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와타 마스미에서 넘어옴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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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와타 마스미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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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 No.73 | |
쿠와타 마스미 桑田真澄 | Masumi Kuwata | |
출생 | |
국적 | |
학력 | |
신체 | 174cm, 80kg |
포지션 | |
투타 | |
프로입단 | 1985년 드래프트 1라운드 (요미우리) |
소속팀 | |
지도자 | |
응원가 |
2016년 절친이었던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마약 소지 사건 당시 했던 말.
일본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했던 일본의 우완 투수.
고교 시절부터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KK 콤비'를 이뤄 고시엔 대회에서 활약한 것으로 유명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 NPB에선 오로지 요미우리 한 팀에서만 활약했다. 2006년에는 이승엽과 한솥밥을 먹기도 했으며, 2007년에는 불혹의 나이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도전해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 입단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은퇴 이후에는 야구 해설자, 야구 평론가 등으로 활동하는 중인데, 일본 아마추어 야구계의 통념이나 관습 등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하는 목소리로도 주목받고 있다.
1983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에이스로 활약, 여름 고시엔 대회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학제 개혁 후 최연소 우승투수의 기록을 세웠으며, 1학년 투수가 팀을 준우승까지 이끈 건 여러 차례가 있었지만, 우승으로 이끈 건 그가 처음이었다. 1984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봄 고시엔 대회와 여름 고시엔 대회는 모두 준우승. 1985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봄 고시엔 대회 4강, 여름 고시엔 대회는 우승하였다. 그라운드 한 번 밟아보기도 힘든 고시엔 대회를 격전지인 오사카 지구에서 살아남아 무려 5번이나 출전하여 고시엔 통산 20승 3패를 기록했다. 학제 개혁 이후 고시엔 대회 최다승 투수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또한 타격 역시 뛰어나 KK 콤비를 이룬 기요하라의 뒤를 이은 고시엔 대회 통산 홈런 기록 2위(6홈런)를 가지고 있다.
1986년 데뷔시즌에는 수비와 타격 능력도 좋아 야수 전향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투수를 선택했다.[6]
데뷔 첫승을 완투승으로 장식했으며, 2년차인 1987년에는 15승 6패, 방어율 2.17의 성적을 기록하며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 획득 및 사와무라상 선정의 영광을 안았다. 10대의 나이에 두자리수 승리를 기록한 건 팀 선배 호리우치 츠네오 이후 처음이었다. 다만, 일본시리즈에서 1차전과 5차전에 선발등판했지만 모두 부진했고, 팀도 일본시리즈 패권을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넘겨준 건 아쉬운 대목이었다. 참고로 쿠와타의 PL학원동기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세이부의 우승 직전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바로 본 일본시리즈에서이다. 1987년 일본시리즈 항목 참조.
1988년과 1989년 2년 연속 개막전 선발투수로 낙점되었다. 특히 1988년은 도쿄돔이 개장한 해인데, 쿠와타는 도쿄돔 공식경기 첫번째 등판투수로 역사에 이름을 새기게 된다.
1989년에는 한 시즌 개인 최다승수인 17승을 거뒀고 팀의 일본시리즈 제패에도 기여했다. 1989년 일본시리즈 항목 참조.[7]
1990년에는 팀동료 사이토 마사키의 2년연속 20승에 가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팀의 센트럴리그 우승에도 공헌했다. 그렇지만 일본시리즈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퇴하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1990년 일본시리즈 항목 참조.
1991년에는 사이토 마사키의 부진으로 다시 팀의 에이스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제1회 한일 슈퍼게임 1차전[8]에 일본대표팀 선발투수로 등판해 3이닝 무실점의 호투를 펼쳤다.
1992년 시즌까지 6시즌 연속 두자리수 승수를 기록했다.
1993년에는 부진에 빠져 야수 전향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으나, 1994년에는 14승 11패, 방어율 2.52, 탈삼진 185개로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거머쥐는 등의 활약을 보였고 '국민적인 이벤트' 10.8 결전에서 다른 '세 기둥'인 마키하라 히로미. 사이토 마사키의 뒤를 이어 구원등판해 요미우리의 승리+센트럴리그 우승을 확정짓고 헹가래를 받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시리즈까지 재패하게 된다. 1994년 일본시리즈 항목 참조. 당시 투수코치였던 호리우치 츠네오[9]는 그때가 쿠와타의 "투수로서의 절정기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1995년 6월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플라이볼을 직접 잡다가 오른쪽 팔꿈치를 다쳐 미국에서 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1996년은 재활로 인해 1경기도 등판하지 못하고 개점휴업했다. 한편, 소속팀 요미우리는 쿠와타가 없는 가운데 시즌내내 고전했지만, 시즌막판 히로시마 카프와의 11.5게임차를 뒤집는 메이크 드라마를 만들며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이후 일본시리즈에서는 이치로가 이끄는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패배하면서, 새삼 쿠와타의 공백을 실감하기도 했다. 1996년 일본시리즈 항목 참조.
1997년에는 복귀해서 10승 7패 방어율 3.77로 부활하였다. 참고로 1997시즌은 쿠와타의 PL학원동기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FA자격을 획득해 요미우리로 이적한 첫해였다. 즉, KK 콤비의 재회로 화제를 모았지만, 하필이면 기요하라의 그해 성적이 부진했고, 소속팀 요미우리도 리그 5위에 그치면서 두 선수의 재회가 빛을 바랬다.
1998년에는 9년만에 개막전 선발투수로 지명되었으며, 시즌내내 건실한 투구로 16승을 기록했지만, 아쉽게도 1승차로 야쿠르트의 가와사키 겐지로와의 다승왕 경쟁에서 패했다.
하지만 그 이후 본격적인 하락세가 시작되어 1999년은 8승 9패 5세이브, 2000년은 5승 8패 5세이브, 2001년은 4승 5패 2세이브의 성적을 거뒀다. 세이브 숫자에서 볼 수 있듯이, 선발 뿐 아니라 구원이나 중간계투로 등판하는 횟수가 늘었다. 그래도 2000년에는 팀의 일본시리즈 제패에 조금이나마 공헌했다. 2000년 일본시리즈 항목 참조.
나가시마 시게오가 감독에서 물러나고 하라 다쓰노리가 감독으로 취임한 2002년, 쿠와타는 사실 전 해에 은퇴를 결심했지만 하라 감독의 설득을 받고 현역 생활을 계속했다. 그리고 재기에 성공해 12승 6패 방어율 2.22를 기록했으며, 4년만에 두 자릿수 승리 달성 및 15년만에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을 획득했다. 또한 같은해 팀의 센트럴리그 우승 및 일본시리즈 제패에 공헌했다. 2002년 일본시리즈 항목 참조.
2003년은 5승 3패 방어율 5.93, 2004년은 3승 5패 방어율 6.47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하라 감독의 후임인 호리우치 감독에게 은퇴 권고를 받기도 했지만 현역 생활을 계속했다.
2005년에는 무승 7패 방어율 7.14를 기록했지만 젊은 선수들의 성장에 본보기 역할을 기대한다는 이유로 2006년 현역 연장이 정해졌다.
2006년에는 개인통산 173승이자 마지막 승리를 기록했지만,[10] 주루 도중 발목 부상을 당했고 결국 1군에서 더 이상 그가 등판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2006시즌 종료후 21년간의 요미우리 생활을 마감하고, 메이저리그 도전의사를 표명했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시절.[11]
2006년 12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체결한다고 발표했다. 개막전까지 메이저리그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시범 경기에서 베이스 커버 도중 주심과 충돌해 오른쪽 발목 인대 파열 부상을 입었다. 트리플 A팀인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재활했으며, 재활을 마치고 2007년 6월 9일에 메이저리그로 콜업됐다. 6월 10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양키스 전에서 무려 39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 첫 등판을 했다. 승격 초기에는 패전 처리로 등판하다가, 짐 트레이시 감독이 중간 계투로 등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시절부터 지적된 구위 저하에 쿠와타 최대의 무기인 컨트롤도 통하지 않아 19경기 등판 0승 1패, 방어율 9.43으로 부진해 팀으로부터 전력외 통고를 받았다.
2008년 1월 8일 다시 피츠버그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스프링캠프에 초청 선수로 참가해 시범경기에서 호투했지만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는 구단 구상에서 벗어나 메이저 승격은 좌절. 결국 귀국 및 은퇴 의사를 밝혔다.
은퇴 후 야구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하며, 와세다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고교야구의 대스타였지만 일본식 야구관이나 일본 야구계의 통념에 비판적인 의견을 자주 내비쳤다. 2013년에는 아사히 신문 칼럼을 통해 체벌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있는 게 없으며, 체벌과 폭력에 의존하는 것은 지도자의 게으름을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고루한 체육 지도자들을 강도 높게 비판했고, 고시엔 대회에서 나타나는 투수 혹사를 막기 위해 투구 수 제한이나 엔트리 확대와 같은 개선 방안을 제언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더 강도 높게 이른바 일본 야구의 정신적 토대라고 일컬어지는 "야구도"를 전면 비판했다.# 야구도를 단순히 일본 야구의 정신적 요소로 보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사상이 생겨난 역사적 배경을 짚었다. 러일전쟁 등 일본의 팽창과 그 과정에서 겪은 서구 열강과의 대립을 겪으며 1900년대 초 일본의 사회지도층 일각에서 미국의 '외래 스포츠'인 야구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시선이 늘어났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군국주의와 반서구 감정이 강해지자 야구통제령 등이 내려지는 등 야구에 대한 의구심과 탄압이 거세졌다. 이에 발맞추어 토비타 스이슈 같은 야구인들이 당대의 국수주의, 군국주의적 시선에 맞추어 소위 무사도, 사무라이 정신 등을 야구에 욱여넣어 야구를 일본적인 특성을 지닌 무언가로 포장해 당대 지배층의 구미에 맞는 것으로 만들어낸 철학이 '야구도'의 본질이라 분석했다. 이런 야구관은 나름 지배층의 탄압의 가능성으로부터 야구계를 지키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규율과 정신력 강화의 미명 하에 행해지는 비과학적인 훈련, 혹사, 체벌과 폭력적 위계관계라는 암부도 만들어냈다. 논문 말미에는 이런 철지난 야구관을 대체하는 스포츠맨십과 과학적 훈련법에 기반한 새로운 야구 정신이 필요하다는 말까지 내놓았다. 앞서 2010년에는 와세다대학을 수석 졸업한 후 대학원에서[12] 석사 논문으로 "야구도를 재정의함을 통해 일본 야구를 한층 더 발전시키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며 그해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책은 해당 논문의 내용을 정리해 대중본질이 낸 것.
주로 평론가, 해설가로 활동하고 간간히 아마추어 야구의 순회 지도자로 일했지만 2021 시즌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코치에 임명되면서 13년 만에 프로야구계, 더욱이 친정인 자이언츠에 복귀했다. 보직은 1군 투수 주임(chief) 코치 보좌이다. 그간 차기 감독은 현 2군 감독으로 현장에 있는 아베 신노스케와 전임감독 다카하시 요시노부 사실상 둘의 경쟁으로 여겨졌었는데, 이 둘의 대선배인 구와타가 오랜 공백을 깨고 현장에 복귀한 것. 이로써 하라 현 감독의 후임 자리를 놓고 더욱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다.[13] 2022년부턴 미야모토 카즈토모의 후임으로 투수 주임 코치로 부임했다.
하지만 현장 복귀 이후 요미우리 마운드의 붕괴를 막지 못한 책임자로 몰리며 평론가 시절의 좋았던 이미지를 깎아먹고 있다. 그나마 2021년엔 코치 보좌라는 상대적으로 발언권이 낮은 입지 때문에 투수 코치였던 미야모토 카즈모토가 주로 비판을 받았지만, 미야모토가 물러나며 정식으로 코치가 된 2022 시즌에 계투진이 무너지고 6일 로테이션을 5일 로테이션으로 바꾼 뒤 선발진도 흔들리면서 팀 성적이 5위까지 떨어지자 본격적으로 쿠와타의 지도력이 도마 위에 올라간 상황. 요미우리의 5일 로테이션은 전년도인 2021시즌 후반기에도 성적 상승세를 가속화하기 위해 도입했지만, 오히려 투수진의 피로 누적으로 8월 말에 잠시 1위를 찍은 뒤 그대로 승패마진 -1로 3위까지 추락해 대실패로 입증된 바 있었다.[14] 그럼에도 전혀 배운 게 없다는 걸 보여준 셈.
결국, 2023 코칭스태프진 발표 때 팜 총감독으로 배치전환되면서 사실상 좌천되었다.
2016년에는 더 강도 높게 이른바 일본 야구의 정신적 토대라고 일컬어지는 "야구도"를 전면 비판했다.# 야구도를 단순히 일본 야구의 정신적 요소로 보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사상이 생겨난 역사적 배경을 짚었다. 러일전쟁 등 일본의 팽창과 그 과정에서 겪은 서구 열강과의 대립을 겪으며 1900년대 초 일본의 사회지도층 일각에서 미국의 '외래 스포츠'인 야구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시선이 늘어났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군국주의와 반서구 감정이 강해지자 야구통제령 등이 내려지는 등 야구에 대한 의구심과 탄압이 거세졌다. 이에 발맞추어 토비타 스이슈 같은 야구인들이 당대의 국수주의, 군국주의적 시선에 맞추어 소위 무사도, 사무라이 정신 등을 야구에 욱여넣어 야구를 일본적인 특성을 지닌 무언가로 포장해 당대 지배층의 구미에 맞는 것으로 만들어낸 철학이 '야구도'의 본질이라 분석했다. 이런 야구관은 나름 지배층의 탄압의 가능성으로부터 야구계를 지키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규율과 정신력 강화의 미명 하에 행해지는 비과학적인 훈련, 혹사, 체벌과 폭력적 위계관계라는 암부도 만들어냈다. 논문 말미에는 이런 철지난 야구관을 대체하는 스포츠맨십과 과학적 훈련법에 기반한 새로운 야구 정신이 필요하다는 말까지 내놓았다. 앞서 2010년에는 와세다대학을 수석 졸업한 후 대학원에서[12] 석사 논문으로 "야구도를 재정의함을 통해 일본 야구를 한층 더 발전시키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며 그해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책은 해당 논문의 내용을 정리해 대중본질이 낸 것.
주로 평론가, 해설가로 활동하고 간간히 아마추어 야구의 순회 지도자로 일했지만 2021 시즌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코치에 임명되면서 13년 만에 프로야구계, 더욱이 친정인 자이언츠에 복귀했다. 보직은 1군 투수 주임(chief) 코치 보좌이다. 그간 차기 감독은 현 2군 감독으로 현장에 있는 아베 신노스케와 전임감독 다카하시 요시노부 사실상 둘의 경쟁으로 여겨졌었는데, 이 둘의 대선배인 구와타가 오랜 공백을 깨고 현장에 복귀한 것. 이로써 하라 현 감독의 후임 자리를 놓고 더욱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다.[13] 2022년부턴 미야모토 카즈토모의 후임으로 투수 주임 코치로 부임했다.
하지만 현장 복귀 이후 요미우리 마운드의 붕괴를 막지 못한 책임자로 몰리며 평론가 시절의 좋았던 이미지를 깎아먹고 있다. 그나마 2021년엔 코치 보좌라는 상대적으로 발언권이 낮은 입지 때문에 투수 코치였던 미야모토 카즈모토가 주로 비판을 받았지만, 미야모토가 물러나며 정식으로 코치가 된 2022 시즌에 계투진이 무너지고 6일 로테이션을 5일 로테이션으로 바꾼 뒤 선발진도 흔들리면서 팀 성적이 5위까지 떨어지자 본격적으로 쿠와타의 지도력이 도마 위에 올라간 상황. 요미우리의 5일 로테이션은 전년도인 2021시즌 후반기에도 성적 상승세를 가속화하기 위해 도입했지만, 오히려 투수진의 피로 누적으로 8월 말에 잠시 1위를 찍은 뒤 그대로 승패마진 -1로 3위까지 추락해 대실패로 입증된 바 있었다.[14] 그럼에도 전혀 배운 게 없다는 걸 보여준 셈.
결국, 2023 코칭스태프진 발표 때 팜 총감독으로 배치전환되면서 사실상 좌천되었다.
해당 문서 참조
1994년 일본시리즈는 '거인 VS 세이부'라는 황금 카드[15]였으며 양팀이 모두 2승씩을 기록한 채 5차전을 맞이했다. 거인의 선발은 그해 센트럴리그 정규시즌 MVP였던 쿠와타 마스미였고, 타석에는 세이부의 황금시대를 지탱하는 부동의 4번타자 기요하라 카즈히로가 들어섰다.
6회말 1사 거인이 5-1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날 3번째 타석에 들어선 기요하라. 쿠와타는 "두 사람의 대결을 즐겨도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스트라이크 존 중앙으로 초구부터 스트레이트를 던졌으나 타구는 펜스를 아득히 넘어갔다. 이 날 컨디션이 좋았다고 회고하는 쿠와타는 "외야 플라이로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던졌다"고 했으나 "역시나""그렇지"라고 마운드에서 납득할만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8회말 기요하라의 4번째 타석, 거인이 8-2로 더 달아나고 있었지만 쿠와타는 기요하라에게 연타석 홈런을 내줄 수 없다는 마음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볼카운트 1-2에서 던진 슬라이더를 기요하라가 다시 담장 밖으로 보내버리며 연타석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쿠와타는 "경기에서는 이기고 있었지만, 기요하라와 승부에서는 2개의 홈런을 내줬기 때문에 지고 있었다"라고 토로했다. 또한 "자신보다 더 대단한 사람을 라이벌로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다", "난 기요하라에게 체격도 기술도 전혀 미치지 못했다"고 기요하라에 대해 호평했다. "그와 같은 시대에 같은 팀 또는 경쟁자로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큰 것이며, 그가 없었다면 난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그와 만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다"고 최대의 찬사를 선물했다.
1994년 일본시리즈는 '거인 VS 세이부'라는 황금 카드[15]였으며 양팀이 모두 2승씩을 기록한 채 5차전을 맞이했다. 거인의 선발은 그해 센트럴리그 정규시즌 MVP였던 쿠와타 마스미였고, 타석에는 세이부의 황금시대를 지탱하는 부동의 4번타자 기요하라 카즈히로가 들어섰다.
6회말 1사 거인이 5-1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날 3번째 타석에 들어선 기요하라. 쿠와타는 "두 사람의 대결을 즐겨도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스트라이크 존 중앙으로 초구부터 스트레이트를 던졌으나 타구는 펜스를 아득히 넘어갔다. 이 날 컨디션이 좋았다고 회고하는 쿠와타는 "외야 플라이로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던졌다"고 했으나 "역시나""그렇지"라고 마운드에서 납득할만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8회말 기요하라의 4번째 타석, 거인이 8-2로 더 달아나고 있었지만 쿠와타는 기요하라에게 연타석 홈런을 내줄 수 없다는 마음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볼카운트 1-2에서 던진 슬라이더를 기요하라가 다시 담장 밖으로 보내버리며 연타석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쿠와타는 "경기에서는 이기고 있었지만, 기요하라와 승부에서는 2개의 홈런을 내줬기 때문에 지고 있었다"라고 토로했다. 또한 "자신보다 더 대단한 사람을 라이벌로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다", "난 기요하라에게 체격도 기술도 전혀 미치지 못했다"고 기요하라에 대해 호평했다. "그와 같은 시대에 같은 팀 또는 경쟁자로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큰 것이며, 그가 없었다면 난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그와 만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다"고 최대의 찬사를 선물했다.
NPB 기록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선발 | 완투 | 완봉 | 이닝 | 승 | 패 | 홀 | 세 | ERA | 피안타 | 사사구 | 탈삼진 | WHIP | |
1986 | 15 | 12 | 1 | 0 | 61⅓ | 2 | 1 | - | 0 | 5.14 | 64 | 19 | 57 | 1.32 | ||
1987 | 28 | 27 | 14 | 2 | 207⅔ | 15 | 6 | - | 0 | 2.17 | 117 | 52 | 155 | 1.06 | ||
1988 | 27 | 27 | 5 | 1 | 198⅓ | 10 | 11 | - | 0 | 3.40 | 174 | 71 | 139 | 1.14 | ||
1989 | 30 | 30 | 20 | 5 | 249 | 17 | 9 | - | 0 | 2.60 | 214 | 66 | 155 | 1.08 | ||
1990 | 23 | 23 | 17 | 2 | 186⅓ | 14 | 7 | - | 0 | 2.51 | 161 | 42 | 115 | 1.08 | ||
1991 | 28 | 27 | 17 | 3 | 227⅔ | 16 | 8 | - | 1 | 3.16 | 192 | 67 | 175 | 1.10 | ||
1992 | 29 | 29 | 11 | 3 | 210⅓ | 10 | 14 | - | 0 | 4.41 | 235 | 72 | 152 | 1.42 | ||
1993 | 26 | 26 | 8 | 1 | 178 | 8 | 15 | - | 0 | 3.99 | 162 | 73 | 158 | 1.25 | ||
1994 | 28 | 27 | 10 | 1 | 207⅓ | 14 | 11 | - | 1 | 2.52 | 175 | 63 | 185 | 1.09 | ||
1995 | 9 | 9 | 3 | 1 | 65⅓ | 3 | 3 | - | 0 | 2.48 | 53 | 21 | 61 | 1.09 | ||
1996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997 | 26 | 26 | 0 | 0 | 141 | 10 | 7 | - | 0 | 3.77 | 127 | 43 | 104 | 1.16 | ||
1998 | 27 | 27 | 7 | 1 | 181 | 16 | 5 | - | 0 | 4.08 | 197 | 52 | 116 | 1.34 | ||
1999 | 32 | 22 | 2 | 0 | 141⅔ | 8 | 9 | - | 5 | 4.07 | 137 | 63 | 100 | 1.37 | ||
2000 | 30 | 10 | 0 | 0 | 86 | 5 | 8 | - | 5 | 4.50 | 103 | 36 | 49 | 1.52 | ||
2001 | 16 | 8 | 0 | 0 | 50⅓ | 4 | 5 | - | 2 | 4.83 | 56 | 23 | 31 | 1.49 | ||
2002 | 23 | 23 | 3 | 1 | 158⅓ | 12 | 6 | - | 0 | 2.22 | 138 | 43 | 108 | 1.11 | ||
2003 | 14 | 13 | 0 | 0 | 71⅓ | 5 | 3 | - | 0 | 5.93 | 92 | 20 | 46 | 1.51 | ||
2004 | 16 | 16 | 0 | 0 | 79⅓ | 3 | 5 | - | 0 | 6.47 | 100 | 33 | 39 | 1.61 | ||
2005 | 12 | 12 | 0 | 0 | 49⅔ | 0 | 7 | - | 0 | 7.25 | 65 | 30 | 34 | 1.77 | ||
2006 | 3 | 3 | 0 | 0 | 11⅔ | 1 | 1 | - | 0 | 6.94 | 19 | 1 | 5 | 1.71 | ||
MLB 기록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선발 | 완투 | 완봉 | 이닝 | 승 | 패 | 홀 | 세 | ERA | 피안타 | 사사구 | 탈삼진 | WHIP | |
2007 | 19 | 0 | 0 | 0 | 21 | 0 | 1 | 3 | 0 | 9.34 | 25 | 20 | 12 | 1.90 | ||
NPB 통산 | 442 | 396 | 118 | 21 | 2761⅔ | 173 | 141 | 0 | 14 | 3.55 | 2641 | 890 | 1980 | 1.23 | ||
MLB 통산 | 19 | 0 | 0 | 0 | 21 | 0 | 1 | 3 | 0 | 9.34 | 25 | 20 | 12 | 1.90 |
고교 시절부터 고시엔 대회를 통해 스타덤을 탔으며, 'KK 콤비'를 이루며 함께 고교야구를 평정한 PL학원의 동기생 강타자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함께 유명해졌다. 프로 입단 후에는 사이토 마사키 , 마키하라 히로미와 함께 거인의 '세 기둥'으로 불리며 강력한 선발진의 중심이 되었다. 통산 성적은 사이토에 살짝 밀리긴 해도 자이언츠 에이스 투수 계보를 잇는 등번호 18번은 쿠와타가 요미우리에서 활약한 20여년 내내 그의 몫이었다는 점에서, 쿠와타의 입단 전 유명세나 프로에서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리그 최고의 커맨드형 투수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교한 제구력과 이를 받쳐주는 부드러운 투구폼이 특징이었으며, 그렇다고 속구가 느린 투수였냐면 그것도 아닌게 전성기 시절엔 최고구속 150km 이상도 찍었던 선수였다.
1995년 수비 도중 팔꿈치 부상을 입은 이후 시즌아웃된 뒤 1996년은 재활을 하느라 통째로 개점휴업했는데, 이 시점에서 안타깝게도 전성기 시절의 기량을 상당 부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복귀 첫해인 1997년 10승, 이듬해인 1998년은 16승을 거두며 나름 선발진에서 제 몫을 했으며, 이후 수년간 부진했지만 2002년에는 12승과 2.22의 방어율로 방어율 1위 타이틀을 차지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도 했다. 2006년을 끝으로 요미우리에서 방출되었지만 이듬해 2007년, 40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고 데뷔까지 이뤄냈을 정도로 열정도 대단한 선수였다.
또한 투수 치고는 타격에도 상당한 강점이 있었는데, 애초에 쿠와타는 고교 시절 고시엔 홈런 기록을 세울 정도로 타격에도 재질이 있었다. 이런 뛰어난 타격 능력은 프로에서도 빛을 발해 통산 7개의 홈런과 .216의 통산 타율을 기록했으며, 타율은 NPB에서 1950년대 이후 데뷔해 500타석 이상 들어선 투수 중 가장 높다. 포지션 보정이 들어가긴 하지만 타격 WAR이 무려 두 자릿수나 된다.
수비 능력도 뛰어나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8회 수상[16]했는데, 이는 니시모토 타카시와 타이를 이루는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이다. 본인 말로는 야구에서 가장 자신 있는 게 수비였고 그 다음이 타격, 가장 자신 없는 부분이 피칭이었다고 한다.
1995년 수비 도중 팔꿈치 부상을 입은 이후 시즌아웃된 뒤 1996년은 재활을 하느라 통째로 개점휴업했는데, 이 시점에서 안타깝게도 전성기 시절의 기량을 상당 부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복귀 첫해인 1997년 10승, 이듬해인 1998년은 16승을 거두며 나름 선발진에서 제 몫을 했으며, 이후 수년간 부진했지만 2002년에는 12승과 2.22의 방어율로 방어율 1위 타이틀을 차지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도 했다. 2006년을 끝으로 요미우리에서 방출되었지만 이듬해 2007년, 40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고 데뷔까지 이뤄냈을 정도로 열정도 대단한 선수였다.
또한 투수 치고는 타격에도 상당한 강점이 있었는데, 애초에 쿠와타는 고교 시절 고시엔 홈런 기록을 세울 정도로 타격에도 재질이 있었다. 이런 뛰어난 타격 능력은 프로에서도 빛을 발해 통산 7개의 홈런과 .216의 통산 타율을 기록했으며, 타율은 NPB에서 1950년대 이후 데뷔해 500타석 이상 들어선 투수 중 가장 높다. 포지션 보정이 들어가긴 하지만 타격 WAR이 무려 두 자릿수나 된다.
수비 능력도 뛰어나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8회 수상[16]했는데, 이는 니시모토 타카시와 타이를 이루는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이다. 본인 말로는 야구에서 가장 자신 있는 게 수비였고 그 다음이 타격, 가장 자신 없는 부분이 피칭이었다고 한다.
- 1985년 한미일 3국 대항 고교 야구 대회에 일본 대표로 출전한 적이 있다. 일명 KK 콤비로 불렸던 쿠와타 마스미와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일본 대표로 출전한 유일한 대회였으며, 일본 대표팀이 4전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 하이라이트 영상
- 쿠와타도 둘째 아들의 영향으로 피부 미백에 신경써야겠다며 기초 화장을 하고 다니는 등 둘째 아들과의 사이는 좋은 편이다.
- 지금은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지만, 프로야구 선수 초창기에는 일부에서 이미지가 썩 좋지 않았다. 코시엔에서는 KK 콤비로 유명해서 당대 프로야구 최고선수였던 오치아이조차 둘의 인기를 시샘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만, 쿠와타는 와세다대학에 진학한다고 공언을 한 상태라 다른 구단에서 지명을 하지 않았는데, 요미우리가 기요하라 대신 쿠와타를 지명해서 요미우리와 쿠와타가 서로 짜고 와세다대학에 갈 것처럼 하면서 지명하기로 내막이 있었던 게 아니냐 그런 식의 의심을 샀다. (일본프로야구 드래프트는 1차지명은 성적과 상관없이 동시에 원하는 선수를 지명해서, 같은 선수를 복수의 구단이 중복 지명하지 않으면 교섭권 획득. 복수의 구단이 같은 선수를 지명하면 추첨을 한다. 세간에 평가는 요미우리도 기요하라를 지명할 거라고 봤다. 이해 드래프트 최대어는 기요하라와 쿠와타였고 쿠와타는 만약 와세다대학에 간다고 공언을 안했다면 다른 구단이 쿠와타를 지명했겠지만 와세다대학에 진학한다고 해놓고 요미우리는 마치 기요하라를 지명할 것처럼 분위기를 풍기고 쿠와타를 단독 지명. 쿠와타랑 요미우리가 서로 짠 게 아니라면 요미우리는 1차지명권을 날릴 수도 있던 것이니 당연히 의심이 갈 상황이다.) 쿠와타는 은퇴 이후에 와세다대학 대학원에 진학했으니 명문인 와세다대학에 가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 위의 사례 외에도, 글러브 회사로부터 자사 글러브를 사용하는 대신 뒷돈을 받은 것 등의 해당 글러브회사의 영업사원의 사생활 폭로성 책인 <<프로야구에 작별을, 쿠와타에게 작별을>> 이라는 책이 출간 된 적이 있고, 쿠와타는 처음에는 뒷돈을 받은 것을 부정했다가 나중에 구단에 뒷돈을 받은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 당시 쿠와타가 지인등에게 자신이 언제 선발 투수로 등판할 건지 귓뜸성으로 알려준 게 야구 도박이나 승부 조작에 관여 될 수도 있었기에 구단에서 는 1년간 근신 처분을 내렸지만, 당시 감독이던 후지타 감독에 의해 몇개월 구단 자체 근신 처분으로 끝났다. 이거 말고도 일본이 한창 버블 경기일 때 지인을 통한 부동산 투자가 실패해서 엄청난 빚을 지게 되어 그 빚의 부담이나 변제를 요미우리 구단에게 맡겨 (볼을) 던지는 부동산 업자라는 식의 조롱을 듣기도 했다. 2006년 요미우리 구단에서 퇴단을 할 때 하라 감독 등 관계자에게 알리지 않고, 자신에 홈페이지 일방적으로 게시글을 올리는 식으로 알려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 1995년 경기 중 팔꿈치 부상을 당해 오랜 재활을 거쳐 거의 2년 만에 처음으로 마운드에 복귀했을 때 마운드에 엎드려 부상당한 팔꿈치를 투구판에 대는 퍼포먼스를 했는데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이다. 링크.
[1] 2007년 스프링캠프 한정[2] 스포츠과학전공. [3] 고졸 출신이지만,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문부과학성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각 대학이 대학졸과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한 경우, 각 대학의 개별 입학 자격 심사에 통과한 사람은 대학원 응시 자격이 있어 대학원 입시가 가능해진다. 일본 학교교육법 제102조 1항엔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제83조의 대학을 졸업한 자 또는 문부과학대신이 정한 바에 따라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로 한다.단, 연구과의 교육연구상 필요한 경우에는 해당 연구과와 관련된 입학자격을 석사학위 또는 제104조제1항에서 규정하는 문부과학대신이 정한 학위를 가진 자 또는 문부과학대신이 정한 바에 따라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로 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와세다대학은 스포츠과학연구과의 출원자격으로 국가대표 등 정상급 실적 3년 이상, 스포츠 비즈니스 관련 기업 등에서의 5년 이상 실무 경험 등을 갖추고 있었기에, 프로야구 선수 출신인 쿠와타의 입학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4] サンサンササン サインはV Vは勝利だビクトリー エースナンバーよく似合う 桑田 桑田 桑田(산산사산 사인은 V V는 승리다 빅토리 에이스 넘버가 잘 어울리는 쿠와타 쿠와타 쿠와타[5] 이 당시 기요하라가 쿠와타를 손 봐주겠다며 이리저리 찾아다니고, 기요하라의 성격을 아는 동급생들이 분노한 기요하라를 달래기 위해 배팅볼을 던져 주었다는 썰이 있다.[6] 실제로 통산 타율 2할1푼, 통산 192안타 79타점 7홈런으로 투수치고는 상당한 타격 실력을 자랑한다. 이 정도면 대타 요원으로 써도 될 수준.[7] 킨테츠에게 3연패 후 4연승한 리버스 스윕 시리즈다.[8] 경기장소는 도쿄돔.[9] 이 둘은 요미우리의 에이스 넘버인 등번호 18번의 계보를 이었다. 후지타 모토시-호리우치 츠네오-쿠와타 마스미를 거쳐 FA로 이적한 스기우치 토시야가 은퇴 전까지 달았다.[10] 4/13 히로시마전. 이날 이승엽은 당연히 4번타자로 출장했으나 4타수 무안타로 삽을 신나게 펐다. 3번타자와 5번타자가 훗날 요미우리 감독, 일본국대감독을 지냈다.[11] 여담으로 뒤에 보이는 양키스 타자는 같은 일본인 선수이자 요미우리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마쓰이 히데키다.[12] 정확히는 와세다대학 대학원 1년 석사 과정[13] 요미우리의 감독순혈주의 전통을 깨고 1군 감독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쿠와타는 NPB시절엔 오로지 요미우리 유니폼 외에 다른 유니폼은 안 입었지만, 마쓰이 히데키나 우에하라 코지처럼 메이저리그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경력으로 완전 순혈로 보기엔 애매하기 때문이다.[14] 다만 이 해 요미우리의 추락은 투수진 붕괴뿐만이 아닌 부상자의 속출,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고정적인 선수 기용, 타선의 집단적 약화 등 팀의 전체적인 문제점들이 후반전이 흐를수록 누적되다 시즌 막판인 9월 이후 폭발했던 것이 컸다.[15] 국내로서도 양대리그의 패자의 정상 결전에, 일본 야구계 대표 명문팀인 요미우리와 신흥 왕조 세이부의 대결, V9시절의 주역인 양 팀 감독 나가시마 시게오와 모리 마사아키의 대결에 고교야구 최대의 스타인 쿠와타 대 기요하라의 대결 등 상상할 수 있던 흥행요소들이 총집결한 시리즈였다. 심지어 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사태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포스트시즌이 모조리 취소되며 갈 길이 없어진 일부 미국 야구팬들마저 대안으로 일본시리즈 중계에 눈을 돌렸을 정도였다.[16] 1987, 1988, 1991, 1993~1994, 1997~1998, 2002.[17] 플로리다 주 카디널 뉴먼 고교에서 야구를 하면서 플로리다 주 올스타 팀에 뽑힌 적도 있지만 그 이후 야구계와 관련된 소식은 없다. 걸릭슨의 다른 5명의 자녀들도 스포츠 활동에 진출했는데, 그중 딸 3명은 모두 테니스 선수로 활동했다.[18] 그해 홈런 2개를 쳤는데 전부 나고야 구장에서 요미우리 상대로 쳤다. 쿠와타 외에 털린 투수는 쿠와타와 동료였던 정민태와 불화가 매우 심했던 가토리 요시타카. 결국 이해 주니치의 승점자판기 노릇을 하면서 우승까지 내주고 왕정치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여담으로 둘 다 1군 데뷔 날짜가 같은데 그날은 요미우리가 주니치를 먼지나게 털어먹었고 야마우치 카즈히로 감독은 얼마되지 않아 경질되고 히로시마 우승 확정된 날 요미우리 타격 코치로 복귀하게 되었다. 승리투수는 야마다의 동기뻘인 미즈노 카즈히토(現, 요미우리 자이언츠 순회코치).[19] 장명부, 김일융 등 KBO 초창기 재일동포 선수들은 논외.[20]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 중.[21] 당시 쿠와타의 말 : 고교시절의 경험으로 한국야구가 강한 것은 알고 있다. 난 오늘 3이닝만 던진다. 3이닝 동안 최선을 다하겠다.ㅡ1992년 발간된 허구연의 저서 <홈런과 삼진 사이> 중.[22] 제1회 한일 슈퍼게임 1차전 지상파중계는 KBS였다. 당시 허구연은 1차전 MBC 라디오중계 해설을 맡았었다. 하나 덧붙이자면, 1ㆍ3ㆍ5차전은 KBS 지상파중계, 2ㆍ4ㆍ6차전은 MBC 지상파중계 순이었다.[23] 당시 한국의 스포츠매거진 <루키> 1996년 12월판에 조성민 특집기사가 실렸는데, 구와타의 깜짝 방한소식과 간단한 인터뷰도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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