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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해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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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본관 | ||||||||||||||||||||||||||||
현직 | 대한민국 통일건국회 회장 | |||||||||||||||||||||||||||
재임기간 | 제25대 국방부차관 | |||||||||||||||||||||||||||
제30대 국방부장관 | ||||||||||||||||||||||||||||
제21대 국가안전기획부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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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9월 9일 경상북도 경주군 외동면(현 경주시 외동읍) 입실리에서 교사로 근무한 아버지 권태훈(權泰薰)[3]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기석(金基錫)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주고등학교[4], 육군사관학교 제15기[5]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비(非)하나회 출신으로 제6보병사단장[6], 올림픽 지원사령관을 역임하고 1988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이후 국방부 기획관리실장, 국방부 차관을 역임하였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1993년 2월,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전 대통령 당선자 신분의 김영삼에게 하나회에 대해서 보고하고, 국방부 장관으로서 숙군(肅軍)을 주도했다. 하나회 때문에 진급 불이익을 받는 등, 하나회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작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해 7월 친동생이 율곡사업 비리에 연루되었다.[7] 결국 그 해 말 국방부 장관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1994년 3월부터 12월까지 KBO 총재를 역임하였다.
1994년 12월 개각에서 통일원장관으로 전임한 김덕의 후임 국가안전기획부장에 임명되어 이듬해 청사를 내곡동으로 옮기는 데 주도했고, 1996년 개정 안기부법 제정에 따라 찬양고무죄와 불고지죄 수사 등 국내수사권을 되찾았다.[8]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재미교포 윤홍준씨에게 공작금을 주고 기자회견을 열어 “김대중 후보가 김정일한테 돈을 받았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토록 했다. 또 그해 월북한 전 천도교 교령 오익제씨에게 김대중 후보 앞으로 편지를 보내도록 시켜 김대중 후보를 용공 인사로 몰았다. 야당 후보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석현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의 '남조선 명함' 사건[9], 김병식 편지 사건[10], 이대성 파일 유출 사건[11] 등 정권 교체를 전후해 일어난 각종 북풍 공작도 권영해의 재직 중 일어났다. 또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영삼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돕기 위해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방해하는 공작을 펼치기도 했으며, 신한국당 김태호 사무총장의 부탁으로 한국중공업, 한국통신 등 공기업에서 대선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결국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뒤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올랐다.[12] 1998년 3월 검찰 조사 도중 화장실에서 커터칼로 자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때 당시 유행어가 '배째!'(...). 그리고 결국 4월 3일 오전 0시30분께 서울구치소에 수감했다. # # #
결국 안기부법, 선거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혐의로 4차례 추가 기소돼 1999년 징역 5년형이 확정됐다. 역대 정보수장 수난사 대법원 판결문 전문 2000년 1월 당뇨 합병증 때문에 형 집행정지를 허용받았다가 2003년 12월 '안풍사건'으로 징역 10개월[13], 2005년 6월 안기부 예산 10억원 횡령 혐의로 징역 2년이 각각 가중 선고되었으며, 9월에는 '안기부-국정원 도청사건' 당시 참고인으로 검찰에 불려가 미림팀의 활동과 관련해 조사를 받았다.
그 사이 권영해 본인은 수차례 형집행정지 연장 신청을 해왔으나 2006년에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불허하면서 재수감됐다가, 2008년에 특별사면되어 출소했다.
2013년부터 대한민국 통일건국회 회장을 역임 중이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1993년 2월,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전 대통령 당선자 신분의 김영삼에게 하나회에 대해서 보고하고, 국방부 장관으로서 숙군(肅軍)을 주도했다. 하나회 때문에 진급 불이익을 받는 등, 하나회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작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해 7월 친동생이 율곡사업 비리에 연루되었다.[7] 결국 그 해 말 국방부 장관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1994년 3월부터 12월까지 KBO 총재를 역임하였다.
1994년 12월 개각에서 통일원장관으로 전임한 김덕의 후임 국가안전기획부장에 임명되어 이듬해 청사를 내곡동으로 옮기는 데 주도했고, 1996년 개정 안기부법 제정에 따라 찬양고무죄와 불고지죄 수사 등 국내수사권을 되찾았다.[8]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재미교포 윤홍준씨에게 공작금을 주고 기자회견을 열어 “김대중 후보가 김정일한테 돈을 받았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토록 했다. 또 그해 월북한 전 천도교 교령 오익제씨에게 김대중 후보 앞으로 편지를 보내도록 시켜 김대중 후보를 용공 인사로 몰았다. 야당 후보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석현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의 '남조선 명함' 사건[9], 김병식 편지 사건[10], 이대성 파일 유출 사건[11] 등 정권 교체를 전후해 일어난 각종 북풍 공작도 권영해의 재직 중 일어났다. 또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영삼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돕기 위해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방해하는 공작을 펼치기도 했으며, 신한국당 김태호 사무총장의 부탁으로 한국중공업, 한국통신 등 공기업에서 대선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결국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뒤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올랐다.[12] 1998년 3월 검찰 조사 도중 화장실에서 커터칼로 자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때 당시 유행어가 '배째!'(...). 그리고 결국 4월 3일 오전 0시30분께 서울구치소에 수감했다. # # #
결국 안기부법, 선거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혐의로 4차례 추가 기소돼 1999년 징역 5년형이 확정됐다. 역대 정보수장 수난사 대법원 판결문 전문 2000년 1월 당뇨 합병증 때문에 형 집행정지를 허용받았다가 2003년 12월 '안풍사건'으로 징역 10개월[13], 2005년 6월 안기부 예산 10억원 횡령 혐의로 징역 2년이 각각 가중 선고되었으며, 9월에는 '안기부-국정원 도청사건' 당시 참고인으로 검찰에 불려가 미림팀의 활동과 관련해 조사를 받았다.
그 사이 권영해 본인은 수차례 형집행정지 연장 신청을 해왔으나 2006년에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불허하면서 재수감됐다가, 2008년에 특별사면되어 출소했다.
2013년부터 대한민국 통일건국회 회장을 역임 중이다.
2016년 최순실 게이트 정국에서 박사모 회장 정광용과 같이 박근혜 탄핵 반대 시위를 주도하였다. 박근혜가 결국 탄핵당한 후 새로 창당한 새누리당[14]의 창당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2017년 4월 5일 정광택과 함께 이 당의 공동대표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대선 중인 4월 29일 당 집행부와 사이가 틀어져 보수단일화를 주장하며 새누리당과 탈당 및 결별을 선언했으며, 정작 자신이 공동대표로 있는 새누리당의 조원진 후보에겐 단일화를 위한 자진사퇴를 권고하며 다른 당 후보인 홍준표 후보의 유세를 도와주다가 조원진 지지파와 마찰을 빚었다. 결국 새누리당의 조원진 후보가 0.13% 득표라는 저조한 결과를 내면서 낙선하자 이에 대해 새누리당 지도부 내에서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상황이며 권영해 역시 이 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 끝까지 조원진을 지지했던 세력들은 권영해, 정광용, 정광택 등 홍준표를 지지했던 새누리당 지도부를 배신자라고 비난하고 있으며, 상호간에 고발과 소송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선 중인 4월 29일 당 집행부와 사이가 틀어져 보수단일화를 주장하며 새누리당과 탈당 및 결별을 선언했으며, 정작 자신이 공동대표로 있는 새누리당의 조원진 후보에겐 단일화를 위한 자진사퇴를 권고하며 다른 당 후보인 홍준표 후보의 유세를 도와주다가 조원진 지지파와 마찰을 빚었다. 결국 새누리당의 조원진 후보가 0.13% 득표라는 저조한 결과를 내면서 낙선하자 이에 대해 새누리당 지도부 내에서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상황이며 권영해 역시 이 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 끝까지 조원진을 지지했던 세력들은 권영해, 정광용, 정광택 등 홍준표를 지지했던 새누리당 지도부를 배신자라고 비난하고 있으며, 상호간에 고발과 소송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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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밀공파 세득(世得)계 34세 영(寧) 헌(憲) 탁(鐸) 작(爵) 항렬.[2] 강남구에 있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인 안디옥교회의 장로이다.[3] 창씨명 요시무라 다이쿤(吉村泰薰).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부터 1941년까지 진량보통학교 훈도로 근무했다.# 해방 후인 1951년 외동중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외동중학교는 이후 1956년 공립학교로 전환되었다.#[4] 4회 졸업생이다. 그의 6촌형이 교장을 지냈다.[5] 동기생으로 고명승, 민병돈, 이진삼, 이대희, 김상구가 있다.[6] 다만 사단장 시절에 불교 탄압을 저지르기도 했다. 당시 6사단은 법당이 없어서 도피안사 법당에 천막을 치고 있었는데, 당시 사단 군종법사가 법당을 짓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사단장이던 권영해가 헌병을 동원해서 기공식에 오는 불자들을 막아버리는 사태가 있었다.[7] 그 해 6월 11일자 중앙일보 1판 헤드라인에 권영해의 출국금지 기사를 쓰던 정재헌 기자가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러나 재야세력과 국제사회의 반발로 권 장관 본인이 고소를 취하해 석방되었다.[8] 비리로 경질되었다가 불과 1년여만에 안기부장으로 영전하여 복귀했는데 이런 배경에는 권영해 부장이 김현철 라인이였던게 한 몫 했다고 한다.[9] 이석현 의원이 중국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외국인용 명함에 '한국'과 '남조선'으로 국적을 병기한 것을 빌미로, 여당에서 야당을 색깔론으로 공격한 일이다.[10] 임춘원 전 의원, 김영훈 목사 등이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 김병식이 김대중의 당선을 기원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폭로하고 그 내용을 공개한 사건이다.[11] '이대성 파일'은 해외공작실장 이대성이 작성한 문건으로 대북 공작원들의 지난 1년간 대북활동 내용뿐 아니라 여야 의원들의 대북 접촉 내역이 담겨 있었다. 2018년 영화 공작으로 화제가 된 흑금성도 이대성 파일로 신원이 노출되었다. 이때문에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이 자신의 북풍 공작의 꼬리를 자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노출했다는 의혹이 있다.[12] 극우 측에선 권 전 원장이 검찰 수사를 받고 원장직에서 물러난것을 '종북 좌파인 김대중 정부의 모략이다'라고 주장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잘못을 했다는 정보가 있으니 수사를 받았을 뿐이고, 수사 결과 실제 잘못이 있다는 게 밝혀졌으니 원장 직에서 물러난 것이다.[13] 다만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이 나왔다.[14] 물론 김무성이 대표를 지냈던 그 원내 2당 새누리당이 아니다. 구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꿨고, 버려진 이름을 주워서 일단 (가칭)딱치를 붙인채로 쓰다가 4월 5일 창당대회에서 당명으로 확정했다.[15]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16]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8]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노덕술을 연기했던 배우. 2017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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