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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工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학 ()

산업
개념
천연자원을 인간에 유용하게 변환시키기 위하여 자연과학의 원리와 방법을 응용하는 공업기술을 다루는 학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천연자원을 인간에 유용하게 변환시키기 위하여 자연과학의 원리와 방법을 응용하는 공업기술을 다루는 학문.
개설

토목·건축·기계·금속·전기·전자·화학·컴퓨터공학 등이 대표적인 분야이다. 공학은 18세기 이후 서양에서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프로그램으로 출발하였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개항(1876) 이후 공업기술의 도입과 함께 부분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공학을 ‘공업기술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고대의 공업기술 특히 무기제조기술을 고대의 공학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학의 어원과 역사

공학(엔지니어링:engineering)의 어원인 ‘엔진(engine)’ 또는 ‘영리한(ingenious)’이란 말은 ‘발명·고안·창안하다’는 뜻의 라틴어 ‘ingenerare’에서 유래하였다. 또한 ‘엔지니어(engineer)’는 고대 서양에서 기계활(쇠뇌:弩砲), 배다리(浮橋), 성벽파괴무기 등 전쟁에 필요한 교묘한 무기를 발명하고 다루거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튼튼하게 방어시설(요새)을 건설하는 기술자를 뜻하였다.

근대 이후에는 공학이 도로·교량·건축·축성 등 오늘날의 토목·건축기술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민간기술자(civil engineer)들의 활동이나 이들을 양성하는 교육프로그램과 관련되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공학학교(engineering school)인 ‘국립교량철도학교(1747)’가 프랑스에서 설립되었으며, 이 학교는 프랑스혁명 중 이공과학교(cole polytechnique) (1794)로 바뀌었다. 이 곳에서는 이학(理學)과 그것을 종합적으로 응용한 공학(工學)을 가르쳤다.

영국에서는 글래스고(Glasgow)대학(1757)이 야간에 기계공에게 물리학을 강의하였는데, 이것이 기계학교의 시초였으며, 1840년에는 공학강좌를 처음 개설하였다. 독일에서는 베를린실업학교(1821)를 시작으로 칼스루에·뮨헨·아헨·베를린공과대학(Technisch Hochschule)이 설립되면서 공학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은 명치유신 후 정부 주도로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는데, 공부성(工部省, 1870) 밑에 공학료(工學寮, 1871) 부속으로 공학교(工學校, 1873)를 설치하고 토목·기계·전신·조가(造家)·화학 및 용주(熔鑄)·광산의 6개 학과를 두었다. 공학교가 공부대학교(1877)를 거쳐 동경제국대학공과대학(1886)으로 개칭되었다. 따라서 공학은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한 공학교육으로부터 성립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대학수준의 교육기관에서 근대적 의미의 공학을 전문적으로 연구·교육시킨 시점은 경성제국대학(1924) 내에 이공학부(1941)가 설치된 이후이다.

전통시대의 무기제조기술과 공학서적

기술자(엔지니어)의 기원을 무기제조기술자와 관련시킨다면, 558년(진흥왕 19)에 돌을 먼 곳으로 쏘아던지는 기계활[弩砲]을 만들어 나라에 바쳤다는 신득(身得)이 우리 나라 역사상 기록에 나타나 있는 최초의 기술자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군사편제 속에 기계활부대[弩幢]·성을 오르는 부대[雲梯幢]·성을 공격하는 부대[衝幢]·돌을 던지는 부대[石投幢]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특수한 전쟁무기를 제작했던 기술자 집단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669년(문무왕 9) 당의 고종이 신라의 기계활기술자[弩師] 구진천(仇珍川)을 불러들여 1,000보나 멀리 나가는 기계활을 제작하도록 강요하였으나, 구진천은 끝내 만드는 비법을 밝히지 않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이로 보아 구진천도 당시의 뛰어난 기술자였음에 틀림없다.

이 밖에도 고려 때에는 1040년(정종 6) 수질구궁노(繡質九弓弩)를 만들어 바친 박원작(朴元綽), 염초를 만들었고 화통도감을 중심으로 직사포인 대장군포와 곡사포인 육화석포 등 여러 가지 화약무기를 만들어 배에 설치하여 왜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최무선(崔茂宣:?∼1395) 등도 이름난 기술자였다. 1448년(세종 30)에 간행된 ≪총통등록 銃筒騰錄≫은 여러 가지 화포와 화약을 만들고 다루는 기술을 담은 책으로 일종의 공학서적이다.

1592년 8월 왜군에 빼앗긴 경주성을 되찾는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한 비격진천뢰를 만든 화포공 이장손(李長孫)도 기록에 남은 무기제조기술자였다. 그리고 성근(成根)이 고안한 흑색화약제조법을 공정별로 자세히 소개한 ≪신전자취염초방 新傳煮取焰硝方≫(1635)과 이 책의 부족한 점을 김지남(金指南)이 개선하여 출간한 ≪신전자초방 新傳煮硝方≫(1698) 등도 전통시대의 훌륭한 공학서적이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공학자 정약용(丁若鏞)은 정조가 주었다는 ≪기기도설 奇器圖說≫(1627)을 참고하여 거중기(擧重器)를 만들어 1789년(정조 13) 배다리를 놓을 때와 1794년부터 1796년까지 수원성을 쌓을 때 이용하였다고 한다. 당시 수원성(華城)을 쌓고 난 뒤 축성공사와 관련된 일지·업무·담당자·계획도·재료·기구·문서·공사규칙 등을 상세히 밝힌 근대적 의미의 공학서적이 바로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1801)이다.

근대공학의 도입

서양의 공학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권한 1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모방되기 시작하였다. 병인양요(1866)로 프랑스 군대의 화포와 전함이 우수함을 경험한 흥선대원군은 신관호(申觀浩)·김기두(金箕斗)·강윤(姜潤) 등으로 하여금 ≪해국도지 海國圖志≫(1842)를 참고하거나 자체의 노력으로 수뢰포(水雷砲)와 목탄증기선(鐵甲艦) 등 서양무기를 모방제작하여 시험토록 하였으나 서양의 공학을 직접 도입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당시 조선은 서양식 근대무기를 제조할 만큼의 공학에 관한 기초 지식으로서 제강·주조·기계가공·서양식 화약제조 등에 대한 기술을 축적하고 있지 못하였다. 서양기술의 수용노력은 강화조약(1876)을 체결한 뒤부터 본격화되었다.

개항 후 1881년(고종 18) 조선은 영선사(학도 20명, 공장 18명)를 청나라에 파견하여 서양의 근대식 무기제조기술을 배우도록 하였다. 중인 또는 그 이하의 계층에서 뽑힌 것으로 보이는 이들 기술유학생들은 1882년 가을까지 약 반정도인 18명이 남아서 서양의 근대기술을 배웠다.

이들은 톈진(天津)의 기기국에 있는 기계·화약·화학·전기·기기·화기 등의 공장에서 선반·평삭반·드릴링기계·연마기 등 동력기계의 조작법, 황산·질산·염산 등의 제조법, 총알·뇌관 등의 무기제조법, 목형·주물제작법 등을 배웠다.

그리고 이들은 귀국하면서 수십 종의 수동식 기계기구(총포수리기구·화학실험기구·화학약품·기중기·전기기구 등)와 53종에 달하는 과학기술 서적을 가지고 왔다. 당시 도입된 서적들은 공작기계·증기기관·채광·야금·화약·측량·전기 등 서양의 근대공학과 관련이 있었다.

겨우 반년 남짓한 기술훈련에 불과하였으나, 이들 중 조한근(趙漢根)·상운(尙澐) 등은 전보국·기기국의 기술자로 각각 참여하였다. 영선사행과 달리 양반가문의 인사들로 구성된 이른바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62명은 일본의 근대화 실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4개월 동안 일본의 산업시설, 특히 포병공장·조선소·조지소·제사소·조폐국·인쇄국·방적공장·광산 등 근대의 공학과 관련된 공장과 각종 기기와 장치들을 견학·시찰하였다.

영선사 일행이 서양의 공학을 본격적으로 배우지도 못하고 돌아왔음에 비하여, 신사유람단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은 서양 기술의 실상을 견학함에 성공하였고, 개화정책에 나름대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인 뒤 기계식의 생산설비를 갖춘 공장인 기기창과 조폐창을 건립하게 되었다.

1883년(고종 20)에 착공하여 1887년에 준공한 기기창에서는 1885년에 탄환·탄피제조기계를, 1889년에는 12마력의 증기기관 1대, 소총제조기계 3대, 드릴링기계 1대를 도입·설치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무기제조공장을 세워놓고도 대량의 무기를 일본에서 수입하였고, 공장을 운영할 재정도 궁핍하여 무기를 생산하려는 처음의 목표를 달성치 못하고, 1894년 갑오경장의 와중에서 문을 닫고 말았다.

1880년대 이후에는 기기국 외에도 박문·전환·직조·제지·광무·권연·양조 등의 여러 부서와 공장을 설치하였으며, 민간에서도 유기·직조·사기·철물 공장들을 세워 서양기술이 점차 수용되어 갔다. 그리고 서양의 기술을 본받아 나름대로의 발명품을 제작한 기술자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1899년 이전에는 이여고(李汝古)·이태진(李泰鎭)·이인기(李仁基)·이태호(李泰浩) 등이 자직기(自織機)를 만들었으며, 유긍환(兪肯煥)이 자도련기(自搗練機), 한욱(韓昱)이 전보기(電報機), 고영일(高永鎰)이 양지기(量地機), 민대식(閔大植)이 유성기(留聲機)와 사진판(寫眞板)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의 기술수준은 매우 낮아서 공업적 생산기술의 과학적 원리·법칙으로서의 공학을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근대공학교육의 실시

대한제국정부는 ○상업과 공업에 필요한 실학○을 가르치는 상공학교(1899)를 설치하여 4년(예과 1년, 본과 3년)과정으로 공업에 관한 전문교육을 실시토록 하였다. 이 상공학교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실제로 운영되지 않다가 농상공학교(1904)로 개편되었다. 농상공학교의 수업연한은 4년으로 같았고, 개편 첫해부터 학생을 모집하여 운영하다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폐교(1906)되었다.

농상공학교의 농업과는 수원농림학교(1906)로, 상과는 선린상업학교(1906)로 전환되었지만, 공업과는 수업연한이 2년이나 줄고 정식 학교도 아닌 기능교육기관인 공업전습소(1907)로 전락하였다. 1907년에 공업전습소관제 및 관립공업전습소규칙을 제정하여 ‘공업에 관한 기술을 전습’시킬 목적으로 2년과정으로 염직·도기(陶器)·금공·목공·응용화학·토목(1910년 폐지)의 6개 학과를 설치하고, 제1회 전습생 74명을 받아들여 수업을 개시하였다.

공업전습소에는 1908년(순종 2) 1년 과정의 전공과를 신설하고 1910년에는 실과를 두었다. 일제는 일본 본토로 수탈해갈 원료를 가공·개량하기 위하여 전국에 걸쳐서 지방공업전습소를 설치하였는데, 경성의 관립공업전습소는 이들 지방공업전습소에 파견할 기술지도요원을 양성하는데 주요 목적이 있었다.

상공학교와 농상공학교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기술을 배웠는지를 알 수 없으나 공업전습소는 직물업·제지업·요업 등 농촌의 재래수공업과 관련된 수공기술을 익힌 공장직공이나 초급기술자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일제강점 후 일제는 관립 공업전습소를 조선총독부 산하 중앙시험소 부속의 공업전습소(1912)로 개편하였는데, 중앙시험소는 조선에서 수탈해갈 공업원료와 지하자원을 조사·연구하는 기관에 불과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공업전습소에 3년 과정의 특별과(1912)를 신설하였다. 고등보통교육을 받고 공업에 종사하려는 자에게 필요한 학술과 기예를 가르치는 특별과에는 염직과·요업과·응용화학과가 있었고 전공과목으로는 응용화학·기계공학 일반·전기공학 일반·광물학·야금학·분석화학 등을 가르쳤다.

이때야 비로소 공학과목의 명칭이 정식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공업전습소의 특별과를 경성공업전문학교(1916)로 승격, 개편하고 공업전습소의 본과를 경성공업전문학교에 부속시켰다. 공업에 관한 전문교육을 실시하여 공업의 진보 발전에 필요한 기술자 또는 경영자를 양성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경성공업전문학교는 조선의 자원 및 산업개발에 필요한 전문교육, 다시 말하면 식민지경영에 요구되는 전문기술인력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민족의 주체적 노력으로 공업 분야에 관한 전문교육을 실시하려 했던 상공학교가 일제의 식민지경영에 필요한 기술자를 양성하는 경성공업전문학교로 개편된 것이다.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설립으로 조선의 공업기술교육은 공장의 직공이나 도제를 양성하던 기능교육에서 벗어나, 학리를 추구하는 전문학으로서의 공업기술, 즉 공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1916년 우리 나라 사람과 일본인을 합하여 40명의 신입생으로 출발한 경성공업전문학교에는 수업연한 3년의 염직·응용화학·요업·토목·건축과 등 5개 학과가 있었다. 공업 분야의 고등교육기관에서 필수적인 기계과와 전기과가 빠져 있었으며, 입학정원 150명을 채우지 못하고 40여 명 정도를 입학시켰으며, 우리 나라 사람의 입학은 전체 입학생의 3분의 1로 제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조선교육령(1922)을 개정하면서 경성공업전문학교를 경성고등공업학교(1922)로 개편하고 부속공업전습소는 경성공업학교로 독립시켰다. 1923년부터 졸업생에게 ‘경성고등공업학교 공학사’의 칭호를 주었다. 당시의 공학사 학위는 일본은 물론, 우리 나라에서조차 인정을 받지 못하고 유명무실하였다.

일제는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을 계기로 대륙의 전진기지로서 조선을 공업화시키기 위하여 우리 나라 사람에게 초급의 기술교육을 시키던 정책을 바꾸어 중급 및 고급기술자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경성고등공업학교에 기계공학과와 전기공학과를 신설(1938)하고 토목학과와 건축학과를 각각 토목공학과와 건축공학과로 개편하였다. 경성고등공업학교는 다시 경성공업전문학교(1944)로 개칭 되었다.

1916년 설립 이래 배출한 졸업생은 총 1,699명 가운데 우리 나라 졸업생은 412명으로 전체의 4분의 1 정도였다.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졸업생들은 소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 전문기술자로 인정을 받았고, 총독부 등 중앙관청의 기술관리, 대기업체의 기술자, 중등학교 교원, 지방공업전습소 기술지도요원 등으로 취업하였다.

그러나 경성고등공업학교는 우리 나라의 공업발전을 위하여 기술자를 양성하거나 공업기술을 개발하는 기관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유지와 확장에 필요한 전문기술인력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경성제국대학(1924) 이공학부(1941)가 설치되기 전까지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고등공업교육기관이었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에는 물리학과·화학과·토목공학과·기계공학과·전기공학과·응용화학과·광산야금학과 등 2개의 이학과와 5개의 공학과가 설치되었다.

이공학부의 설립 이후 1943부터 1945년 9월까지 3회에 걸쳐 배출된 공학계 우리 나라 졸업생은 토목공학 1명, 기계공학 9명, 전기공학 11명, 응용화학 7명, 광산야금학 3명 등 31명이었고, 광복 당시의 재학생은 3학년 25명, 2학년 19명, 1학년 17명, 총 61명이었다. 우리 나라 사람은 전체의 30% 미만이었다. 이들은 우리 나라 공학 및 산업의 발전에 귀중한 기술인력이 되었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이외에도 공업에 관한 전문교육을 실시했던 경성공업·경성광업·대동공업(광복 후 김일성대학으로 개편) 등의 전문학교가 있었는데, 광복이 되기까지 약 700명의 조선인 기술인력을 배출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35년간 우리 나라 관공립고등교육기관에서 배출된 한국인 이공계 고급인력은 경성제대 77명, 경성공전 452명, 경성광업전문학교 49명 등 모두 6백 명을 넘지 못했다.

광복이후의 공학교육

1945년 광복 후 공학의 연구와 교육은 주로 공과대학, 정부출연 연구기관 그리고 산업체의 연구기관에서 이루어졌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1946)은 경성대학 이공학부 공학계, 경성공업전문학교 및 경성광산전문학교를 통합시켜 발족하였다. 당시 건축공학·기계공학·섬유공학·야금학(1948년 금속공학과로 개칭)·전기공학(1947년 전기통신학과 분리)·항공조선학·채광학(1950년 광산공학과로 개칭)·토목공학과 및 화학공학과 등 9개 학과를 설치하였다.

한국전쟁(1950) 전까지 228명의 공학사를 배출했으며 1949년 공학석사 3명(화학공학과 2명, 섬유공학과 1명)도 탄생하였다. 종전 후 미국의 원조로 미네소타 프로젝트(1954)가 수립되어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고 교육용 실험기기를 도입하였으며 일부의 교수들은 해외에서 연수를 받았다. 광복 직후 사립의 공과대학으로는 한양공과대학(1947)과 연희대학교 이공대학(1945)이 있었다.

휴전(1953)과 더불어 각도에 국립대학교와 사립대학교가 생기면서 각 대학(교)에 공과대학이 설치되었다. 군사혁명(1961) 이후 대학학생정원령(1965)·대입예비고사제(1969)·교수임명임기제(1975) 등으로 대학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고, 공업전문학교(전문대학으로 개편)가 창설되었다. 1970년대에는 실험대학을 통하여 대학의 개혁이 이루어졌고, 중화학공업의 추진을 위한 고급기술인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일부의 공과대학을 특성화(1974)하기도 하였다.

특히, 4년제 대학의 정원은 중화학공업의 육성과 수출확대에 필요한 전략분야로서 이공계를 중심으로 증원되었다. 1980년대에는 졸업정원제(1981)의 실시로 대학의 정원이 다시금 전격적인 확대정책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졸업정원제는 재학생의 중도탈락과 졸업정원의 100∼130% 이내 완전 자율화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90년대에는 교육여건과 정원조정을 연계시키고 산업의 경쟁력 확보에 중점을 두어 인문·사회과학계의 증원은 가능한 억제하고 첨단산업 부문을 중심으로 이공계 정원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수립되었다. 1991년 공학계 대학졸업자의 수는 3만 000천 명이었으나 1996년에는 3만9000 명으로 연평균 3.3%였으나, 같은 기간에 이학계 대졸자의 연평균 증가율은 8.2%로 공학계보다 2.5배였다.

1997년 현재 우리 나라의 이학계 대 공학계 학생수의 비율은 1:2 정도인데 일본의 1:6까지는 도달하지 못하더라고 이학계 대 공학계 학생수의 비율이 적어도 1:4는 되도록 이공학 분야의 대학정원을 조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1993년도의 비교이지만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학생 대 교수의 비율은 35:1로서 동경대학의 13:1, 미국의 MIT대학의 10:1, 대만대학의 15:1보다 2∼3배 이상 높았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공과대학의 교육여건이 선진국에 비하여 열악함을 알 수 있다.

광복이후의 공학연구

광복 직후 국내에는 광물분석소(1894)에 기원을 둔 중앙시험소(1912)를 개편한 중앙공업연구소(1946), 그리고 육군조병창의 후신인 국방과학연구소(1948)가 있었으나, 본격적인 공학연구는 원자력연구소(1959),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1966), 그리고 과학기술처(1967)의 설립부터 시작되었다.

원자력연구소는 1962년 국내 최초로 100kW급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TRIGA MARK) II를 가동시킴으로써 종합적으로 과학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원자력연구를 위해 해외로 파견된 과학기술자들은 이후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당시 한미정상회담(1965)에서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응용과학연구소의 설립을 원조하려고 노력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설립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미국이 대규모적이고 체계적으로 저개발국에 원조한 최초의 과학기술연구소였다. 우리 나라의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성공적인 사례로서 인식되고 있다. 국가적 필요에 부합하는 과학기술을 연구하였고, 기업체에 대한 연구개발과 기술정보를 제공하였으며, 대학과 다른 연구기관의 활성화에도 기여하였다.

한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는 기초과학의 연구를 배제하였으며, 농업·광업·경공업 및 토착산업과 관련된 연구를 도외시하는 결과를 빚기도 하였다. 1960년대의 과학기술정책은 원자력원(1959)이 담당하였으나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 필요한 인력의 개발과 기술협력·기술도입 등 과학기술행정을 체계화시키기 위하여 정부는 과학기술처(1967)를 발족시켰다.

과학기술처는 이공계 대학원인 한국과학원(1971)을 법인체로 발족시키고, 1973년부터 석박사과정의 학생(106명)을 모집하였으며, 대학의 기초연구를 지원하는 한국과학재단(1977)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960년대 말에는 울산·포항·여수·비인(충청남도 서천군) 등에 공업단지를 조성하였으며, 1973년부터는 대덕에 대규모의 집단적 연구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덕연구단지에는 1997년 말 현재 정부출연 연구기관(16개), 정부투자기관연구소(8개), 민간기업연구소(25개), 고등교육기관(3개), 국가기관(7개) 등 총 59개 기관이 입주하고 있으며, 분야별로는 신소재·정밀화학 분야의 연구기관이 15개, 전자·정보 분야 5개, 항공우주·기계 분야 5개, 생명공학 분야 4개, 에너지·자원 분야 10개, 표준·기초 분야 4개, 종합연구기관 6개, 교육·연구기관 3개, 국가기관 및 기타 7개로 나눌 수 있다.

대덕연구단지는 우리 나라의 과학기술 및 공학연구의 중심지 구실을 하고 있다. 한편, 1980년을 전후하여 민간 기술연구소가 많이 개설되었는데, 1981년부터 1996년 15년 사이에 기업체연구기관은 30여 개에서 2,400여 개로 80배 이상의 증가를 보였다.

1996년을 기준으로 우리 나라의 연구개발 투자총액은 약 10 조 8000억 원에 이르고 있는데, 그 중에서 기업체는 7조 9000억 원을 대학에서는 1조 원을 국공립연구기관에서는 1조 9000억 원을 사용하고 있다. 10조 8억 원의 연구개발 투자총액 중에서 개발연구에 6조 5000억 원을, 응용연구에 2조 9000억 원을, 기초연구에 1조 4000억 원을 사용하고 있다.

북한에서의 공학연구

북한은 1950년대부터 중공업과 국방과학기술을 진흥시키는 정책을 견지하고 자력갱생적 주체과학을 고수하는 한편 <합병법>(1984)을 채택하여 일본·독일 등 선진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에 노력하고 있다. 당중앙위원회 과학교육부가 모든 연구기관을 지도·감독·통제하고 있으며, 정무원 교육위원회에서 연구과제를 부과하고 운영을 통제하며 연구정책을 집행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주로 과학원·공업과학원·경공업과학원 그리고 공업대학과 공장대학에서 공학을 연구하고 있다. 과학원(1952)에는 설계연구소 등 41개, 공업과학원에는 토지개량연구소 등 29개, 경공업과학원에는 방직연구소 등 18개의 연구소가 있다. 공업대학은 1989년 현재 신의주경공업대학·청진선박공업대학·김책금속단과대학 등 70여 개에 이르고 있으며, 김책금속단과대학에는 채광·선광·흑색야금 등 28개의 공업계 학과가 설치되어 있다.

북한에는 1995년 현재 약 270여 개의 대학이 있고 학생수는 약 30만 명 정도이다. 이 중 이공대학이 60여 개, 농수산대학이 30여 개, 공장대학이 100여 개로서 과학기술계 대학이 전체 대학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북한에서의 과학기술 연구개발은 주로 과학원·대학·공장대학·조총련과학자 등에 의해서 수행되는데, 과학원 아래에 40여 개의 연구소, 10여 개의 분원과 산하에 30여 개의 연구소가 있다. 과학원 수준 다음에는 대학의 부설연구소로 1995년 현재 120여 개가 있다. 북한의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최일선 연구기관은 공장대학이다. 공장대학은 일반 대학에 비하여 연구의 질은 낮지만 공장에서 필요한 연구를 하기 때문에 연구의 결과가 바로 생산에 연결되고 있다.

공장대학은 1961년부터 시작된 제1차 7개년계획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설립되기 시작하였으며, 대규모 공장이나 기업소의 부설로 되어 있다. 1992년 현재 북한에는 96여 개의 공장대학이 있으며, 공장 자체를 실험 및 학습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공장의 지배인이 학장을 겸직하고 있으며, 교원은 공장에서 일하며 가르치는 과학기술자들이고, 학생은 공장의 근로자들이다.

이처럼 생산직 직장에 공장대학을 세움으로써 생산이론과 실천을 결부시켜 노동자의 기술수준과 생산의욕을 높이고 있다. 공장의 기능인력도 연구개발에 참여하기 때문에 기능인력의 질도 향상되는 장점이 있다.

한국 공학의 전망

공학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기제작 혹은 전쟁기술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하였다. 최근 냉전체제가 무너지기 전까지 각국은 첨단의 전쟁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는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전쟁기술을 지양하고 산업발전을 위한 첨단과학기술을 앞다투어 개발하는 상황에 들어갔다.

우리의 공업은 생산량에 있어 매우 큰 성장을 보였고, 생산 제품의 종류도 크게 증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성이나 제품의 품질면에서 아직 개량의 여지가 많아서 국제경쟁력의 약화와 수출에 있어 문제점으로 등장하였다. 그 원인은 기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도입기술이 연구개발로 연결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과거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앞선 무기를 모방하려고 하는 데 그치고 무기를 제작하는 원리로서의 서양공학을 배우려는 노력을 등한시하였다. 그리고 무기를 제작하는 공장으로 기기창을 설립해 놓고도 일본에서 무기를 대량 수입함으로써 무기를 생산하는 기술을 자립적으로 확립하지 못하여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광복 후 정부출연연구소와 기업체연구소를 중심으로 공업생산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여 왔으나, 공과대학의 기초공학연구가 아직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앞으로 21세기에는 우리의 고유 공학기술로 국가경쟁력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공학기술을 진흥시킬 수 있는 정책방안을 마련하여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공학 연구개발투자 현황

1996년 말 현재 우리 나라 인구 1만 명당 연구원수는 29명으로 1992년도의 20명보다 증가되었다. 연구원 1인당 연구개발투자비는 1992년 5천 600여만 원에서 1996년에는 8천 200 여만 원으로 증가하였다. 연구개발투자규모는 1996년도에 10조 8780억 원이고 국민총생산(GNP)대비로는 2.81%로, 1992년도의 4조 9890억 원과 2.09%에 비하여 금액으로는 2배 이상 신장되었다.

재원별 투자추이에서 1992년에 정부 부문이 18%였던 것이 1996년에는 22%로 다소 증가하였지만, 선진국의 25∼50%에 비해서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를 위해서 정부는 1997년 정부예산의 3.9%에서 2002년까지 5% 이상으로 제고할 계획이다. 학위별 연구원수 추이는 1992년에 총연구원수 8만8764명 중 박사 2만 2484명·석사 2만 5717명·학사3만 6962명에서, 1996년에는 총연구원수 13만2023에 각각 3만 6106명·4만 6537명·4만 5084명으로 석사와 박사의 증가가 두드러졌다.

한편 중점국가연구개발사업 추진계획에는 사업을 전략핵심산업 기술개발사업, 정보혁신 기술개발사업, 원자력·자원·에너지 기술개발사업, 대형시스템 기술개발사업, 창의적 기술개발사업, 공공복지 기술개발 등 6대 영역으로 구성하여 추진될 예정이다. 정부는 향후 5년간 수요에 부응하는 유연한 과학기술인력 양성 및 활용체제를 구축하고, 기술혁신을 선도할 수 있는 고급과학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것을 과학기술 인력정책의 핵심과제로 설정하였다.

엔지니어링 기술진흥을 위하여 2002년까지 세계 엔지니어링 시장점유율을 5%(1995년 3%) 이상으로 한다는 목표 아래, 2002년까지 1212억 원(1997년 60억 원)을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이러한 연구개발투자가 효과적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첫째 벤처기업을 위한 창업지원센터의 육성, 둘째 전문화된 공학교육 평가기관의 설립, 셋째 정부 기술부서에 공학기술자에 대한 적정한 지위 부여, 넷째 산학연 간의 교수 및 연구요원의 겸직 허용,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기술정보 수집을 위한 일원화된 정부조직의 구성, 다섯째 통일을 대비한 남북한 공학기술 및 산업의 표준화 사업 실시 등의 방향으로 공학기술정책이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공학교육과 공학연구에의 과감한 투자와 개혁만이 선진국의 기술종속을 벗어나 기술주권국가를 이룩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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