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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26대 황제 고르디아누스 2세 GORDIANVS II | |
제호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 아프리카누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 Africanus Augustus |
이름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Marcus Antonius Gordianus |
출생 | 192년 |
사망 | 238년 4월 (향년 46세)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전임자 | |
후임자 | |
부모 | |
가족 | |
종교 |
192년 로마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Marcus Antonius Gordianus)로 아버지인 고르디아누스 1세와 거의 똑같다. 참고로 일부 서적에 알려진 그의 이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 아프리카누스는 아버지와 함께 공동 황제를 선포한 뒤, 개명 후 제호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 아프리카누스 아우구스투스를 선포할 때의 이름 중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뺀 것이다.
현대 사가들에게 신뢰성이 떨어지는 사료로 평가받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그는 명문가 태생의 외할머니를 통해 트라야누스의 피를 이어 받았고, 어머니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증손녀이자 명문가 출신이라고 전해지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가족은 고르디아누스 1세의 출신 가문에 대해 서술했듯이 소아시아 태생의 기사계급에 속했으며, 그의 가계는 공화정 후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안토니아 중 한쪽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받은 조상을 둔 로마시민권자의 후손이었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가 로마 원로원 최상위 부자이자 교양인이며, 후원자였으므로 젊은 시절부터 상류층의 엘리트교육을 받았다. 타고난 문학가이자 교양인이었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성품 자체도 겸손하고 따뜻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르디아누스 2세의 삶에 대해서는 아버지인 고르디아누스 1세만큼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으며, 이 사람의 성품이 겸손하고 따뜻했다는 주장이 맞는지는 의문이라고 한다.
믿을 수 없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2세는 엘라가발루스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 때 재무관과 집정관을 지냈으며, 46세의 삶 동안 미혼으로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4세기 초 익명의 작가가 저술한 <카이사르들에 관한 초록(Epitome de Caesaribus)>에 따르면, 갈리에누스 암살에 가담한 뒤 제위에 오른 클라우디우스 2세가 고르디아누스 2세의 사생아 또는 서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오늘날 일부 학자들에게 사실이 아닐 거라고 평가받고 있다. 왜냐하면 고르디아누스 2세가 제위에 오르기 전, 있던 직책은 전직법무관, 전직집정관 신분의 원로원 의원들이 오르지 않는 총독 공관 소속의 레가투스였기 때문이다.
고르디아누스 2세에게는 적어도 2명의 여자형제가 있었다. 이중 그의 누이동생 안토니아 고르디아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측근이자 히스파니아[2] 태생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를 시조로 하는 로마 명문 원로원 가문 출신의 원로원 의원과 결혼해서 고르디아누스 3세를 낳았다고 전해지는데, 그녀의 남편이자 고르디아누스 3세의 부친이 명문가 귀족인지 여부는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가계처럼 확실하지 않으며 여러 증거상 정통성을 이유로 한 조작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대 사가들에게 신뢰성이 떨어지는 사료로 평가받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그는 명문가 태생의 외할머니를 통해 트라야누스의 피를 이어 받았고, 어머니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증손녀이자 명문가 출신이라고 전해지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가족은 고르디아누스 1세의 출신 가문에 대해 서술했듯이 소아시아 태생의 기사계급에 속했으며, 그의 가계는 공화정 후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안토니아 중 한쪽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받은 조상을 둔 로마시민권자의 후손이었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가 로마 원로원 최상위 부자이자 교양인이며, 후원자였으므로 젊은 시절부터 상류층의 엘리트교육을 받았다. 타고난 문학가이자 교양인이었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성품 자체도 겸손하고 따뜻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르디아누스 2세의 삶에 대해서는 아버지인 고르디아누스 1세만큼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으며, 이 사람의 성품이 겸손하고 따뜻했다는 주장이 맞는지는 의문이라고 한다.
믿을 수 없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2세는 엘라가발루스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 때 재무관과 집정관을 지냈으며, 46세의 삶 동안 미혼으로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4세기 초 익명의 작가가 저술한 <카이사르들에 관한 초록(Epitome de Caesaribus)>에 따르면, 갈리에누스 암살에 가담한 뒤 제위에 오른 클라우디우스 2세가 고르디아누스 2세의 사생아 또는 서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오늘날 일부 학자들에게 사실이 아닐 거라고 평가받고 있다. 왜냐하면 고르디아누스 2세가 제위에 오르기 전, 있던 직책은 전직법무관, 전직집정관 신분의 원로원 의원들이 오르지 않는 총독 공관 소속의 레가투스였기 때문이다.
고르디아누스 2세에게는 적어도 2명의 여자형제가 있었다. 이중 그의 누이동생 안토니아 고르디아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측근이자 히스파니아[2] 태생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를 시조로 하는 로마 명문 원로원 가문 출신의 원로원 의원과 결혼해서 고르디아누스 3세를 낳았다고 전해지는데, 그녀의 남편이자 고르디아누스 3세의 부친이 명문가 귀족인지 여부는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가계처럼 확실하지 않으며 여러 증거상 정통성을 이유로 한 조작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70대 후반에 접어든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가 전직 집정관 신분으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속주총독으로 파견되었을 때, 아버지를 보좌하는 군단 사령관 자격으로 동행했다.[3] 이 조치는 아버지 고르디아누스가 아프리카 속주 총독 자리에 응모해, 원로원 표결을 통해 당선될 때 계산된 것으로 보인다.[4] 그러다가 238년 초, 북아프리카의 부유한 젊은 지주들에 의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보낸 재정관리인 등 로마 정부 관리들이 살해됨과 동시에, 그는 아버지와 함께 황제로 선포되게 된다. 그 후, 원로원에 서신을 보내 원로원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황제가 되었다.
당시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와 함께 원로원에 서신을 보낼 시점에 이미 황제로 선포된 티스드루스를 떠나 잘 정비된 속주의 주도 카르타고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두 사람은 티스드루스에서는 마지못해 보라색 망토를 둘렀다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정당성을 호소했다. 헌데 카르타고로 향하는 시점부터는 황제 복장에 황제를 상징하는 온갖 장신구를 착용하고 로마황제로 행동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선포 직전부터 이미 황제가 된 듯 월계관을 쓰고, 주변에는 현지 청년 중 키가 크고 강건한 이들을 차출해 로마 근위대 병사들이 연상되는 복장을 입히고 그들에게 파스케스를 들게 했다. 이에 대해 동시대 사가 헤로디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들이 황제와 일반 관료를 구분짓는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신성한 불'이라고 불린 황제를 뜻하는 각종 권위를 주변에 모조리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즉, 실상을 살펴보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 대한 원로원, 로마인들의 증오를 이용해 아프리카 속주로 간 시점 이전부터 반란이 벌어지면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편승하려고 한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당시 카르타고 시는 헤로디아누스의 증언처럼 아이깁투스[5] 알렉산드리아, 시리아 코일레의 안티오키아와 제국 내 두번째 도시를 놓고 다툰 최대 도시였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푸닉 농장주들의 반란을 묵인하고 그들에게 옹립된 형태로 황제가 됐을 때, 그들이 거처를 카르타고로 옮긴 것은, 이들이 로마 내 세력들과 장기전도 각오할 준비를 염두에 뒀음을 의미했다.
고르디아누스 1세는 고령이었고 아주 부유한 신참자 출신 원로원 의원이었고,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아버지와 달리 제대로 된 선출직에는 이름을 온전히 올리지 못한 원로원 의원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지위는 온갖 욕을 먹고 있는 트락스와 달리 탄탄했다. 더군다나 이들이 수십년 동안 여러 문예 후원을 베푼 덕에, 불만이 가득한 로마 원로원이 이들의 반란에 동조할 확률은 높았다. 특히,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자신의 인맥과 부, 명예라면 동료 의원들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이들 부자는 카르타고에서 황제 노릇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1세는 자신의 친구, 친척들에게 서신을 보냈고 원로원 내 유력 인사들에게도 서신을 보내 간곡히 도움을 요청했다. 이를 담당한 이는 휘하에 있던 아프리카 속주에서 근무 중인 재무관이 중간 관리자가 되어, 총독 관저에 근무 중인 백인대장, 대대장들이 파견되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이때 그가 보낸 서신은 모두 황제만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제작된 밀봉 형태의 밀랍판이었는데, 이후 행동은 매우 용의주도했다. 카르타고 입성 전에 황제 자격으로 막시마누스 트락스가 보낸 자들을 죽여 버렸고, 로마에 있던 가족과 친척들에게 서신을 보내 막대한 부를 이용해 로비를 펼쳤다. 이윽고 그는 원로원 유력 인사들에게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을 대상으로 공개서한을 보내며 아프리카 속주민과 로마의 공고한 연합만이 가장 야만스럽고 경멸적인 트라쿠스를 제거할 수 있다고 간곡히 호소했다.
그런데 이런 평화적인 호소 외에는 무척 비열한 방법이 많았다.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는 로마인들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속주 안에서는 정보가 새어 나갈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본인 지지자 외의 인사들을 추방했고, 이전까지 했던 재판 판결 중 유죄판결을 받은 인사들의 판결을 재심해 모두 사면하고 자기 편으로 포섭했다. 아울러 망명자들에게도 죄를 사면해 주겠다고 꼬셨다. 동시에 그는 친구, 친척, 지지세력을 통해 근위대 병영에 사람을 보내, 자신들을 지지해주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돈을 즉시 주겠다고 약속하고 로마 거주민 모두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큰 선물을 주겠다고 발표까지 했다. 이렇게 되니, 근위대와 평민들은 고르디아누스의 즉위를 일단 반겼다.
이런 상황에서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는 원로원과 상의를 하는 와중에, 막시미누스의 프라이토리아 근위대장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비탈리아누스를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까지 몰래 파견했다. 이때 일에 대해 조시무스는,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황제 참칭 직후 이런 일을 벌인 뒤 신속히 로마에 사람을 보내 발레리아누스에게 자신들의 황제 참칭이 문제가 있어도 원로원에서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호소했다고 한다. 동시대 사가 헤로디아누스의 기술은 더 구체적이다. 이 사람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는 비탈리아누스가 자신들의 즉위를 반대하고 격렬하게 저항할 것이라고 의심해 죽였다고 한다. 당시 비탈리아누스는 가장 야만적이고 잔혹한 막시미누스의 행동을 따른데다, 막시미누스와 가장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고 해도 이런 방법은 그 정당성을 스스로 해치는 행동에 불과했다.
실제 비탈리아누스 암살은 매우 비열하고 비양심적인 방법으로 진행됐다. 후일 원로원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탄핵하면서, 처형 형태로 포장됐지만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고르디아누스 1세 이름으로 비탈리아누스에게 교섭을 요청해 서신을 보낸 다음, 그가 고르디아누스의 인장이 맞는지 확인하는 틈을 타서 준비된 단검으로 무참히 찔러 죽였다. 이를 담당한 이는 신체가 매우 강건하고 건장한 이로 고르디아누스 부자 휘하 재무관으로 신분을 위장한 암살범이었다고 한다.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보낸 암살범이 비탈리아누스를 암살했을 때, 근위대와 비탈리아누스 가족들은 도리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비탈리아누스를 살해했다고 여겼다고 한다. 그 이유는 트락스가 재위 기간 내내 제 부하라도 마음에 안들거나 수틀리면 총독이나 원로원 인사들 이름을 도용해 암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와 함께 원로원에 서신을 보낼 시점에 이미 황제로 선포된 티스드루스를 떠나 잘 정비된 속주의 주도 카르타고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두 사람은 티스드루스에서는 마지못해 보라색 망토를 둘렀다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정당성을 호소했다. 헌데 카르타고로 향하는 시점부터는 황제 복장에 황제를 상징하는 온갖 장신구를 착용하고 로마황제로 행동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선포 직전부터 이미 황제가 된 듯 월계관을 쓰고, 주변에는 현지 청년 중 키가 크고 강건한 이들을 차출해 로마 근위대 병사들이 연상되는 복장을 입히고 그들에게 파스케스를 들게 했다. 이에 대해 동시대 사가 헤로디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들이 황제와 일반 관료를 구분짓는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신성한 불'이라고 불린 황제를 뜻하는 각종 권위를 주변에 모조리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즉, 실상을 살펴보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 대한 원로원, 로마인들의 증오를 이용해 아프리카 속주로 간 시점 이전부터 반란이 벌어지면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편승하려고 한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당시 카르타고 시는 헤로디아누스의 증언처럼 아이깁투스[5] 알렉산드리아, 시리아 코일레의 안티오키아와 제국 내 두번째 도시를 놓고 다툰 최대 도시였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푸닉 농장주들의 반란을 묵인하고 그들에게 옹립된 형태로 황제가 됐을 때, 그들이 거처를 카르타고로 옮긴 것은, 이들이 로마 내 세력들과 장기전도 각오할 준비를 염두에 뒀음을 의미했다.
고르디아누스 1세는 고령이었고 아주 부유한 신참자 출신 원로원 의원이었고,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아버지와 달리 제대로 된 선출직에는 이름을 온전히 올리지 못한 원로원 의원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지위는 온갖 욕을 먹고 있는 트락스와 달리 탄탄했다. 더군다나 이들이 수십년 동안 여러 문예 후원을 베푼 덕에, 불만이 가득한 로마 원로원이 이들의 반란에 동조할 확률은 높았다. 특히,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자신의 인맥과 부, 명예라면 동료 의원들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이들 부자는 카르타고에서 황제 노릇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1세는 자신의 친구, 친척들에게 서신을 보냈고 원로원 내 유력 인사들에게도 서신을 보내 간곡히 도움을 요청했다. 이를 담당한 이는 휘하에 있던 아프리카 속주에서 근무 중인 재무관이 중간 관리자가 되어, 총독 관저에 근무 중인 백인대장, 대대장들이 파견되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이때 그가 보낸 서신은 모두 황제만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제작된 밀봉 형태의 밀랍판이었는데, 이후 행동은 매우 용의주도했다. 카르타고 입성 전에 황제 자격으로 막시마누스 트락스가 보낸 자들을 죽여 버렸고, 로마에 있던 가족과 친척들에게 서신을 보내 막대한 부를 이용해 로비를 펼쳤다. 이윽고 그는 원로원 유력 인사들에게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을 대상으로 공개서한을 보내며 아프리카 속주민과 로마의 공고한 연합만이 가장 야만스럽고 경멸적인 트라쿠스를 제거할 수 있다고 간곡히 호소했다.
그런데 이런 평화적인 호소 외에는 무척 비열한 방법이 많았다.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는 로마인들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속주 안에서는 정보가 새어 나갈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본인 지지자 외의 인사들을 추방했고, 이전까지 했던 재판 판결 중 유죄판결을 받은 인사들의 판결을 재심해 모두 사면하고 자기 편으로 포섭했다. 아울러 망명자들에게도 죄를 사면해 주겠다고 꼬셨다. 동시에 그는 친구, 친척, 지지세력을 통해 근위대 병영에 사람을 보내, 자신들을 지지해주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돈을 즉시 주겠다고 약속하고 로마 거주민 모두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큰 선물을 주겠다고 발표까지 했다. 이렇게 되니, 근위대와 평민들은 고르디아누스의 즉위를 일단 반겼다.
이런 상황에서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는 원로원과 상의를 하는 와중에, 막시미누스의 프라이토리아 근위대장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비탈리아누스를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까지 몰래 파견했다. 이때 일에 대해 조시무스는,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황제 참칭 직후 이런 일을 벌인 뒤 신속히 로마에 사람을 보내 발레리아누스에게 자신들의 황제 참칭이 문제가 있어도 원로원에서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호소했다고 한다. 동시대 사가 헤로디아누스의 기술은 더 구체적이다. 이 사람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는 비탈리아누스가 자신들의 즉위를 반대하고 격렬하게 저항할 것이라고 의심해 죽였다고 한다. 당시 비탈리아누스는 가장 야만적이고 잔혹한 막시미누스의 행동을 따른데다, 막시미누스와 가장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고 해도 이런 방법은 그 정당성을 스스로 해치는 행동에 불과했다.
실제 비탈리아누스 암살은 매우 비열하고 비양심적인 방법으로 진행됐다. 후일 원로원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탄핵하면서, 처형 형태로 포장됐지만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고르디아누스 1세 이름으로 비탈리아누스에게 교섭을 요청해 서신을 보낸 다음, 그가 고르디아누스의 인장이 맞는지 확인하는 틈을 타서 준비된 단검으로 무참히 찔러 죽였다. 이를 담당한 이는 신체가 매우 강건하고 건장한 이로 고르디아누스 부자 휘하 재무관으로 신분을 위장한 암살범이었다고 한다.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보낸 암살범이 비탈리아누스를 암살했을 때, 근위대와 비탈리아누스 가족들은 도리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비탈리아누스를 살해했다고 여겼다고 한다. 그 이유는 트락스가 재위 기간 내내 제 부하라도 마음에 안들거나 수틀리면 총독이나 원로원 인사들 이름을 도용해 암살했기 때문이다.
비탈리아누스가 암살되자,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보낸 사람들과 고르디아누스 가문 사람들은 거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비탈리아누스가 야만족 황제에게 살해된 양 소문을 퍼뜨렸다. 이렇게 되니, 집정관들과 원로원, 로마시민들은 막시미누스가 또 잔혹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해 겁에 질렀다. 이미 막시미누스 트락스의 무능함과 잔혹함, 독단적인 행동으로 여론은 황제를 갈아치워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한 터라 로마 시의 치안은 불안해졌다.
이런 흐름 속에, 4월 2일 고르디아누스 1세가 보낸 편지가 원로원에 도착한다. 원로원에게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는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들의 친구, 가족, 친척들에게 서신을 보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비난하고, 자신들을 황제로 선포할 것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집정관과 원로원 동료들에게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유일하게 정규군을 이끌고 있던 , 전직 법무관인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를 해임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철저한 각본대로 이뤄진 까닭에, 원로원 의원들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공개서한으로 보낸 약속을 이행한다면 그를 인정해주겠다고 떠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프리카 속주에서 황제로 추대된 고르디아누스 1세가 쓴 편지가 그해 집정관인 율리우스 실라누스의 낭독으로 동료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발표됐다. 실라누스의 대리 낭독이 끝나자마자, 원로원은 다시 한 번 그들이 모든 약속을 이행한다면 좋겠다고 답변한 다음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공동황제로 추대했다. 이때 원로원은 새 황제의 요청에 따라 막시미누스 트락스를 국가의 적(공적)으로 선포한 뒤, 다음 날 아침 <원로원 통고문>으로 제국 각지에 이를 알린다.
그런데 이때부터 로마 상황은 심각해진다. 고르디아누스 부자 즉위 이후, 고르디아누스 가문 지지자들이 꾸린 자경단과 그 측근들의 사적 보복으로 수도 로마는 난장판이 됐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밑에서 근무한 관료, 세금징수원들은 고르디아누스 가문 지지자들에게 잡혀 살해되고 하수구, 테베레 강으로 던져졌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동상들은 보이는 족족 파괴됐고, 의문을 제기한 이들은 고발된 뒤 모조리 처벌받았다. 고르디아누스 지지자 중 일부는 떼를 지어 자신들에게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살해하고 행패를 부렸다. 그들은 원로원을 향해 돌을 던졌고 수도를 개판으로 만들었다. 이에 치안을 책임지게 된 도시 장관 사비누스는 치안 유지를 앞에서 진두지휘하다가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순직했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해 헤로디아누스는 이때 벌어진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의 행동을 가리켜, 내전이 시작됐다고 평했다.
이런 흐름 속에, 4월 2일 고르디아누스 1세가 보낸 편지가 원로원에 도착한다. 원로원에게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는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들의 친구, 가족, 친척들에게 서신을 보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비난하고, 자신들을 황제로 선포할 것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집정관과 원로원 동료들에게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유일하게 정규군을 이끌고 있던 , 전직 법무관인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를 해임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철저한 각본대로 이뤄진 까닭에, 원로원 의원들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공개서한으로 보낸 약속을 이행한다면 그를 인정해주겠다고 떠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프리카 속주에서 황제로 추대된 고르디아누스 1세가 쓴 편지가 그해 집정관인 율리우스 실라누스의 낭독으로 동료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발표됐다. 실라누스의 대리 낭독이 끝나자마자, 원로원은 다시 한 번 그들이 모든 약속을 이행한다면 좋겠다고 답변한 다음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공동황제로 추대했다. 이때 원로원은 새 황제의 요청에 따라 막시미누스 트락스를 국가의 적(공적)으로 선포한 뒤, 다음 날 아침 <원로원 통고문>으로 제국 각지에 이를 알린다.
그런데 이때부터 로마 상황은 심각해진다. 고르디아누스 부자 즉위 이후, 고르디아누스 가문 지지자들이 꾸린 자경단과 그 측근들의 사적 보복으로 수도 로마는 난장판이 됐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밑에서 근무한 관료, 세금징수원들은 고르디아누스 가문 지지자들에게 잡혀 살해되고 하수구, 테베레 강으로 던져졌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동상들은 보이는 족족 파괴됐고, 의문을 제기한 이들은 고발된 뒤 모조리 처벌받았다. 고르디아누스 지지자 중 일부는 떼를 지어 자신들에게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살해하고 행패를 부렸다. 그들은 원로원을 향해 돌을 던졌고 수도를 개판으로 만들었다. 이에 치안을 책임지게 된 도시 장관 사비누스는 치안 유지를 앞에서 진두지휘하다가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순직했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해 헤로디아누스는 이때 벌어진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의 행동을 가리켜, 내전이 시작됐다고 평했다.
동시대 역사가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새 황제들의 편지와 원로원의 포고문이 제국 전역을 통해 발표될 당시, 바로 옆의 누미디아 외의 다른 지방 속주 총독들도 원로원의 조치를 이해하지 못해 어이없어 하거나 분노해 했다. 그래서 어떤 총독은 공문을 전달하려고 온 이를 붙잡아 고문을 하고, 그들을 반역죄로 죽였다고 한다.
이는 고르디아누스 부자에게 순식간에 나쁜 놈으로 몰린 카펠리아누스 역시 비슷했다. 누미디아 속주 총독 카펠리아누스는 세습 원로원 의원으로 전직 법무관 출신의 야전사령관이며 법률가였다. 그는 로마와 원로원 내 친구, 가족, 동료들에게 상황을 들어 알고 있었고, 원로원에서 자신에게 단순권고 차원에서 총독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하자, 이러한 통고문을 즉각 거부했다. 애당초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황제 선언을 반역으로 본 사람인데다, 사적 원한도 깊고 성향 자체도 천상 군인이자 원칙주의자인 터라 이런 결정은 당연했다. 더욱이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황제 선포 후 벌인 행동이나, 이들의 명령으로 푸닉 지방에서 반기를 든 농장주들이 로마 재정공무원들을 죽이는 일까지 벌어져 카펠리아누스와 그 제장들은 통고문을 무시하기로 결정내린다.
당시 카펠리아누스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고르디아누스 일가와 일을 협력하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오랫동안 앙심을 품을 정도로 감정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 이 사람의 심기를 제대로 건든 일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원로원에게 자신의 즉각 해임을 요청했다는 것이지만, 그보다 그를 더 화나게 한 일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자신들의 대리인을 누미디아로 파견해, 일방적으로 총독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하고 협박하면서 자존심까지 건든 부분이었다. 2014년 도널드 왓슨의 저서에 따르면, 원로원이 행동하기 전에 고르디아누스 1세가 마음대로 카펠리아누스 후임자를 파견했다고 하니 이 행동이 카펠리아누스, 원로원 모두에게 어떻게 해석되었을지는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카펠리아누스는 대부분의 총독들처럼 일단 기존 황제인 막시미누스 트락스에 대해 지지를 선언했으며,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반역자로 여기고 즉시 이들 부자를 공격했다.
카펠리아누스가 북아프리카 일대의 유일한 정규군이라고 할 수 있는 제3군단을 이끌고 카르타고를 침공할 당시, 79세의 고르디아누스 1세는 카르타고 총독 관저에 머물고,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가 속주 내에 유일하게 주둔하고 있는 1개 군단[6]를 이끌고 카펠리아누스 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방어선을 지키려고 했다. 이는 병력이 적고 카펠리아누스와 제3군단의 전투 경험과 실적을 생각해 짜낸 묘안이었는데,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카르타고 시내를 전장으로 삼아 벌인 카르타고 시가전은 시작부터 승부는 결정된 상태였다.
더 큰 불행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모두 군사적 역량도 부족하고, 이 방면에서도 평균 이하였다는 건데 여기에서 고르디아누스 2세는 민병대와 정규군의 충돌을 감안하지 않고 장애물을 쌓은 다음 정면 충돌 방식으로 응전했다. 이렇게 되니, 악조건은 가중됐고 카르타고 시내는 생지옥으로 변하게 된다. 1천여명과 함께 카펠리아누스의 공격을 막던 46세의 고르디아누스 2세는 말을 타고 뛰어들어가는 무모한 방법을 사용하다가, 적진에 뛰어든 직후 전사했고 시체도 찾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그를 따라서 전면전을 펼친 고르디아누스 수비대 역시 녹아내렸다는 표현 그대로 박살이 나고, 이들을 지지한 농장주와 그 가족들, 무고한 카르타고 시민들은 반란 진압에 나선 제3군단의 공격에 살육된다. 따라서 시내 곳곳에서는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인 농장주들이 비명을 지르고, 그 가족들이 끌려가면서 사정하는 곡소리가 시내를 울렸고, 시가지와 근교 농장들은 반란 진압 방식으로 살육과 방화를 자행하는 제3군단 손에 모조리 파괴된다.
이런 가운데, 고르디아누스 1세는 총독 관저 내 자신의 침실에서 여유롭게 소식을 기다렸다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보고 받는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1세는 카펠리아누스 측과 교섭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울해했다. 그러다가 그는 방으로 들어간 뒤, 매고 있던 허리띠로 목을 매 스스로 죽었다. 이는 황제 선포 후 한달도 안 된 3주 남짓이었다.
며칠 뒤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달됐다. 당시 로마 시민과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주변과 현지 주민들에게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어,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은 듯 놀라워 했다. 이에 대해 헤로디아누스는, 시민들과 원로원 모두 어리둥절했고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말과 달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당황스러워 했다고 한다.
따라서 원로원은 사태 파악을 한 뒤에야 속은 것을 알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그 즉시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공동황제로 선택한다. 이때 원로원은 독재자 막시미누스 타도를 결의했다.
이는 고르디아누스 부자에게 순식간에 나쁜 놈으로 몰린 카펠리아누스 역시 비슷했다. 누미디아 속주 총독 카펠리아누스는 세습 원로원 의원으로 전직 법무관 출신의 야전사령관이며 법률가였다. 그는 로마와 원로원 내 친구, 가족, 동료들에게 상황을 들어 알고 있었고, 원로원에서 자신에게 단순권고 차원에서 총독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하자, 이러한 통고문을 즉각 거부했다. 애당초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황제 선언을 반역으로 본 사람인데다, 사적 원한도 깊고 성향 자체도 천상 군인이자 원칙주의자인 터라 이런 결정은 당연했다. 더욱이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황제 선포 후 벌인 행동이나, 이들의 명령으로 푸닉 지방에서 반기를 든 농장주들이 로마 재정공무원들을 죽이는 일까지 벌어져 카펠리아누스와 그 제장들은 통고문을 무시하기로 결정내린다.
당시 카펠리아누스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고르디아누스 일가와 일을 협력하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오랫동안 앙심을 품을 정도로 감정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 이 사람의 심기를 제대로 건든 일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원로원에게 자신의 즉각 해임을 요청했다는 것이지만, 그보다 그를 더 화나게 한 일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자신들의 대리인을 누미디아로 파견해, 일방적으로 총독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하고 협박하면서 자존심까지 건든 부분이었다. 2014년 도널드 왓슨의 저서에 따르면, 원로원이 행동하기 전에 고르디아누스 1세가 마음대로 카펠리아누스 후임자를 파견했다고 하니 이 행동이 카펠리아누스, 원로원 모두에게 어떻게 해석되었을지는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카펠리아누스는 대부분의 총독들처럼 일단 기존 황제인 막시미누스 트락스에 대해 지지를 선언했으며,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반역자로 여기고 즉시 이들 부자를 공격했다.
카펠리아누스가 북아프리카 일대의 유일한 정규군이라고 할 수 있는 제3군단을 이끌고 카르타고를 침공할 당시, 79세의 고르디아누스 1세는 카르타고 총독 관저에 머물고,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가 속주 내에 유일하게 주둔하고 있는 1개 군단[6]를 이끌고 카펠리아누스 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방어선을 지키려고 했다. 이는 병력이 적고 카펠리아누스와 제3군단의 전투 경험과 실적을 생각해 짜낸 묘안이었는데,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카르타고 시내를 전장으로 삼아 벌인 카르타고 시가전은 시작부터 승부는 결정된 상태였다.
더 큰 불행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모두 군사적 역량도 부족하고, 이 방면에서도 평균 이하였다는 건데 여기에서 고르디아누스 2세는 민병대와 정규군의 충돌을 감안하지 않고 장애물을 쌓은 다음 정면 충돌 방식으로 응전했다. 이렇게 되니, 악조건은 가중됐고 카르타고 시내는 생지옥으로 변하게 된다. 1천여명과 함께 카펠리아누스의 공격을 막던 46세의 고르디아누스 2세는 말을 타고 뛰어들어가는 무모한 방법을 사용하다가, 적진에 뛰어든 직후 전사했고 시체도 찾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그를 따라서 전면전을 펼친 고르디아누스 수비대 역시 녹아내렸다는 표현 그대로 박살이 나고, 이들을 지지한 농장주와 그 가족들, 무고한 카르타고 시민들은 반란 진압에 나선 제3군단의 공격에 살육된다. 따라서 시내 곳곳에서는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인 농장주들이 비명을 지르고, 그 가족들이 끌려가면서 사정하는 곡소리가 시내를 울렸고, 시가지와 근교 농장들은 반란 진압 방식으로 살육과 방화를 자행하는 제3군단 손에 모조리 파괴된다.
이런 가운데, 고르디아누스 1세는 총독 관저 내 자신의 침실에서 여유롭게 소식을 기다렸다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보고 받는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1세는 카펠리아누스 측과 교섭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울해했다. 그러다가 그는 방으로 들어간 뒤, 매고 있던 허리띠로 목을 매 스스로 죽었다. 이는 황제 선포 후 한달도 안 된 3주 남짓이었다.
며칠 뒤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달됐다. 당시 로마 시민과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주변과 현지 주민들에게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어,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은 듯 놀라워 했다. 이에 대해 헤로디아누스는, 시민들과 원로원 모두 어리둥절했고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말과 달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당황스러워 했다고 한다.
따라서 원로원은 사태 파악을 한 뒤에야 속은 것을 알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그 즉시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공동황제로 선택한다. 이때 원로원은 독재자 막시미누스 타도를 결의했다.
그는 포도주를 어느 정도 좋아했지만 항상 어떤 식으로든 향이 가미된 포도주를 선호했다. 한 때는 장미로, 한 때에는 매스틱[7]으로, 또 어느 때에는 쑥과 기타 여러 식물과 함께 하며 이 모든 것들을 이용해 미각을 가장 즐겁게 했다. 그는 적게 먹었다. 실제로 그는 점심 식사를 마치면, 혹은 점심을 전혀 먹지 않았다면, 또는 저녁 식사를 순식간에 마쳤다. (대신) 그는 여자를 매우 좋아했다. 실제로, 그에게는 22명의 첩이 있었는데, 그들로부터 각각 서너 명의 자녀를 두었다.<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고르디아누스 2세의 삶
4세기 저술된 악명 높은 위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저자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고르디아누스 3세의 긍정적인 부분을 최대한 적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저자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아우구스투스를 빼닮은 모습이었고, 고르디아누스 2세는 젊은 적의 폼페이우스와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식으로 이들의 용모가 타고난 영웅이나 다름없다는 식으로 서술해줬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에도 이들은 고르디아누스 2세의 비밀스럽고, 음탕하고, 사치스러운 사생활을 감추지 못해 이에 대해 적어 놓았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와 마찬가지로, 개인 명의로 된 재산이 엄청났던 로마 내 최상위 부자였다고 하며 상당한 수준의 교양을 갖춘 지식인, 원로원 의원이었다고 한다. 6만 2천 여권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을 소유하기도 했고, 본인의 지적 자부심을 과시하려고 한 이유 탓인지 몰라도 로마시민들을 위한 각종 교양 보급 활동에도 꽤 영향력이 컸던 원로원 의원이었다. 따라서 대외적 이미지는 아주 훌륭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사생활은 매우 사치스럽고 비밀스러우면서도 복잡했다.
고대 기록을 보면 이 사람의 사생활은 모두 이중적이었다. 따라서 디오, 헤로디아누스가 언급한 엘라가발루스 시대의 간신이며 남총 히에로클레스의 옛 주인이자 친구이며 남자애인, 스승으로 히에로클레스 어머니를 정부로 뒀다는 고르디우스가 고르디아누스 2세일 것이라는 추정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진짜일 확률이 농후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왜냐하면 고르디아누스 2세 일가 중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3세와 달리 고르디아누스 2세의 사생활은 여러 증거, 정황상 히에로클레스와 깊은 연관이 있을 확률이 높고,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의 성공은 엘라가발루스 시대에 도드라졌기 때문이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감성적이고 교양 넘치는 이상적인 현실주의자 같지만,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점성술에 빠져 지냈다. 학문적 기질이 대단하고 음악을 좋아했고, 젊은 시절에 창작한 시로 4세기 당시 가문 후손들이 읊으면서 찬사를 보낸 작품이 대단해보여도 자세히 들으면 평범했다. 그래서 그가 갈리에누스급의 문학적 천재 기질도 다분했다고 찬사를 받았다고 해도, 저자들은 평범하다는 느낌만 들었다고 한다. 즉, 가문과 주변에게 문학적, 미학적 천재성이 있다고 해도, 또 젊은 시절 남긴 시구 하나가 괜찮아도, 이 작품을 제외하면 이미지와 달리 대단히 평범했다.
동산, 부동산에 대한 탐욕도 강했는데, 대외적으로는 기부를 잘하고 물욕이 많지 않아 보이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티가 나지 않았다. 식탐이 심하지 않고 소식했으며, 과일과 채소를 매우 좋아해 늘 신선한 과일을 챙겨 먹고 많이 다른 종료의 음식을 모두 먹어치우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매우 덩치가 크고 살집이 잡힌 비만 체형이었다. 따라서 그는 여름에는 찬 음료가 땡긴다면서 차가운 음료, 물을 찾아오라고 요구하고 냉수, 냉음료가 없으면 여름을 지내기 무척 힘들어했다. 이에 관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저자들은 대개의 뚱보들처럼 살이 많아 차가운 음료가 없으면 여름을 지내기 곤란했을 것이라고 적어 놓았다.
그는 미혼 혹은 이름 미상의 아내를 뒀지만 정식적으로 둔 자녀는 없고, 대는 여자형제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낳은 고르디아누스 3세를 입양해 가문을 이었다. 헌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에드워드 기번의 기록처럼 22명의 공식 첩을 두고 있었고[8] 이들에게서 각각 서너명의 아이를 뒀다. 즉, 자녀가 없다며 조카를 양자로 삼았음에도 사생아만 22명의 첩들에게서 각각 서너명 씩을 뒀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의아함을 더했다. 따라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저자들은 역대 로마황제의 장신류, 의류, 망토 숫자까지 꿰고 있는 코르두스가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만은 자녀를 두지 않았다"고 했어도, 덱시푸스는 그가 아내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어도, 고르디아누스 3세는 이 사람의 자녀가 맞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무척 사치스러운 사내였지만, 겉으로는 교양 있어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 속에는 천박함이 있었다. 로마 귀족 상류 사회에서도 사치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향신료 선호와 포도주 미각 놀이 취미부터 각종 고급 유흥문화에 늘 빠져 지냈다. 이는 네로, 비텔리우스, 발비누스, 갈리에누스와 비슷한 모습이었는데, 고르디아누스 2세는 일평생 제국 전역에서 나오는 온갖 향료를 넣고, 이를 여러 개 조합해 섞어 미각을 자극해 그 흥분을 즐겼다. 플레이보이답게 늘 목욕탕, 별장에서 살다시피하면서 본능과 미각을 흥분시키는 것에 최선을 다했고, 매일 여자들을 끼고 즐기며 아름다운 숲처럼 조성한 정원 속에 빠져 지냈다. 입고 있는 의복은 늘 멋졌고 멋쟁이였는데 아름다운 의복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며 감탄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고르디아누스 2세가 흥청망청 돈을 쓰더라도, 그가 여러 첩을 거느리고 "아내와의 사이에는 자녀를 가질 생각이 없다"고 선언해도, 정작 부친 고르디아누스 1세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가 주변에 "어차피 내 아버지께서는 나이가 많아 곧 죽으실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매일 떠들어도, 혼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점성술을 좋아하고 점성술사들 말을 믿는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가 아들이 태어날 당시 점궤 등을 믿고 "이 아이는 앞으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죽을 것"이라고 감쌌기 때문이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이탈리아 로마의 프라에네스티나 가도(via Praenestina)에 위치한 호화로운 최고급 대형 빌라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 빌라에서 사생활을 철저히 숨기며 화려하고 난잡한 삶을 보냈다.
위서 수준의 최악이라는 평을 듣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고르디우스들의 생애'에 따르면, 이 빌라는 고르디아누스 2세의 조카로 고르디아누스 2세 사후 법적 양자로 선포된 고르디아누스 3세가 국고를 출처로 거액을 쏟아 부어 수리하기 전부터, 그 화려함이 대단했다고 한다. 따라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저자들이 살던 4세기 당시 이 빌라는 고르디우스 가문이 멸족한 뒤 주인이 바뀌는 가운데에서 예전보다 못하다고 평가받아도, 로마를 넘어 제국 전역에 걸쳐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들었다.
이 빌라는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가 지었는데, 현관부터 200개의 웅장하고 거대한 기둥이 있었는데, 50개의 카리아 대리석 기둥, 50개의 붉은 반암 기둥, 50개의 프리기아산 대리석 기둥, 50개의 누미디아산 대리석 기둥이 주랑부터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바실리카 형태의 건축 구조물이 각각 100피트 3개 동이 있었으며, 바닥은 팔각형으로 구획되어 있었고, 전체 동은 지상 6층 높이였다. 천장에는 빛이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올 수 있게 설계된 돔 지붕을 가지고 있었다. 더해 이 빌라에는 대형 도서관이 라틴어, 그리스어 서적을 나눠 따로 있었으며, 로마의 공공 목욕탕 중 가장 최신식이었던 카라칼라 욕장 못지 않은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 또 화려하고 이국적인 정원, 내부 수조, 수영장, 지하에 마련된 가문 유골 매장터 등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고르디아누스 3세 시절 전부터 개인 소유의 별장 겸 휴식처임에도 '로마에서 가장 아름답고, 나라 전체에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위서 수준의 최악이라는 평을 듣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고르디우스들의 생애'에 따르면, 이 빌라는 고르디아누스 2세의 조카로 고르디아누스 2세 사후 법적 양자로 선포된 고르디아누스 3세가 국고를 출처로 거액을 쏟아 부어 수리하기 전부터, 그 화려함이 대단했다고 한다. 따라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저자들이 살던 4세기 당시 이 빌라는 고르디우스 가문이 멸족한 뒤 주인이 바뀌는 가운데에서 예전보다 못하다고 평가받아도, 로마를 넘어 제국 전역에 걸쳐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들었다.
이 빌라는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가 지었는데, 현관부터 200개의 웅장하고 거대한 기둥이 있었는데, 50개의 카리아 대리석 기둥, 50개의 붉은 반암 기둥, 50개의 프리기아산 대리석 기둥, 50개의 누미디아산 대리석 기둥이 주랑부터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바실리카 형태의 건축 구조물이 각각 100피트 3개 동이 있었으며, 바닥은 팔각형으로 구획되어 있었고, 전체 동은 지상 6층 높이였다. 천장에는 빛이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올 수 있게 설계된 돔 지붕을 가지고 있었다. 더해 이 빌라에는 대형 도서관이 라틴어, 그리스어 서적을 나눠 따로 있었으며, 로마의 공공 목욕탕 중 가장 최신식이었던 카라칼라 욕장 못지 않은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 또 화려하고 이국적인 정원, 내부 수조, 수영장, 지하에 마련된 가문 유골 매장터 등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고르디아누스 3세 시절 전부터 개인 소유의 별장 겸 휴식처임에도 '로마에서 가장 아름답고, 나라 전체에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1] 외조카이자 양자 고르디아누스 3세 역시 여동생의 아들이 아닌 사생아 중 한명이라는 주장이 후대 로마인 사이에 돌았다. 왜냐하면 사생아가 많고, 고르디아누스 2세의 여색과 사생활이 워낙 화려하고 비밀스러웠기 때문.[2] 오늘날의 스페인[3] 당시 고르디아누스 1세는 79세의 노인이었고, 사실상 이 파견은 정계 은퇴 전 마지막 경력인 상황이었다.[4] 원로원에서 파견하는 속주 총독 임명의 경우, 통상적으로 해당 속주에 가고 싶은 이 지역 출신이 아닌 전직집정관들을 공모해 제비뽑기 혹은 표결 투표로 선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5] 오늘날의 이집트[6] 아프리카 속주 내 주둔 병력은 사실상 경비병에 가까웠다.[7] 그리스의 히오스 섬에서 자라는 옻나무과의 지중해성 작물인 매스틱나무의 수액에서 만들어지는 천연 수지.[8] 공식적으로 본인이 인정한 첩이 22명이었다는 말로, 그 외의 애인이나 비공식 첩도 꽤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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