帝 임금 제 | |||||||
부수 및 나머지 획수 | 巾, 6획 | 총 획수 | 9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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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중국어 | d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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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형자는 확실하나 어떤 모습을 본뜬 건지 아리송한데 꽃받침(蒂) 혹은 제사 목적으로 쌓아둔 장작더미(禘)를 가리키던 글자라는 추측이 있으나 이도 불확실하다. 다만 본래 하느님을 뜻하는 글씨라서 한자의 모습도 이와 유관할 거란 추측이 있다.
이 글씨의 원래 뜻은 황제가 아니라 하느님이란 뜻이다. 상나라는 자신들의 임금이야말로 천하를 다스리는 이라며 왕(王)이라 하였으며 반대로 천상을 다스리는 이를[1] 제(帝)라고 썼다.
로랑 사가르는 1999년에 제(帝)의 소리가 상고한어에서 適과 嫡과 뿌리가 같으며 다스린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 추측하였지만 뒷날 帝의 옛 소리를 [*tˤeks]로 추측하면서 원시한장어족으로 신을 [*teɣ]라고 불렀을 거라 추측하면서 뵌교에서 하늘의 신을 뜻하는 티베트어 ཐེ[tʰe]를 비롯한 한장어족의 여러 말에서 신을 뜻하는 낱말과 뿌리가 같지 않은가 추측하였다.
상나라의 신화가 거의 안 전해지지만 갑골문에서 상나라에서 제가 어떤 신이었는지 유추가 가능하다.
무자일의 무꾸리. 각이 묻다. : "제가 사월이 되면 비의 신에게[2] (비를 내리라고) 시킬까요?" 하나·둘·셋·넷·다섯(戊子卜. 㱿貞: "帝及四月令雨?" 一·二·三·四·五)
"묻나니 이제 그 사월이 되어도 비의 신에게 안 시킬까요?" 하나·둘·셋·넷("貞 帝弗其及四月令雨?" 一·二·三·四)
왕이 무꾸리를 해서 말씀하시기를 "정일에 비가 내리거나 아니면 신일이다."(王占 曰 "丁雨, 不叀辛.")
열흘 뒤 정유일에 참으로 비가 내리다.(旬丁酉 允雨)『갑골문 해독을 겸한 갑골문 자전 최신증보판』, 양동숙(梁東淑), 2019, 이화문화출판사, pp. 734~735
상나라 사람들은 비의 신이 있다고 믿었지만 비의 신이 마음대로 비를 내리는 게 아니라 제가 비의 신에게 비를 내리라고 시켜야만 비가 내린다고 믿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유기에서 용왕이 비를 내릴 수 있으나 옥황상제의 조칙대로만 내려야 한다는 설정은 상나라의 신화적 관념이 이어진 게 아닌가 싶다.
"묻나니 제가 올 13월에[3] 이르러 우레의 신에게[4] (우레를 내리라고) 시킬까요?(貞: "帝其及今十三月令雷?")
"상제가 오는 1월에 우레의 신에게 시킬까요?"("帝其于生一月令雷?")Ibid., pp. 722~723
우레도 우레의 신이 있지만 스스로 내리는 게 아니라 제가 시킨다고 믿었던 듯 하다.
기유일에 무꾸리. 긍이 묻다. "제가 우리에게 가뭄을 안 내릴까요?" 하나·둘·셋·넷·다섯·여섯(己酉卜. 亘貞: "帝不我𦰩?" 一·二·三·四·五·六)
"묻나니 제가 우리에게 가뭄을 내릴까요?"("貞 帝其𦰩我?")
"냉큼 하라."("不玄冥 小告")Ibid., pp. 750~751
여기서 상나라 사람들이 가뭄을 제의 고유권한으로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묻습니다. 제가 명령할까요?"("貞 帝令?")Ibid., pp. 932~933
갑골문이 산일(散逸)해서 다 알기 어렵지만 제가 여러 존재를 부렸던 신을 여겨진 걸 짐작할 수 있다.
"왕께서 제의 다섯 신하에게 유와 세를 지내면 비가 없어질까요?"("王 侑·歲于帝五臣 正 維亡雨?")
"제의 다섯 신하에게 유를 지내면 큰 비가 있을까요?"("侑于帝五臣 有大雨?")Ibid., pp. 934~935
여기서 유와 세는 제사 이름이다. 제의 다섯 신하란 비, 바람, 구름, 번개, 우레로 제가 이 다섯 가지를 주관하는 신들을 거느리는 게 상나라의 신화적 관념이었을 거다.
다섯 북으로 제사를 지내면 상제가 허락해서 왕이 … 도움이 있을까요?"("叀五鼓 上帝若 王…有祐?")Ibid., pp. 934~935
상나라는 제가 왕에게 도움을 준다고 믿었다.
기묘일의 무꾸리. 쟁이 묻다.: "왕이 고을을 지으면 제가 허락할까요?" 하나·둘·셋·넷·다섯(己卯卜. 爭貞: "王乍邑 帝諾?" 一·二·三·四·五)Ibid., pp. 782~783
상나라에서는 고을을 짓는 것도 제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믿었다.
병진일의 무꾸리. 각이 묻다.: "제가 이 고을을 늘 있게 할까요?" 넷(丙辰卜. 㱿貞: "帝維其終玆邑?" 四)
"묻나니 제가 이 고을이 늘 있게 안 할까요?" 넷("貞 帝弗終玆邑?" 四)
"묻나니 제가 이 고을이 늘 있게 할까요?" 넷("貞 帝維其終玆邑?" 四)
"묻나니 제가 이 고을이 늘 있게 안 할까요?" 넷("貞 帝弗終玆邑?" 四)Ibid., pp. 968~969
나라가 고을만하던 시절에 이 고을은 상나라다. 그러니까 제가 상나라를 길이 지켜줄지 버릴지 묻는 거다. 이로써 상나라 사람은 제를 호국신으로 생각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대한제국 애국가에서 황제 또는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게 상제로 나오는 게 이때의 관념이 이어진 걸 수도 있다.
초기의 자연신들은 여러 신이 모두 고립되어 존재하며, 제신을 지배하는 최고 권력의 신이 없었는데, 상대에 이처럼 최고 권력을 지닌 상제가 등장한 것은 상대 중국인들의 관념 속에 상왕과 같이 모든 자연신들을 통제하는 통일신의 존재가 필오했기 때문이다. (…) 조경(祖庚)·조갑(祖甲) 시기에는 선왕을 '제'의 지위로 끌어올림으로써 상왕이 '상제'와 동격이 되었다.「갑골복사를 통해 본 상대의 숭배대상 고찰; 자연신의 최고 지위를 갖는 상제」, 윤창준, p. 282
논문에 따르면 상나라의 임금만이 왕(王)이고 왕이 천하를 지배해야 한다는 관념이 신도 모든 신을 지배하는 신이 있다고 믿었으면 그 신이 제(帝)고 뒷날 상나라는 왕을 제와 동격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상술할 조상신 운운을 생각하면 왕실의 조상이 제가 되었다기보다 왕실이 제의 후손을 일컬은 것으로 보인다. 상나라도 천손강림이 있었으나 주무왕이 제신을 없애면서 천명으로 대체된 걸로 추측된다.
다만 주나라는 상나라를 정복했으면서도 제(帝)를 안 버렸다. 비록 주나라의 국성은 시조가 농사를 맡은 후직이라 하여 천손강림 신화를 내세우지 못 했으나 그럼에도 제를 숭배했다. 그 증거로 주려왕이 여러 나라를 정복한 걸 자랑하는 윤음(綸音)을 새긴 종주종명문(宗周鐘銘文)이 위의 이미지의 빨간 네모 칸에서 하느님을 그냥 제(帝)도 아니고 황상제(皇上帝)라고 상나라에서도 안 쓰던 거창한 표현을 썼다.[5] 『상서』, 「여형呂刑」 에서 상제가 나오다가 갑자기 황제로 바뀌는데 황상제라는 낱말이 각각 한 글씨가 빠진 게 아닌가 싶다.
또한 중국신화에서 제(帝)는 원귀가 복수하는 걸 허락할 권한이 있다고 여긴 듯 하다.
또한 중국신화에서 제(帝)는 원귀가 복수하는 걸 허락할 권한이 있다고 여긴 듯 하다.
진후가 큰 원귀를 꿈꾸니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땅에 닿고 가슴을 치고 뛰며 말하기를 "내 자손을 죽이니 불의하다. 나는 제에게 청원을 얻었다!"(晉侯 夢 大厲 被髮及地 搏膺而踊 曰 "殺余孫 不義. 余 得請於帝矣!")『춘추좌씨전』
병입고황의 고사로 진경공이 조씨고아에서처럼 거의 조씨의 씨를 말리다 조씨의 조상신이 악령이 되어서[6] 진경공의 꿈에 나타나 진경공을 저주했는데 여기서 조씨의 조상신은 스스로 제(帝)에게 청(請)을 얻었다고 하니 복수를 하는 걸 허용해달라는 청원이다. 이런 고사가 또 있다.
가을에 호돌이 아랫나라를 지나다가 태자를 만나다. 태자로 하여금 (자신이 모는 수레에) 오르게 해서 (수레를) 몰자 그가 알리며 말하기를 "이오가 무례해서 내가 제에게 청을 얻었도다. 바야흐로 진나라를 진나라에 넘겨서 진나라가 바야흐로 나를 제사지내리라." (호돌이) 답하여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 '귀신은 겨레가 아니면 아니 흠향하고 백성은 겨레가 아니면 제사를 안 지낸답니다.' 님의 제사가 없어지지 않을까요? 또 백성은 무슨 잘못인가요? 형벌(의 공정성)을 잃고 제사도 없어질테니 님은 (제에게 청한 걸 다시) 검토하소서." 태자가 말하기를 "알았다. 내가 바야흐로 다시 청한다. 이레 뒤에 새 재의 하늬에 바아흐로 무당이 있을텐데 나를 보리라."라고 하니 약속하자 이윽고 아니 보였다. 마침내 때가 와서 가니 (태자가) 알려서 말하기를 "제에게 내가 있는 죄를 벌하기를 허락받았도다. (진혜공이 )한에서 지리라."라고 하였다.(秋 "狐突" 適下國 遇大子. 大子使登 僕 而 告之 曰 "夷吾無禮 余得請於帝矣. 將 以晉畀秦 秦將祀余." 對 曰 "臣 聞之 '神不歆非類 民不祀非族.' 君祀無乃殄乎? 且 民何罪? 失刑·乏祀 君其圖之!" 君 曰 "諾. 吾將復請. 七日 新城 西偏 將 有巫者 而 見我焉." 許之 遂不見. 及期而往 告之 曰 "帝許我罰有罪矣. 敝於韓.")
태자 신생이 모함을 받은 진헌공에게 억울하게 자살을 강요받고 원귀가 되어서 진혜공에게 앙심을 품고 옛날에 자신의 수레를 몰던 마부였던 호돌에게 나타나서 제(帝)에게 조국이 다른 나라에게 병탄되도록 해달라고 청원했다고 밝히자 호돌이 말려서 제에게 진혜공이 전쟁에서 지는 걸로 수위를 낮춰달라고 제에게 다시 요청했다는 고사다. 이런 고사를 살피면 고대 중국에서는 원귀가 제에게 허락을 받아야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니 제는 복수를 허가할 권한을 가졌다고 여겼을 것이며 상나라에서 가뭄은 제가 직접 내릴 권한이 있다고 믿은 것과 같이 헤아리면 고대 중국에서 제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옥황상제와 다르게 무시무시한 신이었나 보다. 제에게 복수를 청원한다는 관념은 관로의 고사에서도 이어진다.
- 臣(신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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