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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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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 景福宮 勤政門 및 行閣 | |
소재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
수량 | 2동[1] |
지정연도 | 1985년 1월 8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1395년 창건, 1867년 중건 |
근정문[2] |
1395년(태조 4년)에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함께 세웠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탔고 1867년(고종 4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고종 시기에 중건할 때, 위치 등은 개국 초와 비슷하나 상세한 일부 부분은 달라진 듯 하다. 본래 행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부출입구[3]가 문과 가까이 붙었으며, 주변 행각도 단랑이었던 것을 복랑으로 지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정말 근정문 바로 앞까지 들어섰었다.[4] 근정문 앞에 있던 흥례문은 헐려 사라지고, 금천은 메워졌다. 그럼에도 근정문은 무사했고 6.25 전쟁의 화마도 무사히 비껴가 오늘날까지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1985년에 보물 제812호로 지정받았다.
고종 시기에 중건할 때, 위치 등은 개국 초와 비슷하나 상세한 일부 부분은 달라진 듯 하다. 본래 행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부출입구[3]가 문과 가까이 붙었으며, 주변 행각도 단랑이었던 것을 복랑으로 지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정말 근정문 바로 앞까지 들어섰었다.[4] 근정문 앞에 있던 흥례문은 헐려 사라지고, 금천은 메워졌다. 그럼에도 근정문은 무사했고 6.25 전쟁의 화마도 무사히 비껴가 오늘날까지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1985년에 보물 제812호로 지정받았다.
-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목조 건물이다. 가운데 칸은 임금만이 다니는 어칸이라 하여 높이가 좌, 우 칸보다 더 높다. 어칸 남쪽 계단에는 서수 조각과 답도가 놓여있다.
- 지붕은 우진각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다포 양식이다.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했고 그 위에 용두와 취두, 잡상을 올렸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칠했다.
- 근정문 안쪽으로 들어가면, 동쪽에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2층 창방 아래에는 빗살무늬 창문이 있다.
《북궐도형》의 근정전 동행각 내부 구성도 |
《북궐도형》의 근정전 서행각 내부 구성도 |
- 근정문 좌,우행각은 지금처럼 빈 월랑으로 구성되었지만 과거의 근정전 동,서쪽의 행각은 근정문 좌,우행각과는 달리 관청들이 배치되었다. 동행각은 북쪽에서부터 창고인 양미고(粮米庫),과거와 관련된 업무담당인 관광청(觀光廳), 계인문(啓仁門), 융문루(隆文樓), 왕이 사용하던 벼루와 필묵을 담당한 서방색(書房色)이 위치했고 서행각은 행사 때 사용하는 향과 축을 맡은 관청인 향실(香室),왕이 행사 때 하는 축사, 기념사, 명령문 등에 대한 일을 담당한 예문관(藝文館), 협의문(協義門), 융무루(隆武樓), 금군인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을 관리하는 내삼청(內三廳), 종친부와 충훈부에 소속된 하급관리인 충의가 근무하던 사무실인 충의청(忠義廳)이 위치했다.
[1] 근정문 및 근정전 행각.[2]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3] 일화문, 월화문. 일화문은 문신이 드나들고, 월화문은 무신이 드나들었다.[4] 아스팔트 도로를 사이에 두고 중앙청 후문과 마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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