심지어 박순과의 친분까지 부정했다고 한다. 이에 호남계열 서인들은 스승을 배신했다며 정개청을 배척했고 특히 정철이 그를 매우 증오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정철이 그를 조정에서 높은 관직을 지내지는 않았지만, 예비 권간으로 비루하게 대우하며 혹독하게 심문했고, 결국 고문치사시켰다.
하지만 이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원래 박순과 허엽(허균과 허난설헌의 부친)은 화담 서경덕을 스승으로 하는 동문이었는데, 이조정랑의 자리를 두고서 박순은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을, 허엽은 김효원을 밀면서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섰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같은 스승에게 배워도 당색이 달라지니, 학문적인 성향이 당색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개청은 화담 서경덕으로부터 수학하기도 했다. 원래 박순과 허엽의 당파는 없었는데, 그 이유는 심의겸과 김효원 이전에는 서인과 동인의 붕당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박순은 서인으로 분류된다. 정개청의 제자들은 좌의정 남이공과 같이 동인 계열이 많아서 동인으로 분류되지만 정작 정개청 자신은 뚜렷한 당색없이 학문에만 전념하는 학자였다.
박순이 서인이니 정개청도 당연히 서인이고, 그런데 동인으로 바꿨다는 주장은 서인 측에서 나중에 꿰어맞춘 주장일 뿐이다. 훗날 정개청의 사당 건립 문제는 조선 말까지 이어지는 뜨거운 논쟁이었다. 또한 남명 조식의 제자인 진주의 최영경은 정여립 본인으로 추정되는 부두목 '정팔룡'의 수괴인 '길삼봉'(吉三峯)이라는 것과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제대로 된 관직을 지내지 않았지만, 선조가 그를 왕의 권력을 위협하거나 국정을 혼란하게 하고 나라를 망칠 권간이라는 누명을 씌우는 바람에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간 최영경은 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거두들이 소인이니 모두 죽여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일삼아 서인 세력의 미움을 사고 있었는데 정여립이 잔치를 열면서 최영경을 극진히 모셨다는 진술이 나오면서 잡혀 들어갔다. 이에 선조에 의해 예비 권간으로 지목당한 최영경은 자신이 한양에 있을 때 인연이 있었지, 편지 왕래도 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주장했으나 편지가 하나 나오긴 했다.
이에 최영경은 나이가 들어서 헷갈렸다고 했다. 정철을 비롯한 수사관들은 아무래도 이 양반은 깨끗한 것 같으니 풀어주는 것이 맞다고 선조에게 진언했으나 대간이 그럴 수 없다고 결사 반대하는 통에 선조가 풀어주려다가 입장을 번복했고, 결국 왕이 최영경을 예비 권신과 간신으로 다시 지목하면서 최영경은 옥사하고 말았다. 최영경의 동생인 전 신녕현감 최여경(崔餘慶)도 장살되었다. 또한 사헌부 장녕 유몽정(柳夢井), 찰방 이황종, 참봉 윤기립(尹起笠), 전 선산 부사 유덕수(柳德粹)도 정여립과 친하다는 이유로 장살되었다. 심지어 전주부윤 윤우신(尹又新)은 기축옥사가 끝난 후에 또다시 정여립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잡아다 고문하는 바람에 이과정에서 죽은 사람만 70여명에 이르렀다.
정여립의 난으로 일어난 일련의 대숙청을 기축옥사라고 한다.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을 왕의 권력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권간이라는 누명을 씌운 후 제거한 선조는 왕권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19] 한편 정철이 지나치게 동인계 인사들을 잡아들여 죽인 탓에 말썽이 일었고, 기축옥사 이후 서인의 권력이 너무 커졌다고 우려한 선조는 정철이 광해군의 조속한 세자 책봉을 주장한 것을 빌미로 그를 파직시켜 버렸다.
또한 건저의 사건으로 정철, 성혼, 윤두수, 윤근수, 이해수, 홍성민, 이산보[20], 박점, 황정욱, 백유함[21], 유공진, 장운익 등 서인들이 죄다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동인이었던 이성중과 우성전[22]도 건저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23] 최영경을 '길삼봉'이라고 무고한 양천경, 양천회 등[24]은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심지어 선조는 조정에서 제대로 관직을 추천하지 않으며, 왕의 권력을 위협하는 권신 및 나라를 망치려는 간신으로 지목해서 제거한 최영경을 복권시키고 정철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는 결국 정여립의 난에 이어진 참혹한 기축옥사의 배후에 선조가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동인을 정철을 내세워서 제거한 다음, 그 부담은 모두 정철에게 뒤집어씌운 것이었다. 훗날 기축옥사의 고변자들이었던 양천회 형제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건저 사건으로 정철이 몰락한 이후에 잡혀와서 정철의 사주를 받아 그랬다고 자복하곤 곤장을 맞다가 죽었는데 정작 정철에겐 죄가 더해지지 않았다. 정철은 그냥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반증이다. 실제 정철이 주도했든지, 선조가 정철을 이용했든지 간에 훗날 선조는 정철을 '독철'(毒澈)이라 부르며, 악독한 정철이 내 선량한 신하들을 다 죽였다.(毒澈殺我良臣)며 기축옥사의 책임을 정철에게 다 뒤집어 씌웠고, 정철은 동인들의 씨를 말리다시피 했다며 동인백정(東人白丁)이라고까지 불렸다.
게다가 당대의 고승인 휴정과 유정도 연루되었다. 정여립과 가까이 지냈던 승려 중 무업(無業)이란 자가 고문을 받고 휴정과 유정이 역모와 연관이 있다고 무고를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휴정과 유정 모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선조가 두 사람을 신임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 훗날 구국의 명장으로 칭송될 이순신도 연관된 적이 있다.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의 《행장록》에 따르면 이때 하급 관리였던 이순신이 정언신을 면회할 겸 의금부에 방문했다가 의금부 관리들이 술판을 벌이는 것을 보았다. 당시 정언신은 정여립의 친척으로, 정여립의 반란 음모를 듣고 비웃은 사람이었으며 원래 사건 조사관이었다. 하지만 정여립의 친척이라는 이유와 선조에 의해 왕권을 위협하거나, 국정을 어지럽게 해서 나라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권간으로 지목되어 자리에서 쫒겨나고 수감되었다.
이때 선전관이었던 무신 이응표는 정여립의 집에서 나온 문서 중 정언신 관련 편지들을 몰래 처분했으나 문인들의 멋부리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 17장이나 문서가 남았다.[25] 당시에도 이 사건이 조작이라는 여론이 있었다는 걸 반증한다는 설부터 이순신의 의기를 강조하는 설 혹은 《행장록》에 적힌 미화된 이야기라는 설 등 의견이 여러가지로 나뉜다. 이순신과는 다른 면으로도 연결되는 점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부하들 중 한 명인 안위는 명량해전 때 이순신으로부터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며 호되게 꾸중을 들은 장수이다. 명량해전 당시의 이미지를 앞뒤 이해없이 본다면 느낄 선입견과는 달리 실제로는 부산의 왜군 진영에 침투해 진영을 홀라당 불태워 버리는 등의 작전을 수행한 용맹한 인물이었고, 명량해전 때도 가장 먼저 복귀해 싸워서 이순신의 추천으로 파격 승진한 사람이었다.[26] 이 두 사건으로 '성웅의 남자'란 평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27] 안위는 기축옥사 당시에는 정여립의 5촌 조카라는 이유로 투옥되어 조사를 받았고, 전공을 세워서 승진한 이후에도 '역적의 친척'이라며 몇 차례나 파직을 당했다.
정여립의 난이 과연 정말로 모반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주체가 누구든 간에) 조작된 정치적 사건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연루되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면모를 볼 때 조작된 사건 쪽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기축옥사의 공초(수사 및 공판 기록)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불타 없어져 버렸고, 그 때문에 더 자세한 연구가 어렵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기존의 서인 주도론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이 법에 따라 여자와 아이는 고문할 수 없다는 서인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발 가문을 세도정치를 할 가문으로 생각해서 개박살내고 아이와 노인까지 고문해서 죽인 장본인이 선조였으며, 예비 권간으로 지목한 최영경도 정철이 풀어주자고 한 것을 선조가 거부했다.[28]
훗날 정철을 토사구팽해버린 과정을 볼 때 강경파였던 정철을 희생양으로 삼으며, 선조는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이 왕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조가 그들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술수를 부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인들 중에 류성룡을 비롯한 남인들이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도 지나치게 서인 세력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선조가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해석이 강하다. 실제로 선조는 류성룡 등을 탄핵한 상소를 보고 아예 류성룡에게 보여주며 "이놈들이 나라 대신들 다 죽고 나서야 그만둘 모양이다."라며 비난했고, 류성룡에게는 "금옥과도 같은 선비"라며 신임을 보여줬다. 특히 서인 강경파인 조헌에 대해서는 '간귀'라 부르며 이후로도 마천령을 넘게 될 것(=마천령을 넘어 귀양가게 될 것)이라고 디스했다. 즉 남겨둬야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은 남겨놨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선조의 바람과는 달리 기축옥사로 동인이 받은 타격은 심각했고, 정철의 처리와 급진/온건 성향을 문제로 조식 계열의 북인과 이황 계열의 남인으로 또다시 분당되었다. 이후로는 류성룡 주축의 남인이 여당이 되지만, 이 남인은 임진왜란이라는 숙청 이상의 파급력을 가진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책임을 떠안아 북인에게 세력을 넘겨주게 되었고, 북인은 다시 광해군과 함께 몰락하면서 동인 계열은 사실상 남인 계열의 극소수만 남아버리게 되었다. 이것은 이후 왕권에도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데. 기본적으로 동인은 '근왕파'로서 '왕도정치'를 추구하는데, 인조 이후로는 '신권정치'를 추구하는 서인이 주도권을 가져가게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정여립의 난으로 인해서 17세기부터 조선에서는 이른바 정씨진인설이 나돌면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정씨진인'[29], 즉 구세주가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부패한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 태평성대를 누린다는 내용인데 그 정씨 성을 쓰는 진인의 모티브가 바로 정여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정씨진인설을 담은 예언서인 《정감록》이 18세기부터 조선 사회에 나돌면서 조선 사회는 끊임없이 반란에 시달리게 되었다.
훗날 정철을 토사구팽해버린 과정을 볼 때 강경파였던 정철을 희생양으로 삼으며, 선조는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이 왕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조가 그들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술수를 부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인들 중에 류성룡을 비롯한 남인들이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도 지나치게 서인 세력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선조가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해석이 강하다. 실제로 선조는 류성룡 등을 탄핵한 상소를 보고 아예 류성룡에게 보여주며 "이놈들이 나라 대신들 다 죽고 나서야 그만둘 모양이다."라며 비난했고, 류성룡에게는 "금옥과도 같은 선비"라며 신임을 보여줬다. 특히 서인 강경파인 조헌에 대해서는 '간귀'라 부르며 이후로도 마천령을 넘게 될 것(=마천령을 넘어 귀양가게 될 것)이라고 디스했다. 즉 남겨둬야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은 남겨놨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선조의 바람과는 달리 기축옥사로 동인이 받은 타격은 심각했고, 정철의 처리와 급진/온건 성향을 문제로 조식 계열의 북인과 이황 계열의 남인으로 또다시 분당되었다. 이후로는 류성룡 주축의 남인이 여당이 되지만, 이 남인은 임진왜란이라는 숙청 이상의 파급력을 가진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책임을 떠안아 북인에게 세력을 넘겨주게 되었고, 북인은 다시 광해군과 함께 몰락하면서 동인 계열은 사실상 남인 계열의 극소수만 남아버리게 되었다. 이것은 이후 왕권에도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데. 기본적으로 동인은 '근왕파'로서 '왕도정치'를 추구하는데, 인조 이후로는 '신권정치'를 추구하는 서인이 주도권을 가져가게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정여립의 난으로 인해서 17세기부터 조선에서는 이른바 정씨진인설이 나돌면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정씨진인'[29], 즉 구세주가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부패한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 태평성대를 누린다는 내용인데 그 정씨 성을 쓰는 진인의 모티브가 바로 정여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정씨진인설을 담은 예언서인 《정감록》이 18세기부터 조선 사회에 나돌면서 조선 사회는 끊임없이 반란에 시달리게 되었다.
- 《불멸의 이순신》에서 36에 등장했는데 정작 반란을 일으킨 모습을 보이지않았으며 오히려 반란 자체가 날조되었다는설을 극중의 복선들을 통해 보여줬다. 위의 항목에서도 보이듯 정여립의 난 자체가 정말로 일어난 난 이었는지 불명이라 이런 장면을 넣었으리라 보인다.
- 《구름을 버서난 달처럼》 영화판은 이몽학의 난과 이 사건을 결부시켜서 그리고 있다.
- 유승진의 《포천》에서는 정도령과 결탁해서 반란을 꾀하는 것으로 나온다.
- 웹툰 《오성X한음》에서는 사건이 나기 5년 전부터 선조가 배후에서 일부러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게 유도하여 장기적으로 왕권 강화를 위한 미끼로 쓰는 것으로 나온다. 선조의 계획대로였다면 왕권이 강화되어 치세에 아무 문제가 없었을테지만, 선조 본인도 예상못한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제대로 멘붕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 드라마 《구가의 서》에서는 직접 나온 것은 아니지만, 등장인물들의 언급을 통해서 언급된다. 정확히는 살해당한 박무솔에게 역적의 누명을 씌우기 위해 조관웅이 그를 이 난과 연관시킬 때 대동계가 언급된다.
- 게임 소울 칼리버 6에서는 황성경 스토리의 주된 배경이다. 황성경이 어느 날 종적을 감추고 행방불명되나, 황성경의 사부인 성한명[32]은 서인들의 감시를 받아 공공연히 황성경을 찾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순신이 동인과 친분이 있는 인물이라 서인들의 견제를 받고 있는데, 성한명은 이순신의 절친한 친구이며, 황성경은 아예 이순신의 직속 부하인지라 이순신과 같이 엮여 있기 때문. 여기에서는 정여립의 난이 조작이라는 학설을 따랐으며, 정철은 소울 엣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국왕은 이순신이 아끼는 부하에게 소울 엣지 탐색 임무를 맡긴 것을 씁쓸해한다고 언급된다.
[1] "야, 역적이 죽었으니 술맛이 받는구나!"하면서 같이 술을 푼 사람이 있는데도 참고인으로 소환조차 하지 않아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하물며 김여물은 김류의 아버지로도 유명한 서인 쪽 인사였으니, 이 말은 수사기관에 '집권 서인 쪽에 내 신원보증을 서 줄 사람이 있으니 살려달라'고 말했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하다. 공안사건이 흔했던 근현대사로 치환해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렇게 정권 측 사람이 조대중의 억울함을 아는데도 증언을 거부해서 아무 이유도 없이 목숨을 뺏기게 됐으니, 얼마나 원통했는지 조대중이 옥중에서 원한을 호소하는 절명시를 남겼기에 잔혹한 선조가 동정을 표하기는커녕 거꾸로 격노하기도 했다.[2] 쉽게 말해, 어찌나 옥사가 광기에 찬 분위기였는지 사귀던 기생과 헤어지면서 눈물짓던 로맨스가이나, 시체에 형을 더하는 자리에 서 있다가 바람이 불자 안구건조증이 있어 눈물이 난 사람이 역적을 두둔했다며 잡혀들어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일단 기록이 남은 것으로 보아, 둘 다 자초지종을 해명하고 보증해 줄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도 억울하게 죽었다는 공통점이 있다.[3] 정여립과 역모를 모의하면서 안악에서는 본명을 쓰고, 전주에서는 변사(邊涘), 동래에서는 백일승(白日昇)이라는 가명을 썼다고 한다.[4] 이름 때문에 바다 위에 있는 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사실은 진안의 금강 상류에서 구량천과의 합류 지점에 위치한 섬 모양의 지형이다. 하중도까지는 아니고 금강과 구량천이 아슬아슬하게 잘록목을 이룬 호리병 모양이다. 네이버 지도[5] 정철의 행적을 기록한 책[6] 왜냐하면 조선의 행정 체계와 공권력은 상당히 정교해서 웬만한 범죄자는 국가에서 수사를 하면 대부분 붙잡혔다. 심지어 정여립 이전에 온 나라를 공포에 떨게 했던 무시무시한 도적인 임꺽정조차 조선 조정이 마음 먹고 수사하자 결국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다. 헌데 온 나라를 들쑤셔 놓은 정여립의 난의 배후라는 길삼봉이 조선 조정의 집중적인 수사와 탐색에도 불구하고 끝내 전혀 잡히지도 않았고 그 정체조차 헷갈리는 것을 본다면, 길삼봉이라는 인물 자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허구라는 해석이 이치에 맞는다. 실제로 정여립보다 약 200년 후의 반란자인 홍경래도 자기 세력을 높여 보이기 위해서 있지도 않은 허구의 인물이 자신의 배후라는 식으로 선전을 하는 바람에 조선 조정이 그 배후를 잡기 위해 헛고생을 한 바 있다.[7] 1534~1599. 서인계 예학의 태두로, 이이, 성혼, 정철과는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조부는 갑사였던 송린이었고, 조모는 안돈후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얼녀 안감정이었다. 부친인 송사련은 본래 관상감 판관이었는데, 자신의 입신을 위해 외숙부인 안당 집안을 무고하여 순흥 안씨 일문과 훈구파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여러 사림들을 죽게 만드는 협잡을 저질러(1521, 신사무옥) 당상관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세월이 흘러 안씨 집안은 신사무옥과 무관하다 하여 신원되었고(1566), 20년 뒤에는 이 사건이 송사련의 무고였음이 밝혀졌다. 이에 안씨 집안에서는 동인들의 비호 아래 죽은 송사련 대신 살아있는 송익필을 겨냥하여 그를 종으로 환천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 송사련은 추탈되고 그 아들인 송익필은 안씨 집안의 종이 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송사련의 자식들은 각지로 뿔뿔히 흩어졌고, 송익필은 정철 등의 비호 아래 1589년까지 진안 운장산과 광주 등지를 전전하였다. 일각에서는 이 시기에 졸지에 선비에서 노비로 신분이 떨어질 판이 되자 정철과 함께 동인을 몰락시킬 꾀를 내었고, 이것이 기축옥사로 발전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후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해배되어 이곳저곳을 떠돌았고, 1599년 당진 마양촌에서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가례에 주석을 단 《가례주설》이 대표적이며, 제자로는 김장생, 김반, 정홍명, 강찬 등이 있었다. 김장생의 제자였던 우암 송시열은 훗날 송익필의 글이 없던 묘비에 글을 써주면서 송익필은 김장생이 첫걸음을 내딛게 이끌어 줬다고만 언급하였고, 김장생이 스승으로 모신 것은 이이였다고 공식 기록하였다. 송익필 신분상의 이유로 서인의 학통에서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인듯 하다. 대한제국의 멸망 직전인 1910년에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묘소는 당진시 원당동에 있다.[8] 이와는 반대로 송익필이 동인 강경파들을 엮기 위해 기축옥사를 기획-조종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송익필이 기축옥사 이후 동인들을 탄핵하는 상소의 배후로 지목되어 유배를 간 것으로 보았을 때, 그가 동인들을 탄핵하는 데 관여한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송익필은 기축옥사를 기획하고 조종할 모략을 꾸밀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그는 안당 집안과의 노비 환천 소송에서 지고난 후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어느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산해, 정철, 김은휘(황강 김계휘의 동생이자 김장생의 숙부) 등이 마련해준 거처를 전전하며 피해다녔던 처지였다. 본인과 식솔들 건사하기도 힘든 이런 상황에서 모략을 꾸민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그 많은 동인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송익필에게 순순히 당해버리는 것도 납득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한편 송익필 배후설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는 기축옥사를 배후에서 조작하기에 누구보다 알맞는 인물이었다. 동인에 대한 원한이라는 동기와 모략을 기획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서인의 수장인 정철과 가까운 사이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가 노비로 떨어졌다는 점을 부각시켜 서인을 한낱 노비에게 놀아난 세력으로 공격하기에도 적당하였기 때문이다.[9] 동·서 분당 초기에는 동인이 압도적인 집권 세력이었다.[10] 이는 물론 조선인이 처음으로 서구적 역사학을 연구하기 시작하던 당시의 어설픈 민족사관에 근거한 주장이며, 인쇄술의 유무에서 파생되고 누적된 거대한 차이들을 간과한 섣부른 이야기다.[11] 공화정 같은 것은 하루아침에 누군가의 추상적인 아이디어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계몽주의가 충분히 무르익고 체계를 갖춘 이후의 사회적 토양에서 실현가능한 것이다. 유럽에서 공화정이 출현했을 때는 이미 200년 전에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고, 지식혁명이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계몽사상이 등장하는 등 상당한 밑작업이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루 최대 40장을 찍어내는 조선의 금속활자와 분당 10장을 찍어내는 구텐베르크 인쇄기라는 물리적 차이가 있는 한 극복 불가능한 것이다.[12] 백인걸의 아들로 백유양과는 사촌지간이었다.[13] 이는 정여립의 반란이 거짓이라고 생각한 탓이고, 고변자들의 일부가 종계변무에서 공을 세운 자들이라 무고죄 처벌이 어렵다라는 측면에서 시간을 끌어 흐지부지 넘기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4] 정여립의 형제 정여흥의 사위.[15] 사기 조각 등이 난무한 바닥에 꿇리고, 옥졸이 발로 다리를 밟아대는 형벌이다. 가뜩이나 고문법 중에는 인두로 지지는 낙형과 함께 제일 강도가 높았고, 고문치사하는 경우가 많아 2차 이상을 가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는데 성장 중인 어린이에게는 그야말로 사형 선고였을 것이다.[16] 문제는 노인과 어린아이는 고문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는데 선조가 '역모 사건은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는다'며 어거지로 끌고 오도록 했다.[17] 야사에 의하면 이때 이발의 어린 아들이 고문을 받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심문하는 옥졸이 불쌍한 마음이 들어 눈물을 흘렸는데, 그런 옥졸조차 선조가 역적이라며 곤장을 때리게 했다고 전해진다.[18] 반면 선조는 정철이 압수한 1,000여 권의 책 중 《우득록》을 보고 "이 책은 옛 글을 읽은 사람의 저술이다. 모두 돌려주도록 하라."라고 했으나 돌아온 건 《우득록》 하나 뿐이었다고 한다.[19] 하지만 서경덕계(=북인 온건파)인 이산해가 영의정을 하고, 남인의 경우엔 거의 타격을 받지 않았다.[20] 동인의 영수인 이산해와는 사촌 형제로 이이와 친했기 때문에 서인이 되었다.[21] 백인걸의 아들로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죽은 백유양과는 사촌 지간이었다.[22] 동인의 영수 허엽의 사위였다.[23] 이성중은 홍문관 대제학으로 있었을 때, 정철의 세자 책봉 주장에 동조해 정철의 무리로 몰려 유배되었다. 우성전은 홍문관에서 정철을 탄핵하는 차자를 올리려 할 때 부제학인 김수와 이를 논의했다가 제때 차자를 올리지 못한 일 때문에 정철의 무리로 몰려 유배되었다.[24] 양천회는 정언신을 고발했고, 양천경은 최영경을 고발했다.[25] 무신 이응표가 정언신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정여립과의 서신을 모두 처리했다고 말해서, 정언신은 "서신은 없습니다."라고 했는데, 앞서 나온 바와 같이 유식하지 못한 고로 17장이나 그냥 두면서 정언신의 죄가 커지고 말았다.[26] 솔직히 안위는 당시 일개 고을 수령이라서 해전에 익숙한 인물도 아니었고, 직책상 꼭 참여할 인물도 아니었다.[27] 김경진이 쓴 《격류》를 포함한 임진왜란 관련 작품이나 슈타인호프가 쓴 《이순신의 나라》에서 그러한 설정들을 차용했다.[28] 하지만 왕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었던 동인은 어차피 선조가 최영경을 죽일 것을 알고 일부러 정철이 멋부린 것이라고 평가하며 정철을 탄핵했다.[29] 정씨 성을 쓰는 진인[30] 임꺽정의 아들로서 생존했다.[31] 이순신은 임꺽정 원작에서도 까메오로 나왔다. 파행에서는 아예 임차손과 이순신의 평생에 걸친 우정이 주제이다.[32] 성미나의 아버지. 무신(武神)이라고 불릴 정도로 검술에 능한 무사이며, 가공인물.[33]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의 혀를 자른 후에 대답하지 않는다고 광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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