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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티아 - 나무위키

갈라티아

최근 수정 시각:
1. 지명2. 역사
2.1. 켈트족의 유입2.2. 갈라티아 정착2.3. 갈라티아 전쟁2.4. 갈라티아 왕국2.5. 갈라티아 속주

1. 지명[편집]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그리스어 Γαλατία
라틴어 Galatia
튀르키예어 Galatya

아나톨리아 반도 중부의 고대 지명. 현 튀르키예 앙카라 도, 크륵칼레 도, 콘야 도 북부, 요즈가트 도 서부, 에스키셰히르 도 동부에 해당한다. 주요 도시 / 유적으로 앙카라 (안키라), 고르디온, 발르히사르 (페시노스), 뷔윅네페스 (타비온) 등이 있다. 본래 프리기아카파도키아의 경계 정도였으나 기원전 270년대 켈트 (갈라타이) 인들이 대거 정착하여 갈라티아라 불리게 되었다.

갈라트 인들은 한세기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략과 용병 활동으로 위세를 떨쳤으나 셀레우코스 왕조페르가몬 왕국에게 패배한 후 점차 갈라티아에 정착하였고, 기원전 189년 갈라티아 전쟁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하였다. 그후 갈라티아 왕국으로 편성되어 로마의 속국으로 지내다가 기원전 25년 결국 로마 제국의 속주로 병합되었다. 신약 성경의 갈라디아서가 갈라티아 지역민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역사[편집]


튀르키예 갈라티아
갈라티아 튀르키예 1
'죽어가는 갈라티아(갈라타)인 조각상[1]
'갈라티아인의 자살' 조각상[2]

기원전 4세기 중부 유럽의 켈트 인들은 발칸 (동남 유럽)으로 남하하여 달마티아트라키아에 이르렀고, 그들 중 한명이 필리포스 2세를 암살하기도 하였다. 기원전 279년 켈트 인들은 그리스를 공격했는데, 그들 중 일부는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향하여 아시아 방면으로 건너가려 하였다. 이에 비잔티온과 칼케돈 등의 도시들이 필사적으로 저지에 나섰으나 비티니아 왕국 국왕 지포에테스 1세 사후 두 아들 지포에테스 2세니코메데스 1세 간의 내전 중 후자가 2만의 켈트 (갈라트) 인 용병들을 고용하였고, 이로써 레온노리오스와 루타리오스가 이끄는 갈라트 인들이 각각 보스포루스와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유입되었다. 기원전 277년 고용주 니코메데스 1세가 내전에서 승리하자 계약이 해지된 갈라트 인들은 셀레우코스 왕조시리아 전쟁에 치중한 틈을 타 아나톨리아 서부로 향하여 키지코스, 일리온, 디디마, 프리에네, 티아티라, 라오디케아 등을 약탈하였다.
기원전 270년경 안티오코스 1세는 대군을 이끌고 사르데스 평원에서 갈라트 인들을 맞아 격파하였다. (코끼리 전투) 다만 이는 갈라트 인들의 팽창을 저지했을 뿐 그들은 프리기아 북부에 정착하였고, 갈라트 인들의 땅이란 의미인 갈라티아라 불리게 되었다. 갈라트 인들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던 셀레우코스 왕조는 갈라티아의 존재를 인정하고 라오디케아나 티아티라 등 인근 도시들을 요새화하여 더이상의 팽창을 막는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내부를 다진 갈라트 인들은 기원전 250년대 비티니아와 폰투스를 습격하였고, 위험을 인지한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1세는 대군을 모아 기원전 241년 카이쿠스 강 전투에서 갈라트 인들을 대파하여 그들을 기세를 꺾었다. 상단의 두 조각상들은 이때의 승전 후에 제작된 것을 후대에 로마에서 모방한 것이고, 패전 후 갈라트 인들은 갈라티아에 완전히 정착하게 되었다. 기원전 216년과 기원전 190년 비티니아 습격이 마지막 침략전었다.

2.2. 갈라티아 정착[편집]

갈라티아 튀르키예 2
기원전 200년경 아나톨리아 반도 정세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갈라트 인들은 (자체적인 / 혹은 경쟁국의 피해를 원하는 이웃 군주들의 의뢰에 의한) 대외 침공을 줄이고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였다. 갈라트 인들은 안키라를 중심으로 한 중앙의 테크토사게스, 서부의 페시노스를 중심으로 한 톨리스토보기, 동부의 타비온을 중심으로 한 트로크미의 세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세 부족들은 각각 휘하에 4개의 소집단을 거느렸고, 이러한 12개의 소집단들은 각자의 재판관과 장군을 두었으며 이들과 3백명의 의원들은 성지인 드리네메톤[3]에서 의회를 열어 살인죄와 같은 중대사를 논의했다고 한다. 즉, 갈라티아는 일종의 공화정 국가였던 것이다. 또한 부족 내에 소부족을 두고 전체 회의를 여는 것은 한국 삼국시대의 5부 체제 및 귀족회의와 상당히 유사하다. 한편 현지 프리기아 / 카파도키아 인들은 마을과 토지를 유지하는 대가로 갈라트 인들에게 연공을 바쳤고, 갈라트 인들은 주로 요새화된 농장에 거주하였다.

2.3. 갈라티아 전쟁[편집]

튀르키예 갈라티아 2
전쟁 발발 시점의 소아시아 판도

기원전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셀레우코스 조의 패권을 꺾은 로마는 같은해 동맹 비티니아를 습격한 갈라티아를 응징하기로 하였다. 로마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는 마그네시아 전투 시에 셀레우코스 측에 참전한 것을 (표현상의) 명분으로 들며 이례적이게도 원로원의 승인도 없이 수만의 로마군과 2천 8백의 페르가몬 군과 메안데르 강을 따라 내륙으로 진군하였다. 후일 마리우스,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등에 의해 답습되어 공화정 몰락의 원인 중 하나가 되는 만리우스의 독단적인 원정은 그동안 주변 지역의 약탈로 축적된 갈라티아의 부를 빼앗고 개인 명성 얻는 것이 실질적인 목적이었다. 피시디아 지방의 호족들을 보속시키고 세금과 보급을 받아낸 만리우스는 갈라티아의 3대 부족 중 유일하게 페르가몬과 친했던 테크토사게스 부족장 에포소그나토스에게 사절을 보내었고, 후자는 침공을 만류하며 나머지 부족들의 복속을 설득하겠다고 답하였다.

하지만 로마-페르가몬 연합군은 쿠발룸 인근을 지나다 갈라티아 기병대의 습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고서야 겨우 격퇴하였고, 이후 더욱 신중히 진군하였다. (기원전 189년) 원정군은 계속 북상하여 고리디온에 이르렀으나 도시는 버려져 있었고, 인근에서 숙영 도중 에포소그나토스의 사절이 당도하여 다른 부족들에 대한 설득이 실패했으며 그들이 산악 지대에 모여들고 있다고 알려왔다. 만리우스는 우선 서부의 톨리스토보기 부족이 참호를 파고 요새화한 올림포스 산 (울루 다으)로 진군하여 이틀간 정찰하였고, 3일째에 경기병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경무장한 갈라티아 군에게 로마군은 궁병과 투석병 등을 동원해 다량의 발사 무기를 퍼부었고, 혼란에 빠진 그들은 로마측 경무장 보병에게 돌격했다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하였다. 만리우스는 기병대를 동원해 전장에 떨어진 발사 무기를 수습하여 2차 공격 때에 다시 퍼부었고, 그후 중무장 보병을 투입하자 갈라티아 진영은 붕괴되었다.

요새화된 진영에 밀집되어 있던 갈라트 인들은 사방으로 도주했으나 추격에 나선 로마군에게 학살되었다. 수일에 걸친 전투 결과 5만 갈라티아 군 중 1만이 전사하고 3만이 포로가 되었고, 만리우스는 대승과 함께 막대한 전리품을 얻었다. 한편 로마에 복속 의사를 밝혔던 테크토사게스 부족은 사실 비밀리에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에포소그나토스는 만리우스에게 앙카라 인근에서 회담을 제안하여 시간을 끄는 동안 노약자들을 할리스 (크즐으르마크) 강 너머로 피신시키고 결과적으로는 그를 암살하고자 하였다. 의심 없이 소수의 기병대만을 대동하고 회담장으로 향하던 만리우스는 갈라티아 기병대의 습격을 당하여 압도되었으나 식량을 구하러 나섰던 병력이 구원에 나서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각성한 로마군은 향후 이틀간 일대를 탐색하였고, 3일째에 5만에 달하는 갈라티아 군과 마주하였다. 우선 로마군의 경기병대가 출격하여 정찰전이 먼저 벌어졌다. (앙카라 전투)

올림포스 산 전투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하늘을 뒤덮는 발사 무기에 갈라티아 군대가 당황하자 로마군은 총공격하여 적의 중앙을 붕괴시켰고, 한동안 버티던 갈라티아 군의 양익 역시 결국 도주하였다. 로마군은 갈라티아 진영을 약탈, 패잔병을 추격하였고 살아남은 갈라티아 인들은 할리스 강을 넘어 노약자들 및 트로크미 부족과 합류하였다. 얼마 후 그들은 더이상의 항전을 포기하고 사절을 보내 평화 협상에 나섰다. 한편 겨울 추위가 다가오자 에페소스로 철수한 만리우스는 우선 페르가몬과 로도스 간의 소아시아 분할 등 아파메아 평화 조약을 매듭지었다. 갈라티아 사절단이 에페소스에 당도하자 만리우스는 페르가몬 국왕 에우메네스 2세가 로마에서 돌아오면[4] 그의 조건에 따라 협상하라 전한 후 기원전 188년 말엽 로마로 향하여 이듬해 당도하였다. 로마 귀환 후 불소는 독단적인 행위로 평화를 위협했다는 혐의로 비판받았으나 결국 무죄가 선고되어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2.4. 갈라티아 왕국[편집]

갈라티아 튀르키예
기원전 90년경 로마의 동맹국인 갈라티아

전쟁 후 로마의 동맹국이 된 갈라티아는 옛 공화정 체제는 붕괴하고, 세 부족장들이 로마의 인정을 받아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지내다가 기원전 90년경 폰투스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정복되었다. 이어진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서부 톨리스토보기 부족장 데이오타우로스는 폼페이우스를 도와 프리기아 전역에서 활약하였고, 기원전 64년 승리 후 그로부터 국왕 칭호와 함께 폰투스 영토 일부를 할양받았다. 이로써 갈라티아는 단일 국왕이 다스리는 왕국으로 변모하였다.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데이오타우로스는 은인 폼페이우스의 편에 섰으나 파르살루스 전투 후 카이사르 편으로 전향하여 보복을 면하였다. 한편 로마 군단 3개에 해당되는 갈라티아 군은 로마의 보조병으로써 폰투스를 견제하고 있었는데, 내전을 틈타 미트리다테스의 아들 파르나케스 2세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갈라티아-카파도키아 군을 격파하고 아르메니아 서부를 장악하였다.

이집트에 머물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갈라티아에 당도, 데이오타우로스를 사면한 후 젤라 전투에서 폰투스 군을 격파하였다. 다만 얼마후 데이오타우로스는 손자 카스토르에 의해 카이사르의 갈라티아 방문 시에 암살 음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로마에서 기소되었다. 카이사르의 저택에서 열린 공판에서 데이오타우로스는 킬리키아 총독 시절 친분이 있던 키케로가 변호하여 무혐의를 받았다. 이어진 2차 내전에서 데이오타우로스는 카시우스와 브루투스 파벌을 지지했으나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 직전 삼두정 측으로 전향, 안토니우스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았다. 기원전 40년 데이오타우로스는 고령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손자 카스토르가 계승했으나 기원전 37년 리카오니아를 통치하던 외손자 아민타스[5]가 즉위하였다. 본래 안토니우스를 따르던 그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직전 옥타비아누스 편으로 전향하여 왕위를 지켰다. 대대로 줄타기 장인

이후 아민타스는 인근 산지인 호마나다 (호이노나)를 원정하여 그 군주를 죽였으나 복수를 결심한 후자의 과부가 놓은 함정에 걸려 사망하였다. (기원전 25년) 그후 아우구스투스는 갈라티아에 허수아비 왕을 세우는 대신 로마 속주로 병합하였다. 비록 왕위는 잃었지만 데이오타우로스 가문은 향후 수세기간 갈라티아의 유력 귀족으로 남았다. 아민타스의 아들 아르테미도로스는 동부 트로크미 부족장을 지내었고, 누이인 테크토사게스 부족장과 결혼하였다. 그들의 증손자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바수스는 트라야누스 대에 중용되어 105년 집정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한편 데이오타우로스가 로마 군제로 편성한 1만 4천의 갈라티아 군단은 니코폴리스 전투로 1/3으로 줄어든 후에도 로마의 동맹군으로 활약하다가 병합 후 정식으로 로마 제국의 제12 데이오타리아나 군단으로 편성되어 니코폴리스를 거쳐 알렉산드리아에 배치되어 2세기 유대 반란 시까지 유지되었다.

2.5. 갈라티아 속주[편집]

갈라티아 로마 튀르키예
로마 제국기 갈라티아 속주

속주 편입 후 갈라티아 왕공 필라메네스는 복종의 증표로써 앙카라의 옛 프리기아 신전을 아우구스투스를 모시는 신전으로 개조하였고, 이후로도 갈라티아 귀족들은 로마 지배에 순응하며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였다. 기원전후 무렵 기독교가 확산되며 갈라티아에도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바울이 전도 여행 중 지나가며 남긴 편지가 갈라디아서로 남아있다. 한편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던 갈라티아는 2세기 무렵에는 다른 아나톨리아 지역들처럼 헬라화되었고, 갈라티아어[6]도 5세기를 기점으로 사라지고 그리스어가 보편화되었다. 4세기 말엽 폰투스 교구에 속한 갈라티아는 남북으로 양분되어 각각 갈라티아 프리마와 갈라티아 세쿤다로 나뉘었고, 각각 앙카라와 페시노스를 주도로 삼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인 536-48년 둘은 다시 합쳐져 갈라티아 주로 환원되었으나 7세기 테마 제도가 실시되며 아나톨리콘 테마로 개편되며 갈라티아란 지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 기원전 3세기 페르가몬 왕국아탈로스 1세가 갈라티아인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의뢰한 것의 로마 시대 복제품이다. 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이로써 당시 갈라티아(켈트)인 전사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로마 카피톨리니 미술관 소장.[2] 로마 테르메의 국립 로마 박물관 소장[3] 앙카라 서남쪽에 있었다 함[4] 갈라티아 전쟁 전부터 로마에 가있어서 동생 아탈로스 2세가 페르가몬 군 이끌고 참전함[5] 데이오타우로스가 페르가몬 공주 베레니케와 낳은 딸 아도보기오나가 브로기타우로스 (기원전 63년 공동 군주 취임, 기원전 50년 사망) 사이에서 낳은 아들[6] 성 제로메에 의하면 앙카라의 언어는 갈리아의 국경도시 트리어의 언어와 비슷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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